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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교수사 홍선 스님

진실 마음 한 조각 정토 여는 원동력

▲ 홍선 스님은 “무조건 참는 게 인욕이 아니다”며 “자비심으로 인욕한다는 말을 잘 새겨보라”고 당부했다.

범어사 교수사 홍선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휴휴정사를 3월 봄비가 촉촉이 적시고 있다. ‘쉰다’는 건 쉬운데, 쉬고 또 쉰다는 ‘휴휴(休休)’는 어렵다. ‘휴거헐거(休去歇去)하면 철목개화(鐵木開花)’할 것이라 했지만, 어떻게 ‘쉬고 또 쉬어야’ 쇠 나무에 꽃이 피는 이치를 알 수 있을까? 스님이 손수 차를 내는 사이 슬며시 여쭈어 보았다.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쉴 일 없습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한 마디라도 전할 법한데 아니다. 차 한 잔 따르던 스님이 책상으로 시선을 돌린다. 저길 한 번 보라는 뜻일 터. 책상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 강의나 집필 준비 중임에 틀림없다. 아직 할 일 많아 ‘쉴 일 없는 산승’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본뜻이 여기에 있겠는가! 한 번 더 여쭈어 보았다. ‘혹, 가슴에 담고 있는 선구’가 있는지. 만면에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른다.

“없습니다.”

초반부터 심상치 않다. 첫 매듭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만사가 엉킬 건 너무도 자명한 일.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십니까?”

“그 때 그때 살펴 보냅니다.”

미소를 보이며 조용히 즉답해 나가는 스님의 풍모가 인상적이다. 선기 넘치는 기백을 품 안으로 싸안은 느낌. 군더더기 없는 담백함과 세월이 빚어 낸 고졸함이 더해져 있는 듯하다.

동산, 선 널리펴라 ‘홍선’ 법명
지효, ‘자리이타’ 당부 족자선물
아직 이름 값 못해 마음의  빚

통도사 적멸보궁 설명 못하자
무식하단 비아냥 소리에 발심
하루 3시간 자며 일본서 유학

영험담, 꾸며낸 얘기 결코 아냐
고금서도 일심가피 비일비재
이고득락 향한 한 걸음 더 중요

진정한 인욕은 자비심서 생겨
마음 다해 사람·자연 대하면
이 세상 최고의 보물 얻을 것

작은 사진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관조 스님이 카메라 렌즈에 담은 사진, 지효 스님이다. 옷매무새 하나도 함부로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칼칼함이 전해져 온다. ‘조계종 정화운동’ 초기 홀로 할복을 감행했던 스님, 전국 제방선원을 비롯해 천축사 무문관 6년 정진을 타파했던 스님, 불국사와 범어사 주지를 지냈지만 수좌로서의 면면을 잃지 않았던 스님. 당대 수행자의 사표로 추앙 받았던 그 지효 스님이 홍선 스님 은사다.
제주도가 고향인 홍선 스님은 열세 살(1952년) 때 가출해 육지로 올라 왔지만 두 달 만에 부산에서 형에게 잡혔다. 목포서 살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정혜원 만암 스님을 찾았다. 출가시킬 요량이었다. 만암 스님은 서옹 스님의 제자 지웅 스님이 있는 영암 백련암으로 소년을 보냈다.

‘반야’ 두 글자에 담긴 뜻도 헤아리기 어려웠을 소년이었지만 ‘외우라’는 지웅 스님의 엄명에 반야심경은 물론 신심명까지 외웠다.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은 새벽예불. 고즈넉한 새벽 산사의 품을 느낄 나이가 아니니 새벽예불은 ‘고역’으로 다가왔을 터. ‘배 아프다’는 핑계에 때로는 ‘밥 먹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는 투정도 부렸다. 그 때마다 안아주고 달래주었던 자상한 지웅 스님이다. 하지만 사제 연은 닿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스님이 백련암 경내에 들어섰다. 며칠 있는 동안 거의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낯설지가 않았다. 자신을 말없이 지긋하게 바라보는 그 스님의 눈길이 따뜻하게 느껴져 왔다. 지효 스님! 사제인연은 그렇게 말 없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맺어졌다.

“하얀 서리가 내려앉은 눈썹에 수려한 용모를 지니셨던 스님이셨습니다. 평생 단 한 번도 법상(法床)에 오르지 않으셨지요. ‘깨달음을 이룬 수행자만이 법상에 오를 수 있는 법’이라며 그 어떤 법문 요청도 사양하셨습니다. 평생 당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득도 날을 벼리고 벼리셨던 분입니다.”

제자를 다루는 법도 엄했다. 그렇다고 호통만 치는 스승이 아니었다. 지리산 연곡사에서 지효 스님을 모시며 수행할 때다. 지효 스님은 좌선에 들고, 홍선 스님은 산신각에서 목탁을 쳤다. 어느 날, 잠깐 눈 감고 있다 떴을 뿐인데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눈 감기 전엔 달이 보였는데, 눈 뜨니 해가 보였습니다.” 산신각에서 내려와 은사스님에게 고하려 했는데 은사스님이 먼저 이르셨다.

“목탁소리가 열두 시 전에는 거칠더니, 열두 시를 넘어가며 안정되고 새벽까지 이어지더구나.”

삼매였던 것일까? 그것이 어떤 경지였든 스승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희한한 일이 펼쳐졌다. 잠시 앉아 있는데 저 멀리 속가 어머님이 짐꾼과 함께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올라오시는 게 보이지 않는가! ‘마중 나가자!’ 연곡사에서 첫 가게까지 10리. 산길을 타고 내려가 가게 앞 의자에 앉았다. 산을 오르던 어머님이 ‘어찌 알고 나와 있느냐?’며 화들짝 놀란다. 홍선 스님이 태연하게 한마디 던졌다.

“아들이 삼천리를 내다봅니다.”

그 어머님이 지효 스님에게 그 일을 전했을 건 당연지사. 여느 은사스님 같았으면 벌써 불호령이 떨어지고도 남을 일이다.

“며칠 동안 아무 말 없던 지효 스님이 어느 날 이르시더군요. ‘재미있는 현상에 현혹되지 마라. 신통 부리라고 수행 하는 거 아니다!’ 음성의 톤은 낮았지만 음색은 무겁고 또 무거웠습니다. 또 한 번 으스대면 사제인연을 끊겠다는 강렬한 메시지가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간과할 수 없는 건 희한하게도 그 뒤로는 수행 중 일어나는 현상에 끄달리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지효 스님으로부터 처음 받은 화두는 ‘똥 막대기’다. 문제가 생겼다. ‘간시궐’ 화두만 들면 ‘냄새’가 났던 것. 심지어 구역질까지 났다. 이 상태로는 좌선은커녕 한 끼 공양도 어려웠다. 결국 화두를 바꿔 달라 사정했다. 제자의 고통을 들은 은사스님은 자비심을 내어 다시 내려주었다. ‘뜰 앞 잣나무’라 알려진 조주의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이 화두를 받고도 백(柏)자 알음알이에 뜰 앞에 있는 나무가 잣나무인지, 측백나무인지를 따져 물었던 홍선 스님이다. 그런 제자에게 “잣나무냐, 측백나무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정진을 당부했던 은사스님이다.

마산대학 종교학과를 졸업한 홍선 스님은 일본 임제종 계열의 선불교 재단이 운영하는 하나조노대학(화원대학·花園大學) 3학년으로 편입학했다. 이때부터 하루 세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며 모자란 잠은 주말에 보충했다. 정말 ‘무섭게 공부했다’고 한다.

“무식한 중이라는 소리를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0대 후반 때, 동산 스님 심부름으로 구하 스님을 뵈러 통도사를 처음 가 보았다. 대웅전 참배를 하려 하니 부처님이 안 계시지 않은가? 옆에 있던 불자도 의아했는지 묻는다.

“왜 부처님이 안 계셔요?”

설명할 재간이 없었다. 젊은 불자의 비아냥 한마디.

“그것도 몰라요 스님이? 무식하네.”

얼굴이 화끈거렸다. 석굴암 전실 유무 논쟁이 한창일 때다. 당시 대통령 비서관을 비롯한 문화재 전문가들과 스님들이 경주에 모였다. 이 때 젊은 홍선 스님이 모 교수에게 한마디 했다.

“전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 본 게 아니라 그저 승가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전문가도 아닐뿐더러 새파란 스님이 ‘전실 필요 없다’하니 모 교수도 답답했을 터.

“무식한 중하고 얘기를 못 하겠네!”

그 한마디는 비수가 되어 홍선 스님의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일본 유학 10년 각고의 정진은 그래서 시작됐다.

▲ 휴휴정사 앞 소나무는 홍선 스님 도반이다.

홍선 스님의 일본 경도 불교대학 석사 졸업논문은 ‘금강경 영험전 연구’. 지금이야 ‘금강경’ 수지독송 영험에 대한 이야기가 세간에 책이나 인터넷상에 곧잘 등장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관련 자료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중국의 설화를 비롯한 문학작품은 물론 지역 신문이나 잡지까지 뒤져가며 자료를 모아 나름대로의 체계를 잡았으니 가히 획기적이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을 비교해 가며 ‘금강경’을 연구했던 스님이었지만 금강경과 관련된 영험을 학술 차원에서 연구하겠다는 건 의외다.

“금강경의 공 이치를 꿰뚫고, 가행정진하며 깨달음에 이르는 게 공부지요. 하지만 금강경의 ‘금’자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금강경에 접근시키게 할 것인가도 중요한 일입니다.”

각자의 개성이나 취향에 따라 경전에 이르는 길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자는 뜻이리라. 근기에 맞는 방편을 쓰자는 것이다.

“영험담을 단순히 꾸민 이야기라 생각하는 건 맞지 않습니다. 일념으로 정진한 사람들 앞에 불가사의 한 영험이 나타났던 일은 고금은 물론 지금도 비일비재하지 않습니까? 혹세무민이 아닙니다. 애써 외면할 이유가 없습니다.”

스님 뒤편에 걸린 족자가 눈에 띈다.
自性方知元淸淨 (자성방지원청정),
塵塵刹刹法王身 (진진찰찰법왕신).

나옹 스님의 시. ‘자성이 원래 청정함을 비로소 알면, 티끌 덩어리 모든 것 그대로가 법왕신’이라는 뜻이다.

홍선 스님이 하나조노대학을 졸업할 때 지효 스님이 직접 써서 보내준 족자라고 한다. ‘대학까지 졸업했으면 어서 돌아오라’는 뜻이었을까?

“동산 스님과 같은 뜻입니다.”

어린 사미가 범어사 선방에 앉자 누구보다 동산 스님이 ‘애기 수좌 나왔다’며 좋아했다. 저녁 9시 방선 중 큰 방을 왔다갔다 하시던 동산 스님이 대뜸 “네 법명은 오늘부터 홍선(弘禪)이다”며 새 법명을 내렸다. 이전에 받은 법명 ‘창혁’은 그날로 사라졌다.

“동산 큰스님은 저에게 ‘선을 널리 펴라’며 홍선이라 이름 해 주셨습니다. 은사 지효 스님 또한 ‘어서, 깨달음에 이르러 대중교화에 나서라’는 뜻을 담아 이 족자를 보낸 것입니다. 저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의미인데, 아직도 이름값을 못했습니다. 빚으로 남아 있습니다.”

▲ 홍선 스님은 최근 위빠사나와 선의 관계성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족자는 홍선 스님이 걸어야 할 길의 지남이었던 것이다. 지효 스님의 당부, 동산 스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큰 방에 은사스님의 진영을 걸고 매일 차를 올리는 홍선 스님의 마음 한 자락이 찐하게 다가온다. 지효 스님이 자신의 수행을 매일 벼렸던 것처럼, 홍선 스님도 자신을 매 순간 채찍질 하고 있는 것이다. 60여년의 출가생활을 하고도 말이다.

“승가든 재가든 진실한 마음으로 수행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과 타인을 보살펴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내어 보이는 마음 한 자락이 정토를 일구는 원동력입니다. 명예나 권력을 바라보며 이 공부하고 있다면 당장 그만두셔야 합니다. 확실한 건, 가진 것 다 버리면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홍선 스님은 ‘자비심으로 인욕한다’는 뜻을 잘 헤아려 주기를 당부했다. 무조건 참는 게 아니다. 진정한 인욕은 자비심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한번쯤 깊이 사유할 만하다.

홍선 스님은 지효, 동산 스님의 뜻을 잊지 않고 있기에 ‘할 일’ 있는 스님이다. 교수사, 강의, 예불도 매 순간 잘 살펴서 해야 하기에 또 ‘할 일’ 있는 스님이다. 하지만 매사 진실하기에 그 무엇에도 얽매일 일은 없다. 그래서 ‘쉬고 또 쉬는 스님’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37호 / 2014년 3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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