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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만기사 주지 원경 스님

존중·용서 없는 세상서 어찌 통일을 기대하는가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아들
아버지 사형 소식 충격에
승복 벗고 산사 나와 방황

절 신도 손가락질 참을만
도반마저 ‘빨갱이 새끼’
정부 기관 감시눈길 ‘공포’

송담 스님 첫 제자로 출가
한과 그리움 시심에 녹여
‘500편 낙서’모아 시집 발간

격동의 근현대사 고통 껴안고
‘원수 갚지말고 은혜 갚아라!’

 

▲원경 스님

 

 

도안(道安) 스님의 경책에 따르면 출가란 ‘어버이와 일가친척을 떠난 것이며 세속의 몸치레를 버린 것’이다. ‘쌀 한 톨에도 7근의 시주 은혜가 깃들어’ 있음을 뼈에 새기며 ‘니르바나에 이르려는 수행인’들에게 출가 전의 일을 굳이 캐묻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정(而丁) 박헌영의 아들이라면!

4월 ‘박헌영 트라우마’를 세상에 내 놓은 손석춘 교수(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는 박헌영을 이렇게 소개했다.

‘……항일운동으로 감옥에 갇힌 박헌영은 똥을 먹었다. 정신병자로 풀려나자 곧장 독립운동에 나섰다. …… 대다수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해갈 때, 박헌영은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항복했던 그 시점에 압록강-두만강 아래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세력의 지도자가 바로 박헌영이었다.’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고,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였던 박헌영. 그러나 남측으로부터는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북측에서는 ‘미 제국주의 간첩’으로 몰렸다. 김일성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1958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남북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건 금기였다. 식민, 분단으로 점철된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박헌영, 다는 아니지만, 적어도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사실을 직시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박헌영은 ‘비운의 혁명가’로 남아 있다.

‘봉황새가 춤을 춘다’는 경기도 평택 무봉산(舞鳳山) 만기사 경내에 12월의 함박눈이 거세게 몰아쳤다. 원경 스님은 차 한 잔 따른 후 내리는 눈을 응시했다. 조용하지만 강렬하다. 휘몰아치는 눈발 사이로 지리산에서 보낸 10대 유년의 겨울이 보였던 것일까?

1950년 열 살의 박병삼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미군 체포령에 쫓겨 월북(1946년)한 뒤 자신을 돌봐 준 사람들이 하나둘씩 체포됐다. 자전거에 자신을 태워 동국대학교, 남산 등의 장충동 일대를 구경시켜 주며 찐빵을 사 주었던 김삼룡(사회주의 운동가), 만날 때마다 귀여워 해 주었던 이주하(사회주의 운동가) 아저씨가 6.25한국전쟁 직후 사형 당했다. 화엄사에서 자신의 머리를 삭발해 주었던 동월 스님은 빨치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다 경찰에 잡혀 유치장에 있던 어린 박병삼을 구해내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아이러니 하지만 그 빨치산의 ‘지리산 사령관’ 이현상 또한 박병삼을 애지중지 했다.

“일제 강점기 때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존경한다고 말하더니, 해방 후엔 아버지는 죄인이고 무서운 사람이니 아들이라 말해서도 안 된다고 해요…… 대체 아버지가 어떤 분인가? 사람들은 왜 나를 살리려 하고, 끝내 비극의 죽음을 맞는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딱 둘. 집무실에 앉아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버지, 서류가 쌓여 있는 책상 근처만큼은 못 오게 했던 아버지.

청암사, 해인사를 거쳐 예산 대련사에 머물 던 1958년 12월 15일, 박헌영과 김삼룡의 연락책이었던 한산 스님(속가 고종사촌)이 찾아와 제사상을 차렸다. ‘박헌영 영가’라 쓰인 위패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 처음 물어봤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지....”

한산 스님은 ‘100년에 한 번 나올만한, 우리 민족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될 분’이라며 ‘훗날 선생님이 태어난 곳이 있다면 나도 태어나고 싶고, 못다 하신 일 다시 하신다면 나는 서슴없이 따라 할 것’이라 했다. 아버지의 사형 소식은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산사(山寺)도 그의 마음을 잡지는 못 했다. 승복을 벗었다.

방황 속에 자살시도까지 했던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한산 스님 뿐 이었다.

‘송담 큰스님만이 너의 한 많은 생을 승화시켜 제도해 주실 것이다. 학교 못 다닌 것 원망 말고 만권의 책을 읽어라.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기를 발원하고 훗날 좋은 세상이 오면 아버지의 자료를 모아 책으로 엮어만 놓는다면 저 세상에 가신 선생님도 기뻐하실 것이다.’ 원경 스님은 송담 스님의 첫 제자로 들어가 정식 출가했다. 원경 스님은 1959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승적상으로는 그 때가 1960년이다.

구도정진의 길에 들어섰지만 승가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절에 온 신도들이 손가락질 하는 건 그래도 괜찮았다. 하지만 믿었던 도반들마저 ‘빨갱이 새끼니 교구본사 주지 할 생각은 말라, 큰 스님 옆에서 장난하지 말라’ 할 때는 분노가 끓었다. 그 울분도 삭혀야 했던 원경 스님이다. 어디를 가도 따라 다니는 정부기관의 감시 눈길은 스님을 공포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동안 사용한 이름만도 병삼, 유동, 세원, 일우, 명초, 성진, 혁 등 14개예요.”

부처님 말씀만으로는 산산이 찢겨 나간 가슴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낙서’라도 해야 했다. 적막한 산등성 위에 홀로 서 있다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아버지를 그려 본적이 있다.

‘아버지! 세월이 참으로 많이 변했습니다/ … 당신을 기다렸던 어린 것이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 무리를 잃어버린 외기러기마냥 그리움에 쌓여/ 저녁노을 넘어가는 아랫마을만 바라봅니다/ … 언제까지 이렇게 떨며 외로이 살아야 합니까’(그리움)

어디, ‘박헌영 죽음’만 있었던가. 한반도, 만주, 상해에서 쓰러져간 항일, 독립 운동가가 있었고, 전쟁 전후 ‘왜곡된 이념, 색깔’ 폭압에 무참히 피를 토해야 했던 민중이 있었다. 그들이 부르고 싶었던 노래, 못다 부른 노래, 그 누가 제대로 들어주기나 했던가! 지나가는 상여만 보아도 그들의 절규가 들려왔을 원경 스님이다.

‘…상여를 맨 시골사람 상두군이 몰려가고 있었는데/ … 나는 그때도 한없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었다오/ 얼굴을 돌려대고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으니/ 함께 길을 걷던 도반스님네들/ 왜 우느냐 영문을 물었었는데/ 나는 머리가 아프다고 얼버무렸다오/ 이 서러운 한을 너희들이 어이 알 것이냐고’ (한·1)

 

▲ 쇠잔해있던 평택 만기사를 천년고찰 명성에 걸맞게 불사한 건 원경 스님이다.

 


500편 남짓한 ‘낙서’를 묶은 시집 ‘못다 부른 노래’가 출판된 건 2010년. 좀 더 일찍 내놓지 않은 특별한 연유가 있었던 것일까? “한산 스님은 글 쓰는 것을 삼가라 하셨습니다. 무심히 튀어나오는 저의 저항적 언구가 화를 불러 올 수 있을 것이라 내다본 거예요.” 독재정권 시절 ‘박헌영’을 추모하고, ‘연좌제’에 분통을 터트리는 글을 세상에 내 놓았다면 스님이라 해도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다소 늦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라면 적어도 출판에 걸림은 없었을 터이니 말이다.

“제 스스로 ‘시’라 생각했다면 내 놓았겠지요. 하지만 이건 ‘낙서’예요. 어렸을 때 백석의 시를 좀 보긴 했지만 시상(詩想)이 뭔지도 몰라요.”

“시인들에게 부끄럽다”면서도 “중생인지라 시집이라 하니 기분은 좋다”고 한다. 하지만 ‘시가 아닌 낙서’라는 주장(?)은 끝내 굽히지 않는다.

‘원경’은 ‘박헌영의 아들’이었지만 역시 스님이었다. 지금의 용화사 법보선원도 원경 스님의 불사로 이뤄졌고, 천년고찰이라 하지만 허름했던 만기사를 대도량으로 일군 장본인도 원경 스님이다. 1983년 발생한 교통사고로 갈비뼈 9개가 부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무’자 화두를 들며 가행정진의 길을 걸었던 스님이다. 선지가 있으니 부처님 말씀도 새롭게 새겨져 갔을 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꽃을 꺾어줄 때가/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즐거웠고/ 두려운 날들을 잊을 수 있었다오/ 설움의 세월을 숨쉬게 했었다오/ 아! 꽃은 저만 고운 줄 알았더니/ 이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구려’ (꽃)

바닷가에서 놀고 있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보면서 화엄의 상생과 희망을 노래한다.

‘… 숨이 찬 아이들 보소/ 이제는 모래방석에 털썩 주저앉아서/ 한 손만 내 두르고 있네/ 손을 당기니 바닷물이 따라오고/ 손을 내미니 바닷물이 물러가네/ 어허 아이들 힘에 큰 바다가 움직이고 있네/ 말 마라 이제 우리가 다 늙고 죽고 나면/ 저 아이들이 이 세상을 저렇게 지휘하리라’ (바다·3)

고희를 넘긴 원경 스님. 10대의 화엄사 삭발 출가로 기준 삼으면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많은 한과 울분, 지금은 어떠할까. 무자 화두에 다 녹았을까? 화로에 앉은 눈송이처럼!

“한산 스님이 아버지의 죽음을 전하며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게 운명이다. 너는 베풀며 살아라. 네가 착해야 세상도 착해진다.’ 그 뜻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한산 스님의 당부대로 ‘이정 박헌영 전집’은 자료수집에 나선 지 11년만인 2004년 7월 완간했다. 하지만, 북한은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이정 박헌영’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다. 그러기에 ‘박헌영 복권’은 시일이 더 걸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경 스님은 그 ‘복권’보다 더 시급한 게 아버지가 이끌었던 ‘남로당’ 사람들의 명예회복이라 했다.
“박헌영 선생을 따르던 동행자들에 대한 진실이 밝혀져야 해요. 그 분들 한 분 한 분이 먼저 복권돼야 해요.”

요원하게만 보이는 평화통일, 우린 이 자리에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누어야 해요. ‘나’만 생각해 남의 것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이기심은 결국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갈등만 증폭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타인과 상대의 주장을 존중해야 해요. 존중이 결여 된 비판견제 또한 갈등만 일으킬 뿐입니다. 그리고 용서해야 해요. 나눔과 존중, 용서의 마음 없는 세상이 정말 무서운 세상입니다.”

상생화합의 마음이 새 세상을 열 것이라는 뜻이다. 통일도 여기서 시작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거센 눈발도 바람이 잦아들었는지 서서히 숨을 고르고 있다. 스님 말씀대로 ‘우리 사회도 이제 이념색갈 공세를 멈추고 숨을 골라야’할 때다. “함박눈이 어느새 길을 덮었네요. 누군가 길을 낼 겁니다.” 그 누군가는 우리 모두일 것이다.

만기사로 들어서는 입구에 새겨진 일구가 스쳐간다.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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