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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후관(여래입멸관)

부처님 열반 이후 존재 여부 오래된 논란

▲ 그림=김승연 화백

불교는 중생을 윤회하는 존재로 본다.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생사를 끊임없이 되풀이 했고, 그 여정은 계속된다. 중생이 윤회를 하는 까닭은 무명(無明)과 업(業) 때문이다. 이를 끊지 못하면 반복되는 생사로부터 탈출 할 수 없다. 이런 무명과 업을 모두 청산하고 윤회로부터 완벽하게 탈출하신 분이 있다.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무명과 업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부처님의 사후에 대해 부처님 계실 때부터 많은 논쟁을 낳았다. 부처님이 몸을 버리고 입멸한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다. 몸은 멸하지만 마음이나 영혼 따위가 있어 어딘가에 머무는 것인지 아니면 몸의 소멸과 함께 나머지들도 모두 소멸되어 완전한 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인지에 대해 제자들은 궁금해 했다.

이런 의문은 오늘날의 불자들에게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초기불교, 부처님 사후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 사라진 것도 아냐
대승, 육신은 사라져도
중생과 더불어 늘 상주

부처님의 사후 존재여부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이 돌아가시면 인간이 알 수 없는 고차원의 다른 세상에 태어나 영생을 누리고 있을 것이라는 견해이고 둘째는 이 세상에 어떤 존재로 남아 있으면서 함께 할 것이라는 견해이며 셋째는 완전히 사라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견해이다.

경전에서는 어떤 존재가 미래에도 지속되어 항상 할 것이라는 견해를 상견론(常見論) 혹은 유론(有論)이라 한다. 반대로 어떤 존재가 미래에는 지속 할 수 없고 사라져 아주 없어질 것이라는 견해를 단멸론(斷滅論) 혹은 무론(無論)이라 한다. 이런 의문에 대해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의 사후에 대해 두 가지 견해를 짓지 말라고 가르친다. 부처님의 사후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케마경’에서 부처님은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묻는 빠세나디 국왕의 질문에 “대왕이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혹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답변을 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부처님의 사후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경리사나 회계사가 갠지즈강의 강물이나 모래를 됫박으로 담아서 헤아리려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말했다. 이는 부처님의 사후에 관한 질문들이 성립할 수 있는 논거 자체를 무너뜨린 것이다.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으니 해답 또한 내릴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의 이런 주장과 달리 대승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 사후에 관한 답변은 논지가 분명하고 철저하다 할지라도 미혹한 중생들로서는 무엇인가 허전한 감이 없지 않다. 부처님의 사후가 단멸의 상태나 무의 상태가 아니라고 해도 다시는 태어남이 없을 것이라는 말씀은 결국 부처님을 비존재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부처님은 사후는 있는 것도 아니고 아주 사라진 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부처님이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 분이라면 당연히 단멸이나 무의 상태로 돌아갔다고 중생들은 인식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법계상주설(法界常住說)을 말한다. 부처님께서 몸을 버리고 입멸에 들었다 해도 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중생과 더불어 이 세상에 늘 상주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상도 아니요 단도 아니며 유도 아니요 무도 아니며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지만 한 번도 세상을 저버린 적이 없이 늘 머물러있다는 설명이다.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선남자들이여,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여래가 성불한지는 이미 백천만억나유타겁 이전 이니라. 그 때부터 여래는 항상 이 세상에 머물러 법을 설해 중생들을 교화해 왔으며 다른 백천만억겁 세계에서도 중생들을 교화해 이롭게 하였느니라. 선남자들이여 내가 몸을 버리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무여열반의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실제에 있어서 여래는 무여열반에 들지 않노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부처님은 본래 죽음이 없는 존재인데 중생들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짐짓 죽음을 보인 것이며 실상은 지금도 부처님은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한 끝없는 법륜을 굴리고 계신 것이다.

이 같은 부처님의 수명 문제는 ‘대승열반경’에서도 나타난다. ‘장수품’에서 부처님은 “선남자여,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달이 나타나지 않으면 달이 없어졌다고 하지만 실로 달은 없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아서 염부제에서 입멸을 보이지만 실로 입멸에 든 적이 없고 그 진실한 몸은 법계에 늘 상주 하느니라”고 설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죽지 않은 영원한 존재로 규정하고 이를 중생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신뢰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대승의 여래상주설은 어디에 근거해서 나타난 교리일까? 이는 불타관과 열반관처럼 대승불교의 연기론에 근거해서 나타난 교설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언급 한 것처럼 대승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부터 펼쳐지고 있다. 연기의 이법과 부처와 열반을 동일시한다. 연기의 이법이 곧 부처의 몸이며 열반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성을 머금고 있고 이 연기의 법성은 본래부터 고요한 열반이며 부처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석가모니라는 인격화된 부처보다는 연기의 이법인 법신불을 중요하게 여긴다. 대승열반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몸을 버린 후 부처님은 아주 소멸하거나 다음 생에 몸을 받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신과 대지혜와 해탈의 몸이 되어 법계에 상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한 가지 제기 되는 문제가 있다. 부처님의 사후에 대해서 대승불교는 상견론과 유론에 입각해서 보고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표피적으로 보면 그러한 입장을 띨 수는 있으나, 가장 핵심이 되는 연기의 이법을 적용하면 대승불교의 시각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연기는 곧 단상(斷常) 유무(有無) 생멸(生滅)을 여읜 중도묘법(中道妙法)이다. 연기는 중생의 분별을 초월해 법계에 상주한다. 대승은 이런 연기를 불격화 시킨 것으로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상견론 유론과는 차원이 다르다.

초기불교의 사후관에 입각한다면 부처님과 중생과의 교류는 불가능하다. 부처는 이미 중생계와는 결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의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 중생계에 진리로써 함께 하기 때문이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36호 / 2014년 3월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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