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
단양 방곡사 회주 묘허 스님
  • 법보신문
  • 승인 2013.11.26 16: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삼독심을 없애고 육바라밀 행하는 이 몸이 청정가람

원인모를 병에 ‘고통’
살기 위해 남장사 출가


동산 스님 사친서 한 대목에
‘마루 닦으라’ 은사 뜻 이해


강원 졸업 직후 선방서 화두
스승 뜻 헤아려 ‘지장신앙’

 

하루 일종식 수행하며
총 6개 사찰 중창·인수

 

후학 용맹정진 바람 담은
두타선원 도락산에 조성

 

지혜 공장서 불성 녹여
계율 틀에 부으면 ‘부처’

 

 

▲묘허 스님

 

 

“닦고 나면 안 닦을 때와 어떠하냐?” 또 똑같은 말씀이다. 굳이 제자를 당신께서 머무르는 상주 남장사로 불렀으면 내로라하는 선사들의 일화 한 토막이라도 들려줄 것이지 법당 마루 닦으라며 매일 똑같은 물음만 던진다. “예, 전보다 깨끗해 보입니다.” “그래, 깨끗하게 잘 닦아라.”


3대독자 집안에서 삼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던 묘허 스님. 큰아버지 슬하에 아들이 없어 양자로 들어갔고, 큰 어머니를 따라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 즈음에 들어서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병명도 없고, 원인도 알 수 없었으니 백약이 무효였고, 교회에서 안수 기도까지 받아보았으나 효험이 없었다. 주위에서 말들이 많았다. ‘불공드려 낳은 아들이 교회 다니니 아프지!’


그랬다. 묘허 스님 어머니는 득남불공을 드려 아들을 보았다. 어느 날, 모친 꿈속에 노스님이 아기를 안고 나타나 일렀다. ‘이 아들이 크면 돌려 달라.’ 아들 점지해 준다는데 무슨 약속인들 못할까!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러한 아들이 백부에게 양자로 들어가 병까지 얻었으니 모친의 상심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었으리라.


‘혹, 절에 가면 호전될까?’ 집을 나왔다. 발길이 닿은 곳은 남장사. 훗날 은사로 모실 화엄 스님을 만난 것도 그 때였다. 산사에 있으면 왠지 편안했다. 고즈넉한 산사에 이는 바람 소리 한 점도 청명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큰어머니가 찾아와 데려갔다. 그러기를 세 차례. 그 사이 묘허 스님은 차도를 보였다. 이 병은 출가와 함께 씻은 듯 없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화엄 스님이 이를 알아차렸다. ‘여기 있으면 또 큰어머니가 데려갈 게 분명하니 다른 절로 가 행자 생활 하거라.’ 화엄 스님은 묘허 스님을 군위 압곡사로 보냈다.


은사 스님 부름 따라 남장사로 다시 왔는데 매일 법당 마루만 닦으라며 똑같은 질문만 던지니 답답할 노릇. 하지만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던 묘허 스님은 열심히 마루를 닦았다. 어느 날, 동산양개 스님이 속가 어머니에게 전한 편지 ‘사친서(辭親書)’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왔다.


‘명리를 구하지도 선비가 되고자 하지도 않고 불법이 좋아 세속을 버렸으니, 번뇌가 다할 때 근심의 불 꺼지고 은혜의 정 끊기는 곳에 애욕의 강물 마르리. 육근이 공해진 지혜가 향기로운 바람에 실려와 한 생각 생기려하면 지혜의 힘이 잡아주네. 어머니께 아뢰오니, 슬퍼하며 기다리지 마시고 죽은 자식이라 없던 자식이라 여겨 주소서.’
이어진 동산 스님의 어머니 답장 한 대목이 묘허 스님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네가 다른 곳으로 떠난 뒤에는 밤낮으로 항상 슬픈 눈물을 흘리게 되었으니 너무도 괴로운 일이었구나. 이제 너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했으니 네 뜻대로 하기를 허락하노라. 다만 네가 목련존자가 되어 나를 구제하여 윤회에서 해탈케 하고 나아가 부처님 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병의 원인은 그리움이었다. 친 어머니를 보고 싶었던 그 간절한 마음을 속으로 삭혀야만 했으니 온 몸이 아팠던 것이다. ‘어머니 은혜 갚아야 한다!’ 그 순간, 은사의 뜻도 헤아려졌다. ‘번뇌, 근심의 불을 꺼주시려 그리 말씀 하셨구나! 이젠 내 마음을 닦아야 한다.’ 대보리심을 향한 발심이 선 건 그 때였다.


신탄진 신흥사를 중창한 묘허 스님은 김해 원명사를 일구더니 이내 충북 단양 도락산 자락에 방곡사를 창건했다. 세 사찰 모두 ‘지장도량’이다.

 

 

▲방곡사 경내에 조성된 지장보살이 세상을 향해 자비를 펼쳐 보이는 듯하다.

 

 

묘허 스님은 강원 졸업 직후 전국 제방선원에서 화두를 들던 수좌였다.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3심을 강조한 고봉 스님의 ‘선요’를 만난 직후 ‘경전만 붙들고 있을 수 없다’며 강원 졸업과 함께 선방으로 발길을 돌린 묘허 스님이다. 그래서인지 수좌가 지장도량을 일구고 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지옥에 남아 있다면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 원력이 스님에게 닿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은사 스님은 오사카 의대를 졸업하셨습니다. 장차 의사가 되어 독립운동을 도우라는 모친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의해 군의관으로 끌려갔지요. 모친께서는 매일 저녁 등을 밝히며 지장보살님께 아들의 무사를 기도드렸습니다. 어느 날 등이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믿어지지 않지요? 후에 안 일이지만, 그 등이 잠깐 사라진 그 순간, 아들은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잠결에 막사를 뛰쳐나와 등불을 무작정 따라 갔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미군이 막사를 폭격했다 하더군요.”


지장보살의 가피력을 체험한 화엄 스님은 이후 출가해 지장도량을 일구며 기도의 힘을 불자들에게 전했다.


“지장보살님은 꿈속에서 머리를 깎은 스님으로 나툰다 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지장보살님의 품에 안겨 있었지요.”


화엄 스님 모친의 지장기도, 묘허 스님 모친의 태몽, 은사와의 만남. ‘지장보살’을 향한 묘허 스님의 숙세 인연이었음이다. 하지만 묘허 스님은 화두를 들었지 않은가?


어느 날, 화엄 스님이 묘허 스님을 불러 앉혀 놓고 경전을 전했다. 지장신앙 3대 경전 중 하나인 ‘지장보살본원경’. “이 경전을 보고 훗날 느낀 바를 말해 보거라.” 뜬금없이 웬 ‘지장경’인가 했지만 이 또한 스승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라 믿었던 묘허 스님은 화두를 내려놓고 지장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묘허 스님이 닿은 곳, 필설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화두, 염불, 기도의 세계가 궁극에는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방편이 다를 뿐이었다. 스승이 일렀다. ‘묘허, 네가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전하거라.’

 

 

▲충북 단양 도락산 자락에 자리한 방곡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어머니를 위해 도리천에서 법문하신 내용을 모은 경전이 ‘지장보살본원경’이다. 불가사의한 세계와 기적이 담겨있기에 이 경전을 두고 부처님 친설 경전이 아니라 말하는 이도 적지 않다. 부처님 입멸 후 사람들이 부처님을 찬탄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부처님께서도 기적을 보이셨습니다. 천불화현탑 터가 방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위성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보인 기적을 말함이다. 부처님께서 망고를 드신 후 그 씨를 땅에 심어 순식간에 싹을 틔워 거목으로 자라게 한 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셨다. 그 망고나무 열매 하나하나에 부처님이 화현하여 1000분의 부처님이 나타났다 해서 천불화현이라 한다. 아쇼카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탑을 조성했는데 이를 천불화현탑이라 한다. 지금은 훼손돼 터만 남아 있다.


“상카샤의 3도보계(三道寶階) 또한 ‘지장경’을 뒷받침합니다.”


부처님께서 도리천으로 올라가 3개월 동안 어머님을 위해 설법을 하고 내려오셨다. 그 때 부처님은 도리천에서 신족통으로 3도보계를 만들어, 부처님은 가운데 길로, 범천왕은 우측 길로, 제석천왕은 왼쪽 길로 내려왔다. 강림직후 3도보계는 땅 속에 파묻혔다. 아쇼카왕은 후에 3도보계가 묻힌 터에 정사를 세우고 6장(丈)의 불상과 높이 30주의 석주를 세웠다. 따라서 상카샤는 지금도 불교 8대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혜초 스님 역시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3도보계에 대한 아쇼카왕의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옛날 일이다, 대승 불교권에서나 거론하는 경전일 뿐이라며 ‘지장경’을 폄하하는 데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인과를 믿는 불자라면 가람 조성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묘허 스님이 전한 가람이란 달마 스님이 전한 그 가람이다.


“가람이란 청정한 곳을 말합니다. 달마 스님께서는 ‘육근을 항상 깨끗이 하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하여 안과 밖을 청정하게 하면 이것이 곧 가람을 짓는 것’이라 했습니다. 삼독심을 없앤 가람이 청정한 가람인 겁니다. 내 몸이 법당이요, 가람입니다.”

 

 

▲묘허 스님은 스승의 뜻을 이어 지장보살의 원력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불자는 불자다워야 한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사찰 불사에 기둥 시주하고, 탑 세운다 해서 불자역할 다 했다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는 것이다.


“불성 종자는 다 있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화로로 만드세요. 법의 불을 지피고, 진여불성의 공장에서 진여불성을 녹여야 합니다. 어디에 부어야 할까요? 삼취정계와 육바라밀이라는 계율의 틀에 부으면 됩니다.”


부처가 되라는 말씀이다. 누가 만들어 주지 않는다. 스스로 참다운 불상을 조성하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자신은 수행과 더불어 사찰 중창에도 힘을 썼지만 후학들만큼은 정진에만 매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도락산 자락에 또 다시 수행결사도량을 조성한 연유도 여기에 있다. 묘허 스님이 건립하고 있는 두타선원은 여느 선원과는 좀 다르다. 10평 규모의 1인 선방 10여개를 각각 조성했다. 용맹정진 원력을 세운 눈 푸른 불자들을 위한 공간이다.


“지금, 정각을 향한 발걸음을 놓으셔야 합니다. 동산 스님도 ‘이 몸, 금생에 구제하지 않는다면 또 다시 몇 생을 기다려 구제할 것인가?’라 자문하셨습니다.”

 

 

▲1인선방 10여채가 조성 중인 방곡사 두타선원.

 


방곡사 두타선원은 내년 동안거 때 개원된다. 묘허 스님은 지난 몇 년간 신심 두터운 불자들의 시주로 광주 대법사, 용인 백령사, 대구 불광사를 인수했다. 이 3개 사찰이 두타선원을 지원할 것이라 한다.


무문관 수행을 염두에 둔 납자라면 꼭 한 번 찾아 볼만한 도량이다. 분명, 머지않아 도락산에 새로운 선풍이 휘날릴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묘허 스님

1957년 상주 남장사에서 한산당 화엄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3년 불교전문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성암 강백화상 문하에서 대교이력 및 전등록을 이수했다. 보광선원에서 수선안거 이래 제방에서 정진, 23안거를 성만했다. 이후 대전 신탄진 신흥사 주지를 역임하고 현재 단양 방곡사 회주로 주석하고 있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