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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견부주(二見不住)

기자명 혜국 스님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시비 일으키면 본마음 잃어”

▲ 당나라때 40여년 동안 선풍을 진작시킨 조주 대선사의 사리탑.

“이견부주(二見不住)하야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

두 가지 견해(見解)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두 견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란 마치 장벽이 없는 허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하셨거든요. 확연하여 성스러움이니 성스럽지 못함이니 하는 경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의 낙처(落處)는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벌써 한 생각 일으켜서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확연한 그 마음을 스스로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참마음 따로 있고 번뇌 망상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마음, 그 마음의 고요를 바로보지 못하고 뭔가 구하는 마음,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 망상인 까닭에 그 구하는 마음만 몰록 쉬어 버리고 욕망을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 본마음의 고요란 따로 상(相)이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 즉 모양도 빛깔도 없는 그야말로 우리 목전(目前)에 보고 듣는 그 자리거든요. 보고 듣는 자리라고 하면 보는 자리 듣는 세계가 따로 있는 걸로 압니다. 전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부득이 글로 표현하려면 이런 허물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옛 스승들은 아주 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망(妄)에도 머물지 않고 진(眞)에도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 곳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런 때에 크게 용(用)을 일으키면 이 모두가 진(眞) 아님이 없으니 이를 내놓고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 한다면 이렇게 보는 자는 모두가 알음알이에 속는 일이다.”

이 은혜 어찌 작은 일이겠습니까? 본다거나 듣는다거나 보지 않는다거나 듣지 않는다거나 다 같은 자리입니다. 말하는 이와 말 듣는 이가 둘이 아닌 자리이거든요. 어쨌든 간에 그 자리는 두 견해가 있을 까닭이 없으니 머물래야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 없으면 둘이라는
세계는 있을 수 없어
내가 있을 때 너라는
상대 존재할 수 있어
내가 없는 상황에서
너라는 존재도 없어

대개 세상 사람들은
내가 없어도 너라는
상대 있는 걸로 착각

내 마음이 불행하면
모든것 불행하게 보여
내 마음이 행복하면
모든것 행복하게 보여
그러하기에 우리는
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해선 안돼

저에게는 무지개 잡으려고 쫓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라고 기억되는데, 뒷산에 오색무지개가 너무 곱게 떴기에 만져보려고 쫓아갔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걸로 보고 부지런히 쫓아갔는데 아무리 뛰어가도 그만큼 떨어져 있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무지개를 잡을 수가 있는 겁니까? 무지개는 결코 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삼조 스님께서 신심명에서 하시는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이 참으로 귀한 가르침입니다.

“재유시비(纔有是非)하면 분연실심(紛然失心)이니라.”

잠깐이라도 시비를 일으키면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으리라는 의미입니다. 잠깐과 영원은 같은 말입니다. 잠깐이든 아니든 한 생각 일어나면 이미 한 세계가 창조된 겁니다. 한 생각 밉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온몸 전체, 팔만사천 세포가 미운세계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한생각의 위력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생각 억울했던 생각을 하면 바로 얼굴이 붉어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껴보셨을 겁니다. 반대로 한 생각 행복했던 기억을 일으키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누가 내 몸을 움직이거나 만진 일도 없이 오직 한 생각이 우리에게 미소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얼굴이 화끈거리게 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생각이 우리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죠. 나아가서 한 생각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한 생각이 곧 생사(生死)라는 말입니다.

번뇌, 망상 즉 생각은 생멸(生滅)이 있기 때문에 멸(滅)함이 있고 생(生)함이 있을 수 있지만 본래 청정한 마음은 상대가 아니라 조건이나 원인이 없기 때문에 생(生)이니 멸(滅)이니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생사(生死) 또한 마찬가지가 되죠. 눈앞에 보이는 모든 현상계가 쉼 없이 변해나가는 무상(無相)한 세계라면 그것이 생긴 원인, 그 원인 역시 무상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생멸의 세계에서 벗어난 본래 청정은 생한바가 없기 때문에 멸하는 일도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이유일유(二由一有)니 일역막수(一亦莫守)라”, 둘은 하나로 말미암아 있음이니 하나마저도 지키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하나가 없으면 둘이라는 세계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있을 때 너라는 상대가 있지 내가 없는데 너라는 존재가 있을 수가 없지요. 세상 사람들은 내가 없어도 너라는 상대가 있는 걸로 착각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입니다.

여기에 나뭇단을 서로 기대어 세워 놨을 때 두 나뭇단이 기대어 있을 때는 서 있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 어느 쪽이든지 한쪽을 치워버리면 서로 맞대고 서있던 나뭇단도 둘 다 쓰러지게 됩니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음으로 해서 이것도 없다는 인연법은 그래서 진리인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모든 시비는 실상(實相)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속고 있다는 거죠.
 
그러니 “어지러이 본마음을 잃느니”라고 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가 곧 둘이요, 둘이 하나인 까닭에 하나마저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옳은 게 없어지면 그른 것도 자연히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그른 것만 없애고 옳은 것으로만 채우려니 그게 어려울 수밖에요. 우주존재 원리가 그게 아니거든요. 낮과 밤이 반반인 게 존재원리인데 낮으로만 채우겠다는 생각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사에 그런 유혹에 빠지고 있는 게 사실이거든요.

“일심불생(一心不生)하면 만법무구(萬法無咎)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으면 만법의 허물이 없느니라. 한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말은 대단히 어려운 말입니다. 삼조 스님께서는 한마음이 나지 않는 도리를 확연히 깨달으셨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만 한마음이 나지 않는 무념(無念)을 위해서 정말 애써본 사람은 그 말씀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일체의 생각이 끊어진, 생각일어나기 이전을 깨달은 자리, 바로 그 자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아예 생각이 없는 자리라고 이해를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나 그런 목석같은 자리는 결코 아닙니다. 생각 속에서 생각에 끄달리지 않기에 보면 볼뿐, 들으면 들을 뿐, 그것 뿐입니다. 슬플 때도 그대로, 기쁠 때도 그대로, 방황할 때도 그대로, 살아서도 그대로, 죽어서도 그대로 사뭇 이것 뿐입니다. 그러니 한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허물될 일이 있을 까닭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근본인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 한 생각 일어난 그림자인 허물만 다스리려니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 되는 겁니다.
“무구무법(無咎無法)이요 불생불심(不生不心)이라.”

허물이 없으면 법도 없고 나지 않으면 마음이랄 것도 없음이라, 허물이 없다는 것은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한 생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얘기는 화두일념(話頭一念) 즉 무념위종(無念爲宗)이 된 겁니다.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나 아닌 존재가 없다는 얘기죠. 모든 상대가 끊어진 겁니다. 내가 따로 존재할 때 나니, 너니, 옳으니, 그르니 하는 법이 생겨나는데 내가 없어졌으니 그런 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라는 세계도 또한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부처니, 예수니, 극락이니, 천당이니 그러한 모든 명사는 인간이 이름을 만들어 붙였지 본래 있었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게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세상이니 저 세상이니 생각 아닌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생각에서 이뤄진 그림자이니까요. 그래서 화엄(華嚴)에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묘한 화가와 같아서 온갖 오온(五蘊)을 그려 내누나. 일체의 세계 어느 법이든 이렇게 만들어지지 않은 게 없다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부처라는 얘기는 내가 그냥 도(道) 속에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바로 지금 여기 그 도(道)에 어긋나지만 말라, 그것을 화두일념(話頭一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팔십 평생을 바로 도(道)에 어긋나지 말라, 즉 마음 수행하는 일 그 일을 최우선으로 가르쳤습니다. 일대사 인연을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감정이 일어나는 근본원리 즉 마음 깨닫는 법을 위해서 한평생 사신 겁니다. 나고 죽고, 죽고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이 생각 일어났다 멸하는 것이라면 그 생각 일어나는 자리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결코 영원한 행복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행하고 화가 나면 모든 것은 불행하게 보이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보이지만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어났다 멸하는 하나의 꿈속일이지 결코 실상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법(法)에 의지할지언정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마음의 근본이요, 사람에 의지한다는 것은 이해를 따라다니는 즉 그림자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부처님 한평생 가르침을 보면 오직 우리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지 당신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누구를 위한 것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해태심에 속지 말고 죽으나 사나 부지런히 정진할 밖에요.
 

[1241호 / 2014년 4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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