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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평상시도(平常是道)

기자명 법보신문

평상심에 머물려면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라

‘본래면목’이나 ‘불성’은
단독성을 가리키는 개념


나를 포함해 모든 존재의
단독성 깨닫고 살아갈 때
그것이 곧 온갖 꽃 핀 화엄


조주(趙州) 스님이 남전(南泉)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 화상은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조주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고자 노력하면 되겠습니까?” 남전 화상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곧 어긋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주가 반문했다. “하고자 않는다면 어찌 마음을 항시 고르게 하는 것이 도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남전 화상은 말했다. “도(道)는 ‘안다’는 것과도 그리고 ‘모른다’는 것과도 상관이 없다. ‘안다’는 것은 착각의 상태이고, ‘모른다’는 것은 멍한 상태일 뿐이다. 만일 진실로 ‘하고자 함이 없는 도(不擬之道)’에 이른다면, 허공처럼 확 트일 것이다. 어찌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겠는가!” 남전 화상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주 스님은 바로 깨달았다.

 무문관(無門關) 19칙 / 평상시도(平常是道)

 

 

▲그림=김승연 화백

 


1. 단독자, 교환가능성 없는 유일한 것

 

깨달은 자, 즉 부처는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불성(佛性)을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아니면 손님이 아니라 주인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을 부처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모두 옳은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본래면목이나 불성이란 개념과 관련된 한 가지 오해를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본래면목이나 불성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반성(généralité)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독성(singularité)을 가리킨다는 사실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성은 특수성(particularité)과 짝을 이루는 개념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사람’이란 개념이 일반성이라면, ‘조주’나 ‘남전’, 혹은 ‘임제’라는 개념은 특수성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 누군가 “한 사람만 데려와!”라고 명령한다면, 우리는 조주를 데려와도 되고 남전을 데려와도 되고, 아니면 임제를 데려와도 됩니다.


일반성이 ‘교환 가능성’에 지배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반성에 포획되는 특수한 것들은 모두 교환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이나 타인, 혹은 다른 생명체들은 정말 특수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어떤 여대생이 애완견을 한 마리 기르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의 모임도 꺼리고 집에 일찍 들어오는 것도 이 애완견 때문일 정도로, 그녀는 이 개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학교에 가면서 사단이 벌어지게 됩니다. 어머니가 딸의 담요를 빨다가 애완견도 함께 세탁기에 넣어버렸으니까요. 아마도 그 개는 담요 속에서 잠이 들었나봅니다. 당연히 애완견은 주검으로 발견되었지요. 당황한 어머니는 같은 품종의 비슷한 크기의 개를 애견샵에서 구해왔습니다.


비극이 일어난지 모르고 집에 돌아온 딸은 금방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자기 방에서 불안하다는 듯이 돌아다니는 개는 자신의 애완견이 아니었으니까요.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자, 오히려 미안함을 감추려는 듯이 어머니는 역정을 냅니다. “같은 개인데, 왜 그래. 사고라니까. 이 개나 잘 키워.”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이 정도면 예술입니다. 여대생은 어머니의 말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시선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비운의 죽음을 당한 그 애완견은 어머니에게는 ‘특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대생 딸에게는 ‘단독적인’ 것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이제 납득이 가시나요. ‘특수성’이 ‘교환 가능성’을 전제한다면, ‘단독성’은 ‘교환 불가능성’을 전제하는 겁니다. 조금은 난해한 서양철학 개념을 소개한 이유는 불교라는 사유가 가지는 성격을 명료하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교는 ‘일반성’과 ‘특수성’의 회로를 부정하고, 모든 존재를 ‘단독성’으로 보고자 하는 사유입니다.


2. 사랑의 과정, 단독성을 심화시킨다

 

사찰에 가면 왜 그렇게 다양한 불상들이 있는지 이제 이해되시나요. 그리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라고 사자후를 토한 임제 스님의 속내가 납득이 되시나요. 다른 것이 되고자 하면 안 됩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자신이 되어야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자신, 즉 ‘단독자(the singular)’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이든 아니면 타자이든 모두 단독자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단독자로 보았을 때에만 가능한 법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사랑의 과정은 단독성을 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불교의 자비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불교에서 그렇게도 ‘방편(方便, upāya)’을 중시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타자의 눈높이에 맞춘 가르침”은 타자의 단독성을 전제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기에 애완견이 죽었을 때 여대생 딸은 그렇게도 슬퍼했던 겁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자신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우리는 정말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싯다르타가 달리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했겠습니까. 바로 자리(自利)란 바로 싯다르타가 말한 이 경지를 얻은 것을 말할 겁니다. 반대로 이타(利他)는 ‘천상천하유타독존(天上天下唯他獨尊)’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온 우주에서 당신, 즉 타(他)만이 홀로 존귀하다”는 것을 깨우치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니, 이것이 이타(利他)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나 자신뿐만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단독성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이 불교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바로 그 화엄(華嚴) 세계일 겁니다. 단독성으로 우글거리는 세계는 자기만의 향기와 자태를 뽐내는 온갖 꽃들이 만발한 화엄세계에 비유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제야 본래면목이나 불성이란 단독성을 가리키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이해가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부처가 되려면 우리는 싯다르타나 임제를 흉내 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요. 어떻게 하면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단독성에 이를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선불교에서도 ‘나만의 마음’을 그렇게도 강조하는 겁니다. 남한테 영향을 받고 있는 마음도 아니고, 남의 마음을 흉내 내는 마음도 아닙니다. 바로 ‘나만의 마음’, 단독적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본래면목이자 불성입니다.


3. 잘 하려는 노력이 역효과를 낸다

 

이제야 우리는 ‘무문관(無門關)’의 열아홉 번째 관문에서 조주(趙州, 778~897) 스님과 남전(南泉, 748~834) 화상 사이에 펼쳤던 고담준론에 참여할 준비를 다 갖춘 것 같습니다. 남전 화상은 부처가 되는 길, 즉 도(道)가 ‘평상심(平常心)’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외적인 것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자기 본래의 마음이 평상심입니다. 그래서 평상심은 바람이 불지 않아 고요하게 있는 잔잔한 물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조주 스님은 평상심을 갖고자 노력하면 되는 것이냐고 반문합니다. 바로 이 순간 남전 화상은 그렇게 노력하는 순간 평상심은 얻을 수 없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립니다. 바로 이것이 열아홉 번째 관문을 통과하려면 반드시 뚫어야 할 화두입니다. 지금 남전 화상은 평상심이 부처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평상심을 얻으려는 노력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남전 화상은 우리가 부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조주 스님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조주 스님의 당혹감을 없애주려는 듯이 남전 화상은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하고자 함이 없는 도(不擬之道)’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고자 함이 없는 도’를 이해하려면 구체적인 사례 하나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연주를 잘 하려는 것”과 “연주를 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보지요. 어떤 바이올린 주자가 연주장에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750)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을 ‘잘’ 연주하려고 합니다. 왜냐고요,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바흐의 바이올린 소나타는 그의 연주 경험과 실력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난해한 곡이기 때문이지요. 당연히 그는 연주회장에서 바흐를 ‘잘’ 연주하려고 노력할 겁니다. 이것은 관중이 보았을 때 ‘잘 연주한다’는 평가를 얻으려는 겁니다.


‘잘’ 연주하려는 그의 노력은 역효과를 가져오기 십상일 겁니다. 오히려 바흐의 곡에만 몰입하여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것이 더 좋은 효과를 낳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바흐, 바이올린, 그리고 관중,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제대로 연주를 하겠습니까. 자신이 바흐인지 바이올린인지 구별할 수 없이 몰입하여 연주할 때 최상의 연주가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모든 연주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속앓이가 납득이 갑니다. 그들은 관중 앞에서 연주할 때보다 홀로 연습실에서 연주할 때 더 근사한 바흐가 울려 퍼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주자들에게 남전 화상의 말을 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연주회장에서도 홀로 연주할 때의 평상심을 가지고 연주하라고 말입니다.

 

▲강신주

홀로 연주할 때의 평상심을 공연장에서 유지하려는 노력 자체가 평상심을 해치게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일체의 인위적인 노력 없이 무엇인가를 하는 것, 바로 그것이 바로 평상심에 따르는 행동, 자신의 본래면목으로 행하는 삶이니까요. 이제 ‘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그것이 바로 평상심에 머무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강신주 contingen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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