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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무우사 주지 일화 스님

생명향한 진실한 마음 세상 가득 퍼지면 화엄정토 보게 될 터

▲ 일화 스님

경기도 화성 태봉산 자락에 자리한 무우사(無優寺)를 오르는 산길은 의외로 깊었다. 도심 한 복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작은 산이지만 우거진 숲이 전하는 고즈넉함은 여느 산사와 비견해도 손색이 없다. 그 산길을 오르며 뜬금없이 주제 사라마구의 소설 ‘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원제. All The Names)’가 떠오른 건 ‘무우사’라는 특이한 사찰명 때문이리라. ‘세상 만물 각각에 이름을 부여한 건 인간이다. 제대로 지어놓기나 한 것일까? 혹 그 이름으로 인해 그 존재 의미가 퇴색되지는 않았나?’하는 의문과 동시에 ‘이름이 있기에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라는 단언을 동시에 일으키게 한 책이다. 자연스럽게 ‘무우사’라 이름 한 연유가 궁금해졌다. 경내에 이르니 일주문을 대신하는 표지석에 무우사의 또 다른 이름이 한글로 써 있다.

‘근심 없는 동산’

세상을 향한 일화 스님의 바람이 이 돌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출가발심
대학 졸업 후 실행에 옮겨

월주스님 은사로 삭발염의
환경운동·국제구호 등 동참

가난한 국가에 희망 심는 일
생명 관점서 꼭 해야 할 불사

부처님 법 실천으로 옮기면
당당하고 행복한 삶 누릴 것

▲ 무우사는 ‘근심 없는 동산’을 의미한다.

1978년 어느 날, 일화 스님은 동국대 이종익 박사와 함께 개운사로 향했다. 내심 은사로 정한 월주 스님에게 출가 의사를 고하기 위해서였다.

“스님, 출가하려합니다.”
“생각해 보자!”

월주 스님이 거사의 출가를 거부했을 리는 만무하다. 강남북 총무원 양분체제로 교계가 어수선하니 좀 시일을 기다려보라는 뜻이었을 터. 하지만 거사에게는 ‘거부’로 들렸다.

“스님, 장난으로 출가하지 않습니다!”

당돌한 한마디에 월주 스님이 다시 쳐다보았다. 이종익 박사가 거들고 나섰다.

“스님, 이미 학교에 사표까지 제출했다 합니다.”

전남 보성의 유지 아들로 태어난 일화 스님은 형제들과 함께 광주서 중학교를 다녔다. 2학년 가을, ‘출가해 스님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고 집을 나와 홀로 화순 쌍봉사로 향했다.

‘이제 저 문만 열고 들어가면 된다!’

하지만 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대략 네 시간이 흘렀다. 이제 곧 어두워지니 더 이상 지체할 수도 없어 문을 열었다. 아뿔싸! 한 노파가 양은그릇에 밥을 말아 먹으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지 않은가. 동경해 온 산사풍경과 너무도 다른 이미지에 충격을 받았던 것일까? 왠지 이상했다. ‘아직 아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실존철학을 중심으로 한 서양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삶의 의미에 천착해 보고자 하는 친구 두 명이 생겼다. 셋은 모이기만 하면 세상의 고민은 다 끌어안아 해결해 보겠다는 양 칸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사르트르에 열을 올렸다. 가출 않고 고교 3년을 무사히 보낸 건 아마도 두 친구 덕이었을 터.

대학에 들어간 첫 해 원력을 세웠다.‘대학에 들어 온 이상 졸업은 하자. 군 생활도 마치고 사회경험까지 어느 정도 한 후 출가하자!’ 교단에 섰던 거사는 때가 되었다 생각하고 이종익 박사를 찾아가 출가의사를 전했다. 이 박사는 경봉, 구산, 광덕, 월주 스님 네 분을 추천해 주었다. 대불련 활동하며 한 번 이상 친견해 본 스님들이었으니 낯설지 않았지만 월주 스님에게 끌렸다. 아마도 월주 스님의 대내외 활동이 젊은 거사에겐 역동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월주 스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래 금산사에서 머리깎자!”

사제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스님과 마주 앉아 있는 마루에도 초봄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쳐갔다. 고교시절 ‘철학담론’을 펼쳤던 세 사람 중 한 명은 스님이 되었는데 다른 두 분은 어느 길을 택했는지 궁금했다.

“한 명은 판사, 한 명은 신부의 길을 걸어요.”

“어느 철학자가 마음에 들었냐” 여쭈어 보니 “처음엔 라이프니츠가 참 좋았다”고 한다. 물론 그의 철학을 이해서가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철학교수였던 아버지와 사별한 때가 여섯 살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끊임없이 독서하며 홀로 공부했지요. 15세 때 라이프치히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고도 케플러,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을 혼자 공부해 결국 수학과 철학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습니다. 그의 천재성도 대단하지만 어려서부터 삶의 본질에 의문을 품고 책을 파고들며 사색의 폭을 스스로 넓힌 그의 의지가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참 멋지다 생각했지요.”

“혹여 중학교 때 출가를 결심한 자신의 이색경험과 라이프니츠의 기행에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끌린 것 아니냐?” 묻자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박장대소 한다. 그러고 보면 고교시절의 사유를 ‘깡통철학’이라 치부할 게 아니다. 누군가는 그 때의 한 생각으로 철학의 길을 걷는가 하면 누군가는 신부가, 누군가는 스님이 되지 않는가.

일화 스님은 2004년부터 2009년까지 지구촌공생회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몽골, 케냐에 우물을 파주고, 학교를 지어 아이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심어주는 지구촌공생회는 NGO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지금은 수그러들었지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도 어려운 사람 많은데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돕느냐?”는 핀잔에 “쓸데없는 외화 낭비”라 비난하던 사람도 적지 않았던 때다. 스님은 그 때마다 여러 말 않고 딱 두 마디만 했다 한다.

“깨끗한 물 한 방울 없어 20초마다 어린 아이 한 명이 죽어간다. 900만원으로 교실 세 칸짜리 초등학교 하나 지으니 800명 아이가 20리를 걷지 않더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했다. 뿐만 아니라 “그 정도인줄 몰랐다”며 그 자리서 후원을 약속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람 있는 일’이 아니라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스님은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에 둘러싸인, 살려고 하는 생명’이라 말한 슈바이처의 일언을 전했다.

“저는 부처님법과 다를 바 없는 슈바이처의 이 말을 참 좋아해요. ‘여름밤 램프 밑에서 일할 때,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마시겠다.’ 나무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 뜯지 않았다 해요. 들에 핀 이름 없는 꽃도 꺾지 않았던 슈바이처였으니 벌레도 밟지 않으려 조심 했겠지요. 방에 들어 온 날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않고 불자로 조심스럽게 내보내는 불가와 너무도 흡사한 일상을 그는 보여주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하는 사람이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볼 줄 알고,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즉, 생명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은 물론 향후 그에게 펼쳐질 인생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본 스피노자의 삶 또한 스님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전했다.

“스피노자 친구 중 한 명이 자신의 유서에 큰 돈을 스피노자에게 주라고 써놓았는데, 스피노자는 한사코 받기를 거부했다고 해요. 왜 그랬을까요? 그가 직접 말한 바가 있지요.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고 해도 영원히 행복하게 해주지 못 한다. 나는 철학자의 길을 가겠다.’ 어떤 길을 택하는가는 자신의 몫입니다.”

스피노자가 남긴 유품은 렌즈갈이 도구와 책상, 펜뿐이었다.

“우리 관점에서 보면 무소유를 실천한 철학자인 겁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품고 어디를 향하느냐에 따라 가난하지만 당당할 수 있고, 부유하지만 비겁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법을 알아 실천에 옮기면 비록 가난하다 해도 당당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살아가라는 당부다. 스님은 ‘수처작주’ 의미를 한번쯤 꿰뚫어 보았다면 자신뿐 아니라 옆 사람도 진실한 마음으로 바라보라 한다. ‘가슴 한 곳에서 미묘하게 일어나는 마음 하나가 있을 것’이라며 그 마음이 온 세상에 퍼지면 이 세상이 화엄정토라 강조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자비심’이 아닐런지.

혹, 평소 좋아하는 선시 하나 부탁드리니 손사래를 치며 “새벽에 예불 올리고 도량 길 닦는 게 내 일”이라고만 한다. 그러고 보니 대웅전과 약사전, 산신각과 범종각은 있지만 도량정비가 아직도 멀었다. 보는 이에 따라 자연과 경내가 둘이 아니라 볼 수 있겠지만 아직 담도 쳐 있지 않다. 1990년 초 시작한 무우사 도량불사는 언제쯤 회향할까? 신심 돈독하기로 유명했던 속가 부친이 보시한 터가 아니던가.

“저 나름대로 매일 길 닦고 나무 심어가며 일합니다. 그런데 1년에 한 두번 오는 도반들이 그래요. ‘무우사는 변한 게 없어요? 1년 전이나 3년 전이나….’ 허허허…. 불사회향 마감일이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인연 닿는 대로 하면 되지요.”

그렇다. 언제 회향할 것이라니? 쓸데없는 근심일 뿐이다.

▲ 무우사 대웅전 전경. 무우사 건립 불사는 1993년 시작됐지만 아직도 진행 중이다.

“선시는 내보일 게 없어요. 내려가다 저 샘에서 솟는 물 한 잔 하고 가요. 다음엔 무우사에 뜬 달 보러 한 번 와요.”

관음보살님이 계시는 샘터로 향하는 길에 일화 스님의 순박하고도 천진난만한 미소가 스쳐가며 불현듯 화엄학에 정통해 ‘위부노화엄’으로 불렸던 중국 회동 선사의 시 한수가 떠올랐다.

‘불법은 일상생활 속에 있으니(불법재일용처·佛法在日用處) /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데 있고(행주좌와처·行住坐臥處) / 차 마시고 밥 먹는 데 있으며(끽차끽반처·喫茶喫飯處) / 말을 서로 주고받는 데 있고(어언상문처·語言相問處)/ 짓고 움직이는 데 있다(소작소위처·所作所爲處).’

스님이 일러 준 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시는데 ‘감로찬’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표주박을 내려 놓고 유심 보았더니 서산 스님의 시 한수 아닌가.

‘이 산에 솟은 감로 다기물로 받아 놓고 / 스님 대여섯 명 도담으로 지내는데 / 먼 사람들이 소식 듣고 표주박 들고 와 / 저마다 달 덩어리 하나 떠 마시고 가는구나.’

‘근심 없는 동산’의 샘물 맛은 일품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일화 스님

1978년 김제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통도사강원을 졸업한 후 불국사, 공림사 등에서 안거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총무원 사회부장, 중앙종회의원, 지구촌공생회 사무처장, 전주 스포피아 관장, 쌍문노인복지관장 등을 역임했다. 1993년 화성에 무우사를 창건하고 현재 화성환경연합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239호 / 2014년 4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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