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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최북, '산향재도''석림모옥' / 강세황, '초당한거도''시'

기자명 법보신문

최북과 강세황 교유가 빚어낸 아늑한 고향정취

나는 고즈넉한 산동네에서 태어났다. 옛사람들이 선호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었다. 우리 집은 동네 맨 뒤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집 뒤가 바로 산이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염불암산’이라 불렀다. ‘염불암산’이 ‘염불암산(念佛庵山)’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산자락에 절이나 암자가 없었던 것으로 봐서 우리 동네가 사하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산자락에 바투 붙어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우람한 소나무 가지에 뭉툭한 솔방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형상이었다. 염불암산은 유난히 높고 험했다. 반면 양옆에 거느린 산은 턱없이 낮고 완만했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조아린 신하가 왕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조신했다. 하늘까지 닿을 듯 듬직한 염불암산의 보호 아래서 나의 유년은 아늑하고 순조로웠다. 운명의 장난 같은 것은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안전하고 고요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 투명한 균형감속에서 순명한 삶을 누렸다. 결코 와해되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움이었다.

 

최북과 강세황의 산향재

 

 

▲최북, ‘산향재도’, 18세기, 종이에 연한 색, 29×53.5cm, 국립중앙박물관.

 

 

 

최북(崔北:1712-1786년경)의 ‘산향재도(山響齋圖)’를 설명한 것이 아니다. 나의 어린 시절이야기다. 그런데도 ‘산향재도’를 보면 마치 나의 고향마을을 본 듯 두 장소가 유사하다. 최북이 나의 고향에 내려가 붓을 든 것일까? 최북이 전라도 골짜기에 내려갔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봐서 나의 고향마을을 그렸을 개연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림 속에 담긴 산 아래 마을이 워낙 익숙하고 무던해서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산향재’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호다. 강세황은 안산에 살 때 자신의 호를 딴 정자를 지었다. 최북이 강세황의 정자가 있는 마을을 그린 것은 두 사람 사이가 각별했음을 의미한다.

‘산향재도’는 강세황이 살던 장소를 그렸지만 실경산수화는 아니다. 전형적인 남종화다. 전경의 토파 위에 서로 다른 나무를 그리고, 각 경물에는 연한 색을 담백하게 우려내어 문인사대부의 아취를 담았다. 저 멀리 뒷산에는 푸른색의 농담을 조절해 거리감을 보여주고자 했다. 푸른색은 논밭과 수목과 냇물에도 스며들어 청신함과 산뜻함이 느껴진다. 산등성이에는 '태점(苔點)'을 찍었다. 세찬 바람 속에서 퇴화돼 산을 지키고 푸르게 한 세월의 유장함이다. 무심한 듯 찍은 태점은 마을 곳곳에 심어진 나무에서도 발견된다. 그 자연 속에 마을의 작은 집들이 무렴하지 않게 들어서 있다. 터무니없는 크기로 산과 들을 제압하는 건물 따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얼핏 보면 드러나지 않던 산마을의 매력이 볼수록 들여다보는 사람의 마음을 휘감는다. 언제든 스며들어 몸을 누이면 지난 세월의 상흔을 씻어줄 것 같은 산동네다.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정경이다. 잠재의식 속에 들어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고향에 대한 향수 같다.

강세황과 최북의 친분은 제시(題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면화(扇面畵:부채 그림)의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제시가 적혀 있다.

 

“숨은 듯 그윽한 바위에 굽이굽이 흐르는 물(隱隱幽岩曲曲泉)
 돌 숲 초가집엔 두서너 개 서까래(石林茅屋兩三椽)
 평생 강산의 흥 다하지 못하고(平生不盡江山興)
 다만 그림만 그린 가련함(只是丹靑已可憐)”

 

제시 끝에는 ‘호생관(毫生館)’이라는 최북의 호가 적혀 있다. 제시는 명대(明代) 문인인 이동양(李東陽:1447-1516)의 『회록당집(懷麓堂集)』에 실린 「제화이절(題畵二絶)」 중 한 편이다. 
 

 

▲ 최북, ‘석림모옥’, 종이에 연한 색, 79×119cm. 간송미술관  ‘고씨화보(顧氏畵譜)’의 고극공

 

 

최북은 이동양의 시를 무척 좋아한 듯 같은 제시의 시의도(詩意圖) 한 점을 더 남겼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석림모옥도(石林茅屋圖)’가 그것이다. ‘석림모옥도’는 ‘고씨화보(顧氏畵譜)’에 실린 원대(元代)의 화가 고극공(高克恭)의 그림을 참고해서 그렸다. 네 그루 고목이 높은 언덕에서 팔을 펼쳐 누각에 그늘을 드리웠다. 강에서는 어부가 노를 저어 강나루로 향한다. 누각 뒤로 들어선 언덕과 산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하며 뒤로 물러난다. 들쭉날쭉한 산 사이에는 구름이 스미듯 내려앉아 높은 산임을 암시했다. 듬성듬성 솟은 산봉우리를 징검다리 건너듯 건너 뛰다보면 어느 새 오른쪽 산 정상에 올라 산 아래 동네를 내려다보게 된다. 붓을 옆으로 뉘어 촘촘하게 미점(米點)을 찍는 것으로 산의 질감을 표현한 얌전한 작품이다. 제시 끝에는 ‘삼기재(三奇齋)’라는 최북의 호를 적었다.

‘산향재도’나 ‘석림모옥도’나 그림에는 따로 제목이 적혀 있지 않다. 모두 후대에 붙인 제목이다. 그런데 후인들이 같은 제시를 그린 작품에 서로 다른 제목을 붙였다. ‘석림모옥’은 제시의 ‘돌 숲 초가집(石林茅屋)’을 인용했으니 그렇다 해도 ‘산향재’는 왜 들어갔을까? 그림 속에는 강세황과 관련된 단어가 하나도 들어있지 않는데 말이다.

 

 

 

▲강세황, ‘초당한거도’, 『첨재화보(忝齋畵譜)』,1748년, 종이에 연한 색, 18.7×22.2cm, 개인

 강세황, ‘시’, 『첨재화보(忝齋畵譜)』,1748년, 종이에 연한 색, 18.7×22.2cm, 개인

 

 

 강세황도 최북과 똑같은 이동양의 제시를 쓰고 그림을 남겼다. 강세황이 36세 때 그린 ‘초당한거도(草堂閑居圖)’는 ‘첨재화보(忝齋畵譜)’에 실려 있는데 글과 그림이 분리되어 있다. 한 선비가 ‘산향재’인 듯한 정자에 앉아 연못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옆면에 이동양의 시가 적혀 있다. 제시 끝에 ‘산향재(山響齋)’라는 강세황의 호가 보인다. 여기에 적힌 ‘산향재’가 문제의 발단이다. 강세황의 호가 산향재인데 자신의 정자가 있는 ‘초당한거도’를 그리면서 시를 한 수 적어 넣었다. 그런데 시의 작자가 이동양이란 사실을 밝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강세황이 시인의 이름을 생략한 이유는 간단하다. 굳이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양의 시는 식자들 사이에서 상식으로 통할 만큼 조선 후기 문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그의 시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세황의 호가 적힌 것을 보고 강세황의 시로 착각할 만큼 이동양의 시는 낯설다. 이제 최북이 그린 선면선수화(扇面山水畵)의 제목을 ‘산향재도’라 붙인 이유가 이해될 것이다. 최북이 강세황의 ‘산향재’라는 시를 화제로 산수화를 그렸으므로 후대 학자들은 이 그림이 강세황의 시를 그린 ‘산향재도’일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제 ‘산향재’가 강세황의 시가 아니란 것이 밝혀졌으니 최북의 ‘산향재도’는 그냥 ‘선면산수화’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기왕이면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석림묘옥도(石林茆屋圖)’의 제목도 ‘석림모옥도(石林茅屋圖)’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묘(茆)나 모(茅)나 같은 뜻이지만 제시에 적힌 대로 써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문제점들이 있다 해도 두 사람이 친교 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강세황이나 최북 중 한 사람이 이동양의 시를 읽은 감동을 얘기하자 상대방이 공감했을지 모른다. 알고 보면 깊은 사연이 담긴 그림이다.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은 그림 한 점에는 작가의 교유관계와 취미 생활, 사는 장소와 지향점이 담겨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강세황은 61세에 처음 벼슬을 시작할 때까지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살았다. 32살 때 내려갔으니 서른 해 가까이 살았던 동네다. 가난 때문에 내려간 동네에서 아내를 먼저 보내는 울적함도 겪었다. 환갑까지 백수로 지냈으니 ‘평생 강산의 흥을 다하지 못하고 다만 그림만 그린 가련함’도 맛보았다. 이동양의 시를 옮겨 쓰면서 자신을 바라본 듯한 소회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는 61세에 영릉참봉을 시작으로 71세에 한성판윤에 오를 때까지 승승장구했지만 문제의 ‘산향재’를 옮겨 적을 때만 해도 그냥 백수였을 뿐이다. 강세황이 쓴 시와 최북의 그림에는 이렇듯 많은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다. 세월이 변함없는 고향의 뒷산만이 그 많은 사연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몇 해 전에 나는 다시 고향에 갔다. 거의 삼십여년 만이었다. ‘산천이 의구하다’는 말은 거짓이었을까. 어린 시절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보이던 염불암산은 산 중앙이 도려낸 듯 움푹 들어가 있었다. 산자락 밑에 솔방울처럼 매달려 있던 집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산사태가 나서 집을 덮어버렸다고 했다.

 

부처님의 고향방문

부처님이 고향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부처님이 출가하신 후 아버지 슛도다나왕은 항상 사자를 보내 아들의 모습을 은밀히 살피게 했다. 아들이 고행을 하고 득도를 하고 전법을 하는 모든 과정을 전해 들으면서 슛도다나왕은 아들의 변화된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슛도다나왕은 부처님께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고향방문을 청했다. 그런데 한 번 보낸 사신은 결코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부처님을 뵙자마자 가르침에 감화돼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해버렸다. 그런 어느 날, 드디어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볼 기회가 찾아왔다. 아들이 카필라성으로 온다는 전갈이었다. 꼭 12년 만이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버지가 기대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고향을 찾아왔다. 부처님은 카필라성에 들어선 후 궁전으로 곧장 가지 않았다. 출가수행자의 관습대로 거리에서 탁발을 하며 걸어갔다. 이것을 본 슛도다나왕이 사신을 보내 꾸짖자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예전부터 우리 가계에 내려온 관습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계는 ‘과거의 여러 부처님’을 가리킨 말이었다. 이제 부처님은 왕위를 물려받을 태자가 아니라 출가사문 석가족의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후 불교에 귀의한 출가수행자들은 자신의 법명 앞에 ‘석(釋)’이라는 글자를 써 넣어 부처님을 따라 석가족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출가 후 처음 고향을 찾은 부처님은 많은 젊은이들을 출가시켰다. 배다른 아우 난다를 비롯해 친아들 라훌라, 이발사 우팔리, 사촌 아난다와 데바닷타, 귀족 바드리카 등 그 수가 5백여명이 넘었다. 슛도다나왕은 심하게 충격을 받았다. 손주인 라훌라를 비롯해 쓸 만한 젊은이가 모두 출가해버리자 허전함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로는 ‘부모의 승낙 없이 미성년자를 출가시키지 말라’는 칙명을 내렸다.

수많은 젊은이들을 출가시킨 의도가 무엇이었을까. 몇 년 후에 석가족이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석가족은 이웃한 코살라국의 공격으로 완전히 멸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대신 출가한 사문 석가족을 통해 그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 얘기는 다음 기회에 살려보기로 하자.

부처님이 고향을 방문한 후 젊은이들을 출가시킨 일만 하신 것은 아니었다. 이웃한 나라와의 분쟁도 해결하셨다. 부처님이 카필라성의 교외에 있는 마하바나 정사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석가족과 콜리야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원인은 물 때문이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로히니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한 개의 제방을 만들어 두 나라의 논밭에 서로 물을 끌어들여 농사를 지었다. 그런 어느 해였다. 가뭄이 심했다. 물이 모자라 땅이 타들어가고 곡식이 시들었다. 석가족과 콜리야족은 제방의 물을 서로 자기네 땅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작은 시비에서 시작된 다툼이 점점 과격해졌다. 말다툼이 주먹으로 발전했고 나중에는 집단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험악한 상황이었다. 누군가 중재하지 않으면 두 사라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부처님이 현장으로 달려가셨다. 부처님의 모습을 본 양쪽 사람들은 무기를 버리고 예배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왕이여, 물과 사람 중에 어느 쪽이 더 소중합니까?”

“물보다는 사람이 더 소중합니다.”

“그런데 지금 물 때문에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양쪽 모두 정신을 차리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부처님은 거듭해서 원한과 고뇌와 탐욕을 멀리하는 삶에 대해 설법하셨다. 설법을 들은 석가족과 콜리야족은 각각 250명의 귀공자를 뽑아 부처님께 출가시켰다. 자칫 무력충돌로 번질 수 있는 분쟁이 현명한 부처님의 중재로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석가족과 콜리야족의 싸움이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나서 얼마 후의 일이었다. 부처님의 아버지 슛도다나왕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부처님의 양어머니인 마하프라자파티가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까지 출가는 오직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부처님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 차례나 간청했지만 부처님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마하프라자파티의 뒤를 따라 석가족의 많은 여성들이 출가를 원했다. 거듭되는 간청에도 거절당한 양어머니는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다에게 부탁했다. 부처님은 아난다의 부탁에도 계속 거절하셨다. 그러자 아난다가 부처님께 이렇게 질문했다.

“부처님. 만약 여성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출가해서 수행을 하면 남자와 같은 수행의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까?”

“아난다야. 물론 그럴 수 있다.”“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어찌하여 여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아난다는 양어머니가 부처님께 바친 은혜를 말씀드리고 간곡하게 출가를 부탁했다. 부처님은 고민 끝에 허락하셨다. 대신 여성출가자가 지켜야 할 여덟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부처님이 여성의 출가를 반대하신 이유는 결코 여성의 능력이 남성에 뒤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조정육
 

수행자는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서 수행을 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치안이 불안했다. 또한 남녀가 같은 장소에서 수행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결국 부처님의 이런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하프라자파티가 수용함으로써 여성의 출가가 인정되었다.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조정육 sixgard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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