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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서울대 소장 발해 소조불좌상

기자명 법보신문

中 오대산 화엄밀교 신앙했던 발해불교의 유물

법화신앙·유가유식사상
발해불교 주류로 언급돼
밀교연구 이뤄지지 않아

 

발해문물전시관서 소장한
육비보살입상도 밀교유물
정소 스님도 깊게 관련돼

 

 

 

▲발해에 밀교신앙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서울대 소장 소조불좌상.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발해시기 제작된 묘관찰지인(妙觀察智印) 혹은 아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부르는 수인을 결하고 있는 소조불좌상이 몇 구 전하고 있다.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상경성(上京城)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발해 역사상 최후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치소(治所)였던 상경성은 성왕(794~795)의 즉위한 794년에 천도하여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까지 도읍하였던 곳으로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남쪽의 발해진에 위치한다. 이곳 상경성 일대는 1930년대부터 최근까지 발굴을 통하여 다양한 불교 유물이 출토되었다.


불상은 얼굴의 1/2 정도가 떨어져 나갔고, 광배를 포함한 나머지 부분도 심하게 파손되었다. 현재 상의 높이는 7.7cm이고 무릎 폭은 3.5cm, 어깨 폭은 2.5cm이다. 뒷면에는 다른 조각을 하지 않았고, 깔끔하게 물손질 되어 있어서 정면에서 보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은 단순하고 소박한 연꽃대좌 위에 앉아있으며 양 발은 흘러내린 옷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머리칼은 소라모양의 나발이 아닌 민머리이고, 얼굴은 살이 찐 편이다. 이목구비는 마모로 인해 제대로 볼 수 없으나 입술이 두터운 편이다. 수인은 양 손을 결가부좌한 하체의 중앙에서 양 손을 포개고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동그랗게 만들어 미타정인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발해의 불상 중 미타정인을 하고 있는 상은 이 불상이 유일한데, 중국에서는 중당(中唐)시기 밀교 금강·태장 양계만다라를 통해서 알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수인은 금강정경계(金剛頂經系)의 의궤에 나오는 밀교계 도상으로 일본에서는 대체로 9세기 중엽부터 미타정인의 아미타불이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발해의 승려들이 당대 밀교가 융성했던 중국 오대산에 왕래하였고,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같은 밀교 경전을 일본으로 전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발해에서도 밀교계도상이 충분히 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상경유지의 발해문물전시관에 전시중인 금동육비보살입상이나, 동경국립박물관소장 금동사비보살입상 또한 발해에서 특히 오대산계 화엄밀교가 신앙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발해불교가 고려전기까지 한국의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사리신앙이나 화엄밀교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군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9세기 중엽부터 정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이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발해의 승려들이 당대 밀교가 융성하였던 오대산에 왕래했고 밀교경전을 발해에서 일본으로 전해주었다는 사실로 미뤄 볼 때, 발해에서 밀교계도상인 아미타정인의 아미타불이 제작되기 시작하는 것도 이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한국의 밀교는 일반적으로 신라의 명랑법사(623년 귀국)에 의해 전래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밀교도상으로 표현되었다.


미타정인을 결한 신라의 아미타불상으로는 경상북도 영풍군 비로사 석조아미타불좌상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분황사출토 석조아미타불좌상 등이 있다. 적은 수이지만 신라에서의 밀교도상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미술은 기본적으로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에 도상적 근거에 의해 제작된다. 그러므로 불교미술에 대한 연구는 작품이 제작되었거나 신앙되었던 지역이나 그 시대의 불교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발해 불교미술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있는데 지금까지 연구에 의하면 법화신앙이나 유가유식사상 등이 가장 크게 유행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밀교 또한 신앙되었다고 생각되지만,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발해 소조불좌상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진 상경성.

 


발해의 밀교에 관한 자료는 극히 희소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몇몇 유물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일본 이시야마사(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는 밀교경전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加句靈驗佛頂尊勝陀羅尼記)’를 발해사신 이거정이 일본에 전해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소조미타정인여래좌상(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이나 금동육비보살입상(상경성 발해문물전시관 소장), 금동사비보살입상(동경국립박물관 소장), 금동판불(일본 야마토문화관 소장)과 같은 유물들 또한 발해에 밀교신앙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이 유물들은 하나 같이 9세기에 제작된 것들로서 당시 유행하던 중국의 오대산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발해 밀교 신앙의 전통은 요나라에 의해 패망한 이후에도 유민들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데, 특히 요대 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양북탑과 주변의 요대 탑들에서 그 관련성을 찾아 볼 수 있다.


발해의 승려 가운데 중국 밀교의 상징인 오대산과 관련 깊은 인물로는 정소(貞素)를 들 수 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은 838년에 견당사와 함께 당에 들어가 847년에 귀국해 천태종의 총본산인 엔랴쿠지(延曆寺)의 주지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치카쿠(慈覺)대사라는 시호가 내려진 고승이다. 그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의 경험을 일기로 정리한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는 9세기 중반의 당의 상황을 전하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일본 승려 레이센(靈仙)과 발해 승려 정소의 이야기가 나온다.

 

 

▲발해승려 정소 스님의 여행로 추정도.

 


일본 사신들과 함께 당나라에 도착한 엔닌은 840년 4월 오대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던 중 칠불교계원(七佛敎誡院)에서 레이센의 죽음을 애도하며 발해 승려 정소가 쓴 편액(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尙詩幷序)이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편액에 의하면 정소는 당에 유학 중이던 원화(元和) 8년(813) 늦가을 여사(旅舍)에서 응공(應公)을 만나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응공과의 인연으로 응공의 스승인 레이센과도 교류를 하게 된다. 레이센은 장경(長慶)2년(822) 오대산에 들어갔는데, 장경5년(825) 사가(嵯峨)천황이 레이센에게 하사한 금 백냥이 장안에 전해지자 정소가 그 돈을 오대산 금각사(金閣寺에) 전해주었다. 레이센은 다시 1만립의 불사리와 새롭게 번역한 경전 2부 및 고칙(조서와 칙서) 5통 등을 정소에게 건네며 일본천황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소는 이것들을 일본으로 가 전했으며, 천황으로부터 다시 하사금 백량을 레이센에게 전해줄 것을 의뢰받고 돌아왔다. 정소는 태화(太和)2년(828) 4월7일, 영경사로 돌아와 레이센을 방문했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한다.


즉, 정소는 레이센에게서 불사리와 새로 번역한 경전을 위탁받아 발해사의 배로 일본에 건너가 전하기도 하고, 일본천황에게서 부탁받은 백금을 레이센에게 전달해주기도 하는 등 둘 사이의 가교역할을 충실히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단순한 가교이기 보다는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였으며, 당대 최고의 최고의 학승이자 번역승이었던 레이센의 학식으로 볼 때 학문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편액의 서문에 의하면 정소는 레이센의 죽음에 대해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비통해했다고 한다.


발해의 불교는 대체로 문왕(文王, 737~793)의 진흥책에 힘입어 9세기대에 가장 번성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 중국에서는 오대산을 중심으로 징관(澄觀, 738~839)에 의해 완성된 화엄밀교사상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발해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리라 충분히 짐작되지만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역시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유물의 수가 매우 적고, 남아있는 사료 또한 많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임석규 실장

하지만 좀 더 폭넓은 시야로 발해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을 아울러 본다면 발해에서의 밀교신앙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발해의 뒤를 이어 만주지역을 지배했던 요나라의 미술은 발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범아시아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오대산의 밀교와 발해 불교의 관련에 대한 연구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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