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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김정희, ‘세한도’

기자명 법보신문

손재형, 수닷타의 마음으로 ‘세한도’를 구하다

아홉 번 솥을 건 구정선사


“스님, 거기서 뭐하십니까?”
“중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네.”
“먹을 것이라니요?”
“모기와 벌레들에게 내 몸과 피를 먹이고 있다네.”


신라 말이었다. 더벅머리 청년이 강릉으로 가기 위해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는 길이었다. 길가 숲속에 한 노스님이 발가벗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괴이하게 생각해 그 까닭을 물었다. 뜻밖의 대답에 크게 감동한 청년은 스님을 따라 오대산 월정사로 입산했다. 모기와 벌레들에게 보시를 행한 노스님은 구산선문(九山禪門:신라 말 고려 초에 선종을 일으킨 아홉 갈래의 대표적 승려집단) 중 하나인 성주산문(聖住山門:통일신라 말 무염선사가 충남 보령시 성주사에서 개창한 산문)을 일으킨 무염(無染)선사였다.


무염선사는 자신을 따라온 청년이 어느 정도의 그릇인 지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행자야. 수행은 밥을 먹으면서 해야 한다. 밥을 지어야 하니 솥을 걸어라.”


청년은 하루 종일 정성을 다해 솥을 걸었다. 이만하면 흡족하다 싶었다. 해거름이 되자 외출하신 무염선사가 돌아오셨다. 그런데 솥 걸어놓은 것을 본 무염선사가 갑자기 호통을 치며 솥을 걷어 차 버렸다.


“네 이 놈, 이걸 솥이라고 걸었느냐? 이래가지고 어떻게 밥값을 하겠느냐? 다시 걸어라!”


다음 날 아침, 청년은 날이 새자마자 곧바로 일어나 솥을 다시 걸기 시작했다. 땀을 뻘뻘 흘려가며 성심성의껏 걸었다. 그러나 무염 선사는 이번에도 역시 불같이 화를 내며 꾸중만 하셨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아홉 번째 솥을 걸었을 때였다. 그때까지 계속 야단만 치던 무염선사가 흐뭇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흐음, 네 놈이 조금 쓸 만하구나.”


청년은 멀쩡하게 잘 걸려 있는 무쇠솥을 아홉 번씩이나 트집을 잡아 새로 걸게 해도 조금도 불평하지 않고 스승의 뜻을 받들었다. 그에게는 ‘구정(九鼎)이란 별명이 붙었다. 구정선사는 문자를 모르는 완전 까막눈이었다. 다른 행자들처럼 경전을 읽거나 염송할 수가 없었다. 까막눈 구정이 무염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즉심(則心)이 부처이니라.”


워낙 무식했던 구정의 귀에는 ‘즉심이 부처’라는 말이 ‘짚신이 부처’로 들렸다. ‘짚신이 부처’라니…. 의아했지만 워낙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깊었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구정선사는 자나 깨나 ‘짚신이 부처’라는 가르침을 화두 삼아 의정(疑情=의심)을 일으켰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산에 나무하러 가서 깊은 삼매에 들었다. 그때 홀연히 불어오는 바람에 지게가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짚신의 끈이 걸려 뚝 끊어졌다. 그 순간 구정선사는 확철대오(廓徹大悟·철저하게 크게 깨달음)했다. 많은 지식보다 한결같은 믿음과 정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화다.

 

 

▲정선, ‘초당춘수’, 비단에 연한 색, 28.8×21.5cm, 왜관수도원.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한 유비


이런 이야기는 불가(佛家)에서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지(三國志)’에는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얻기 위해 초당(草堂)으로 세 번 찾아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내용이 나온다. ‘삼고초려’는 ‘삼국지’의 인기와 더불어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의 인구에 회자됐다. 그 인기를 반영하듯 정선이 ‘삼고초려’의 이야기를 ‘초당춘수(草堂春睡:초당의 봄 잠)’라는 제목으로 그렸다.


때는 바야흐로 늦은 봄. 콸콸 흐르는 계곡물이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로 따뜻한 오후다. 초당에서 제갈량이 솔바람 소리와 댓바람 소리를 휘젓고 달려오는 봄바람에 취해 혼곤한 낮잠에 빠져 있다. 제갈량은 베개를 높이 돋우고 팔을 베고 자는데 이불은 덮지 않았다. 연한 더위가 느껴진다. 더불어 그의 낮잠이 진짜 졸려서 자는 잠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립문 안에서는 학이 거닌다. 학은 속세의 명리를 떠난 은사(隱士)의 거처를 암시할 때 등장하는 새다. 사립문 밖에서는 유비가 동자를 상대로 간곡한 만남을 청한다. 벌써 세 번째 걸음이다. 올 때마다 주인은 매번 잠에 빠져 있었다. 아침에 와도 잠자고 있었고 오후에 와도 잠자고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허구한 날 잠만 자나. 이것은 분명 잠을 핑계로 찾아온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리라.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유비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거듭 면담을 청한다. 유비는 낫살이나 먹은 사람이 새파란 젊은이에게 고개를 수그리는 것을 괘념치 않았다. 그의 가슴 속에는 무너져가는 한(漢)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큰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능한 책사가 필요했다. 제갈량만 얻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제갈량은 유비의 사람이 됐다. 제갈량은 세 번의 거절로 자신이 섬겨야 할 군주를 시험해본 다음 ‘이 사람이다’ 싶은 확신이 들자 한결같은 마음으로 군주를 섬겼다. 사람을 아끼는 유비의 정성에 마음을 열었다.
 
바닥에 황금을 깔아 제타 태자를 움직인 수닷타 장자


“저 동산을 저에게 파십시오.”
“팔지 않겠소.”

“저에게 꼭 필요한 곳이니 부탁드립니다.”
“글쎄, 싫다지 않소.”
“어떤 조건이면 파시겠습니까?”
“동산에 황금을 깔아놓는다면 몰라도 그 전에는 팔지 않겠소.”


프라세나지트왕의 태자 제타의 말을 듣자마자 수닷타 장자는 마차에 가득 황금을 싣고 와서 바닥에 가지런히 깔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제타 태자였다. 도대체 동산을 무엇에 쓰려고 저토록 탐을 내는 걸까. 제타 태자가 수닷타 장자를 다시 만났다.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이유로 이 동산을 사려고 하는 것이오?”
“저는 이곳에 부처님을 위한 승방을 세우려고 합니다.”


제타 태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부처님이 이렇게도 위대한 분이셨단 말인가. 빈 말로 던진 말을 구실 삼아서라도 좋은 장소에 모시고 싶을 만큼 그렇게도 훌륭하고 보배로운 분이셨단 말인가. 제타 태자는 수닷타 장자의 순수한 믿음에 가슴이 뭉클했다. 진심어린 마음을 연 제타 태자는 수닷타 장자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이 동산을 당신에게 드리겠소. 그러나 입구의 빈터만은 내게 돌려주시오. 나도 부처님께 선물을 하고 싶소.” 


수닷타 장자는 제타 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그 땅에 번듯하게 정사를 짓고 승방과 식당 등 필요한 건물을 우뚝 세웠다. 이 승원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줄여서 기원정사다. 수닷타 장자는 평소에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사람들을 구제해왔다. 그래서 수닷타라는 본명 대신 ‘아나타(의지할 데 없는 자) 핀디카(먹을 것을 주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아나타 핀디카’를 한문으로 번역하면 ‘급고독(給孤獨)’이다. 제타 태자는 ‘기타(祇陀)’다. ‘기수급고독원’은 기타태자와 급고독장자가 합작으로 만든 승원이란 의미다. 수닷타 장자는 불교에서 제가신자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수닷타 장자는 어떻게 해서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 수닷타 장자는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하되 구멍가게 주인이 아니라 지금의 재벌회사 회장쯤 되는 큰 장사꾼이었다. 그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집안 배경 때문이었다. 그는 코살라국 사람이었는데 마가다국에 사는 큰 부자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아들여 장사 차 라자그리하를 자주 방문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처갓집에 갔는데 반갑게 맞아줘야 할 처남이 정신없이 바쁜 지 본 체 만 체 했다. 수닷타 장자는 처남의 태도가 한 편으로는 서운하고 한 편으로는 궁금해서 그 이유를 물었다. 처남이 대답했다.


“나는 큰 공양을 준비하고 있네. 내일 부처님과 스님들을 우리 집에 초대해 공양을 올리기로 했거든.”
“부처님이라고요?”
“그렇다네. 부처님.”
“부처님이…. 이 도시에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코살라국 출신인 수닷타 자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부처님이 존귀한 분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 출현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 자신도 내일이면 부처님을 직접 뵐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처남과 헤어져 거처에 돌아온 수닷타 장자는 흥분과 설렘으로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서 날이 밝았으면….


계속 뒤척거리며 잠을 청했지만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새벽녘에 수닷타 장자는 거리로 나왔다. 한참 걷다보니 묘지였다. 그때 부처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용히 거닐고 계셨다. 묘지는 예로부터 수행자들이 수행처로 삼던 곳이었다. 수닷타 장자가 묘지에 이르자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어서 오너라. 수닷타여.”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기뻐서 부처님의 발밑에 엎드려 예배했다. 부처님은 수닷타 장자를 위해 보시와 지계에 대해 설법하셨다. 수닷타 장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했다. 이어 사성제에 대해서도 설법하셨다. 수닷타 장자는 고집멸도의 사성제도 정확히 이해하고 깨달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큰 기쁨을 얻은 수닷타 장자는 삼보에 귀의하고 평생 동안 부처님의 법과 교단을 위해 일할 것을 서약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식사에 부처님과 스님들을 초대했다. 그는 처남의 집에서 손수 식사준비를 해서 부처님과 스님들을 맞이했다.


얼마 뒤 수닷타 장자는 마가다국을 떠나 코살라국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얘기를 들려주었고 승원과 정사를 세워 부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자고 독려했다. 여러 사람들이 수닷타 장자의 말을 듣고 부처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그가 제타 태자의 동산을 사려고 했던 것은 오랫동안 좋은 장소를 물색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제타 태자의 동산은 시내에서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았다. 조용하면서도 이동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이 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수닷타 태자와 제타 태자의 결단으로 기원정사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적인 장소가 되었다.

 

 

▲김정희, ‘세한도’, 1844년, 종이에 먹, 24.7×108.2cm, 개인

 

 

손재형의 집념으로 되찾은 김정희의 ‘세한도’


‘우선(藕船)! 이것을 감상해보게(是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림 중앙에는 나지막한 초가집이 한 채 세워져 있고 양쪽에는 두 그루씩 나무가 서 있다. 초가 오른쪽에는 늙은 소나무가 한참 물이 오른 싱싱한 소나무에 기댄 듯이 서 있다. 초가 왼쪽에 서 있는 두 그루 잣나무는 오른쪽에 있는 나무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려 넣은 듯하다.


이 그림의 출처는 ‘논어(論語), 자한(子罕)’이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는 내용이다. 모든 나무들이 싱싱하게 푸른 빛을 자랑하는 한여름에는 알 수 없다. 어떤 나무가 추위 속에서도 여전히 푸른빛을 간직할 수 있을 지를. 한겨울 추위가 몰아쳐봐야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비유는 중의법(重意法)이다. 인간 세태에 대한 풍자다. 권세 있는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마치 입안의 혀처럼 굴다가도, 권세를 잃으면 언제 알았냐는 듯 외면하는 염량세태에 대한 비판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김정희 자신의 일이었다. 명문집안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던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 그러자 예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평생을 함께 할 것 같던 사람이 외면하는가 하면 무덤덤했던 사람이 오히려 걱정해주고 위로해줬다. 빨리 시든 나무와 늦게 시든 나무는 사람 사이에도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1804-65)은 소나무와 전나무처럼 변함없는 사람이었다. ‘세한도’는 그런 제자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담아 그린 스승의 마음이다.


“이 그림을 저에게 파십시오.”
“팔지 않겠소.”
“돈은 원하는 대로 다 드릴 테니 이 그림을 꼭 저한테  파십시오.”
“글쎄, 싫다지 않소.”
“어떤 조건이면 파시겠습니까?”
“나는 어떤 조건이라도 결코 이 그림을 팔 계획이 없소.”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81)은 ‘세한도’를 구입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를 만났다. 김정희의 진작 ‘세한도’가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손재형은 일제 강점기 때 우리 나라의 국보급 문화재를 수집한 근대 최고의 컬렉터였다. 그런 그가 ‘세한도’의 소재를 알았으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그는 당장에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쓰카 지카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후지츠카 지카시는 경성제국대학교수를 역임한 역사학자로 ‘청조문화동전(淸朝文化東傳)의 연구(硏究)’라는 책을 펴낸 전문적인 추사연구가였다.

 

그가 ‘세한도’를 소장하게 된 것도 그런 연구 과정 중에서 자연스럽게 구한 뒤였다. 그러니 그의 ‘세한도’를 향한 애정은 남다르게 하겠다. 돈 몇 푼에 귀한 작품을 팔아넘길 만큼 심지가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집을 드나들며 귀찮게 하는 손재형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손재형을 단순한 장사꾼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손재형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계속 문전박대를 당해도 한결같은 일념으로 찾아오는 손재형을 보고 후지츠카 지카시는 그가 ‘세한도’의 새로운 주인임을 알았다. 후지츠카 지카시는 돈 한 푼 받지 않고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넘겼다. 후지츠카 지카시의 직감은 적중했다.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넘긴 몇 달 뒤 그의 서재는 미국의 공습으로 폭격을 맞아 완전히 사라졌다. ‘세한도’가 거기 있었더라면 우리는 이 명작을 다시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수닷타 장자와 제타 태자, 손재형과 후지츠카 지카시는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산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행동은 마치 동일인이 반복한 것처럼 비슷하다. 역사는 이런 선각자들에 의해 발전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세상 어느 곳에서는 그들과 같은 선각자들이 의미 있는 협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조정육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큰 뜻을 이루려는 일념을 실천하기 위해서 협상중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의(大義)를 위해 한 평생을 바친다. 그들의 뜻은 정성과 신념에서 비롯된다. 우리 모두는 그들에게 빚지며 살고 있다. 언젠가 우리도 그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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