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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착각

기자명 법보신문

변화하는 현상에 집착하면 진실 못봐

주위 환경은 매순간 변해가
한 가지에 매몰되면 오해만
자신 또한 순간순간 변화해
바른 견해로 현상 관찰해야

 

우리는 매일 무엇인가 보고 판단을 한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보고 들을 때, 그 보고 들은 것이 분명하고 정확하다는 생각을 갖는다. 주변의 환경은 변해도 그 변화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나는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 주변의 사물과 환경이 순간순간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말이다.


일본의 물 연구가 에모토 마사루는 물에 여러 가지 감정을 표현하고 그 물의 결정 구조를 촬영해 보았다. 따뜻하고 사랑스런 표현이나 소리를 접한 물은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었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표현이나 소리를 접한 물은 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똑같은 물이 표현하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또 같은 사람이 같은 물에 같은 감정을 표현해도 물의 결정구조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갖는다. 매 순간 사람의 상태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변의 환경과 사물만 매 순간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물과 환경을 보고 느끼는 우리 자신도 매 순간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매 순간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 변화에 끌려갈 것인가 아니면 그 변화를 이끌어갈 것인가. 정행품 경문을 보자.


“관법을 닦을 때면, 중생들이 실다운 이치를 보고 영원히 다툼이 없기를 발원해야 한다.”


‘관법을 닦을 때면’에서 ‘관법’이란 관찰하는 법을 말한다. 일반상식에서는 객관적인 사물과 환경이 있고, 그것을 우리가 관찰한다고 한다. 부처님의 말씀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관찰하는 사람의 수준과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 내용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같은 물 하나에 입장에 따라 네 가지 실질적인 견해를 갖는다는 말이다. 첫째 사람들은 물을 마시거나 씻는데 사용한다. 둘째 물고기가 느끼는 물은 새가 느끼는 공기와 같다. 그냥 생활공간일 뿐이다. 셋째 우리보다 맑고 선하게 사는 하늘의 존재에게는 물이 보석으로 보인다고 한다. 넷째 삼악도 가운데 하나인 아귀도에서는 물이 진한 핏물로 보인다고 한다. 같은 물을 대상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다르다. 우리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착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갖는 착각의 정도에 따라 환경은 다르게 나타나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사실로 여겨진다. 우리가 우리의 생활환경을 높이려면 환경만 개선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관찰하는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중생들이 실다운 이치를 보고’에서 ‘실다운 이치’란 사실 그대로의 이치를 말한다. 우리 중생들의 수준은 다양하다. 수준이 다양하다는 것은 착각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다양한 만큼 다양한 사실이 있다. 다양한 사실은 다양한 견해를 낳는다. 다양한 견해는 다양한 갈등을 낳는다. 갈등은 투쟁으로 투쟁은 전쟁으로 언제든지 확장될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과 감정을 오욕칠정이라 한다. 오욕칠정을 모두 아우르는 말은 ‘집착’이다. 집착이 있는 곳에는 개인 이기주의나 혹은 집단이기주의가 함께한다. 개인 이기주의는 개인의 착각을 불러오고, 집단 이기주의는 집단의 착각을 불러온다. 연속되는 착각은 사실로 여겨진다. 그리고 너와 나의 착각이 가미된 사실과 사실이 부딪히는 것이다. 나와 우리에게 당연한 것을 남과 저들에게 부당한 것이 된다.


‘여실한 이치를 본다’는 것은 부처님의 경지에서 맑고 투명하게 나와 주변 환경을 본다는 말이다. 눈병이 있으면 착시현상이 발생한다. 눈병이 깊으면 착시현상이 커진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업이 집착과 분별 그리고 망상을 일으킴으로써 우리가 나와 주변 환경에 대한 착각을 일으킨다. 업이 무겁고 가벼운 정도에 따라 착각도 크거나 작아진다. 업의 무게에 따라 착각이라는 왜곡현상의 크기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일체의 업이 소멸되어 원만한 경지에 이른 부처님들은 당신들 사이에 이견이 없다. 천 부처님 만 부처님이 다른 한 부처님에게 100% 공감하고 동의한다. 여실한 이치를 보는 부처님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따라 배워야 하는 이유가 된다. 개인과 단체의 착각정도를 부처님의 법에 기준하면 측정할 수도 있고 수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원히 다툼이 없기를 발원해야 한다’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의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지 2500년이 훨씬 지났다. 부처님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투쟁심이 견고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너무도 많은 충돌과 투쟁이 있다. 부부간의 충돌과 부모자식간의 충돌이 있다. 형제자매사이에도 충돌이 심화되고 있고, 선생님과 학생과의 충돌이 만연되어 있다.

 

▲도암 스님

갈등과 충돌 그리고 다툼이 발생된 곳에는 괴로움과 불행이 따른다. 우리는 진정으로 괴로움이 없기를 바라는가. 괴로움과 불행을 싫어한다면 다투는 습성을 알아차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괴로움과 불행의 늪에서 지내야 할 것이다.

 

도암 스님 송광사 강주 doam1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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