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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바그다드 카페’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

기자명 정장진

자비로운 푸근함, 부처님 향기 전하는 보살의 존재이유

▲ 바그다드 카페 여주인 브렌다는 엉망진창인 인생에 낙담하지만, 우연히 카페에 다다른 뚱뚱한 재스민을 만나 웃음을 되찾는다.

영화 ‘바그다드 카페(Bagdad Cafe, 1987)’는 헤어지고 만나는 인생사에 대한 한 편의 우화다. 이렇게 보면 전형적인 미국 영화이면서도 얼마든지 불교적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서구인 자신들도 모르게 영화에 불교가 들어가 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이 영화의 매력은 이렇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얼마든지 감상이 가능한 영화 자체의 푸근함에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심지어 전혀 예상치도 못했건만 불교적 관점까지 허락하는 영화 자체의 이 푸근함은 어딘지 뚱뚱한 여자 주인공 재스민(독일 여인이니 야스민으로도 불린다)과 무척 닮아있다.

길에 오가는 인연들 인생사
필름에 담은 우화같은 영화

황량한 고속도로변에 자리한
‘길 위의 집’ 카페가 주 무대
뚱뚱한 주인공의 푸근함으로
카페에 드리운 그늘 걷어내

미국 서부 애리조나 주의 황량한 고속도로 변의 허름한 주유소 겸 카페 겸 모텔, 열심히 일하고 작은 경영 수완만 있다면 일가족이 먹고 사는 데 큰 지장이 없는 곳이다. 하지만 사정은 정 반대다. 브렌다의 가족들은 모두 게으르고 지쳐있으며, 카페도 거의 방치된 폐허나 다름없다. 카페만 그런 게 아니다. 젊디젊은 아들놈은 어디서 낳았는지 돌도 안 지난 아들을 키워야 하고 그런데도 일은커녕 맨날 피아노만 두들겨 댄다. 허파에 잔뜩 바람이 들어간 막내딸은 허구한 날 밖으로만 돈다. 남편은 정신을 놓고 사는 인간인지라 무능한 것은 둘째 치고 간단한 일마저도 처리를 못한다. 여주인인 브렌다만 죽어난다. 삶에 지친 그녀는 하늘로 치솟은 그녀의 머리칼처럼 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무능한 남편을 쫓아 낸 그날 브렌다는 그 큰 두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 그 때다. 멀리서 다가오는 뚱뚱한 재스민이 눈에 들어온다. 미국을 여행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남편과 대판 싸우고 헤어진 재스민은 눈물인지 땀인지 범벅이 된 얼굴로 브렌다 앞에 선다. 영화는 이 두 여인의 만남을 축으로, 서로 피 한 방울 안 섞인 오다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정토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재스민과 브렌다 가족은 남남이다. 같은 미국인도 아니다. 재스민은 독일 여자고 브렌다는 까칠한 미국 흑인여인이다. 지역 경찰은 인디언이다. 바그다드 카페 한쪽 마당에 캠핑카를 세워두고 지내는 콕스는 백인 화가인데 할리우드에서 영화 세트를 그리던 화가라고 보기도 뭐한 간판쟁이다. 카페 종업원은 멕시코 출신이다. 여기에 길 가던 젊은 배낭족이 더해지는데 부메랑이라는 야릇한 놀이기구를 갖고 바그다드 카페에 들어온다.

거의 모든 인종이 모인 곳이 바그다드 카페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카페에 커피 기계가 없다는 것이다. 카페에 커피 기계가 없는 이 기이한 현상은 재스민의 잃어버린 로젠하임 커피 보온병을 브렌다의 남편이 주워 갖고 들어옴으로써 해결된다.

재스민은 자신도 외로웠지만, 몸만 한 지붕 밑에 있지 마음은 결코 한 가족이 아닌 브렌다의 가족을 한 사람씩 접근해 간다. 젖먹이 아이를 안아주고, 코에 바람이 들어간 막내딸과 놀아주고, 피아노만 치는 아들의 음악도 들어준다. 그리고 청소도 한다. 그 뚱뚱한 몸을 움직이며 서서히 가족들과 어울리는 재스민은 어느 날 할리우드에서 일했다는 사이비 화가 콕스의 모델도 되어준다. 하지만 브렌다는 이런 재스민의 행동을 의심한다. 재스민의 방에서 남자 옷이 발견되고, 손님인데 일을 하려고 하니 의심이 갈 수 밖에 없다. 모든 오해가 풀리자 재스민은 여행 중에 산 마술 도구를 풀어 외로울 때 심심풀이로 해본 마술 솜씨를 발휘해 브렌다 가족은 물론, 손님들마저 웃게 만들면서 서서히 카페 매상을 올려준다.

▲ 황량한 인생처럼 굳어있던 브렌다의 얼굴도 푸근한 재스민을 만나 환하게 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점점 대담해져 가는 가짜 화가 콕스의 청도 들어준다. 웃옷을 벗고 화가 앞에 서더니 어느 새 가슴도 열어 보이고 그러던 어느 날 홀딱 벗고 누워 서구 미술사의 중요한 누드 장르인 "누워있는 누드"의 포즈를 취해준다. 사실 재스민은 누워있는 누드 포즈를 취하기 전에 이미 화가에게 모든 것을 허락한 상태였다. 얇게 한 쪽을 오려낸 붉은 속살을 지닌 자몽을 한 손에 든 재스민이 화가 앞에서 포즈를 취했을 때 이 이미지의 에로틱한 숨은 뜻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불교적이란 말인가? 이 야릇한 영화에서. 이 질문에 답을 하자면 먼저 바그다드 카페의 위치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그다드 카페는 고속도로 변에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 바그다드 카페는 어느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길 위의 집’인 것이다. 이 공간을 조금 해석해 보자. 인간을 나그네로 보면 길은 인생이 될 것이다. 20세기 말에 제작된 영화이니 그 길이 고속도로일 뿐, 이 영화에서도 고속도로는 인생 전체를 의미하는 수사법을 통해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할 때의 길일 수 있는 것이다.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우연히 만난 것이다. 길 위의 집인 바그다드 카페에서.

하지만 우리는 영화를 이렇게 쉽게만 볼 수는 없다. 길 위의 집이지만 바그다드 카페는 푸근하기만 한 집이다. 처음에는 안 그랬다. 그러나 재스민이라는 뚱뚱한 여인이 들어오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카페 전체가 북적대는 기적이 일어난다. 재스민은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 뚱뚱한 여인이 아니라 푸근한 여인인 것이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대형 트럭들, 멀리서 보면, 특히 밤에 보면 어디를 저토록 빨리 달려가는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하는 괴물 같은 거대한 트럭들도 이 푸근한 여인은 모두 받아준다. 트럭 운전사들은 재스민의 푸근한 음성을 듣는다. “와서 잠시 쉬어 가세요.” 그러자 트럭을 모는 운전기사들 사이에서는 바그다드 카페가 라스베이거스보다 더 재미있는 곳으로 알려진다.

재스민의 이 매력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이 알고 있던 남자는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리던 늙은 화가 콕스다. 화가 앞에서 가슴을 드러내던 재스민이 묻는다. “하늘을 그린 그 그림은 뭐죠?” 방에 걸려 있던 그림에 대한 질문이었다. 재스민의 풍만한 가슴을 보면서 화가가 답한다. “태양 에너지 센터가 만든 수천 개의 거울에 반사되는 햇빛이에요.” 마침내 8번째 그림에 와서 재스민은 완전히 옷을 벗는다. 그리고 자신의 등에 화가 콕의 서명을 새겨 넣는다.

재스민은 직업적인 마술가가 아니었다. 또 그녀는 직업 모델도 아니었다. 재스민, 그녀는 재스민 향기를 내뿜는 사막에 핀 꽃이었다. 영화에서 유독 재스민이 꽃 마술을 많이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의미는 비유적인 의미로도 단지 꽃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상이다. 그녀는 햇빛을 반사하는 “태양 에너지 센터가 만든 수천 개의 거울”이었던 것이다. 이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숨어 있어서도 그렇지만, 재스민이 모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빛 혹은 원초적 따스함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녀는 태양 그 자체는 아니었지만, 거울처럼 햇빛을 반사하는 존재였다.

정토교 신앙의 주존인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 혹은 무량수여래상(無量壽如來像)은 대부분 금동으로 제작된다. 여기서 이 휘황한 황금은 무한한 빛인 무량광(無量光)을 뜻한다. 그러나 이 빛은 석가세존의 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잘 보자. 재스민이 하나씩 옷을 벗어가면서 부처님 닮은 풍만하고 부드러운 몸을 드러내는 일련의 장면들을. 재스민의 몸에서는 이름처럼 향기가 나고 마침내 빛을 발한다. 이 빛을 재스민은 ‘환영’이라고 부른다.

바그다드 카페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지만, 재스민은 불법 노동을 하기도 했고 또 관광 비자기간이 종료되어 쫓겨난다. 그러나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들이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햇빛 없이는 아무도 못 산다. 햇빛을 비춰주는 거울 없이는 빛을 볼 수도 없다. 사람들은 그리워했다. 마치 우리가 불상을 보면서 우상이라고 매도하지 않고 몸을 숙이고 합장을 하고 예를 갖추듯이.

고속도로 변의 바그다드 카페는 길 위의 집이고 모든 나그네의 쉼터이다. 우리는 굉음을 내며 달리는 트럭들이 어디로 가는 행렬인지 잘 안다. 물류센터나 차고지로 가겠지. 그러나 영화 속에서 트럭들은 스쳐 지나갈 뿐, 목적지가 없다. 우리처럼. 그 길의 시작이 어딘지 궁극적 끝은 또 어딘지 우리는 모른다. 그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재스민이 필요한 것이다. 그녀의 향기가 필요하고, 햇빛을 반사해 주는 거울 같은 그녀가 우리 곁에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풍만하고 둥근 육체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환한 얼굴과 향기로운 육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콕스가 8번째 그린 재스민의 그림을 보면 그녀의 머리 뒤로 광배가 있다. 정말 모를 일이다. 가짜 화가 콕의 서툰 솜씨 때문에 광배가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어서 감히 불화나 성화에나 집어넣는 광배를 그려 넣은 것인지. 영화 속에서 답을 찾자면 물론 이 재스민의 초상화에 나타난 광배는 세트 그림이나 그리다 은퇴한 아마추어 화가 콕의 서툰 솜씨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실제로 그가 재스민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로 서툴고 어눌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다. 특히 누워있는 누드를 보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래서일까, 아무도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일련의 삽화를 구성하는 이 8편의 재스민의 누드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러니 불화나 불상과 연결시킬 수도 없었다(사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뚱뚱한 그림들은 콜롬비아 화가 보테로의 그림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재스민을 그린 그림과 불상을 함께 보는 우리의 영화 해석을 나무라지 말았으면 좋겠다. 영화는 20세기 예술이며 불교는 수천 년 역사의 길고 긴 전통의 축적물이다. 또 하나는 대중 예술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 아닌가. 이 두 영역의 역사와 장르 사이에 존재하는 극복할 길 없는 간극은 대담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 영화는 이제 서서히 대중 종교가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오히려 쇠퇴해 가는 것은 종교 쪽이다. 다시 말해 가슴을 드러낸 재스민의 풍만한 육체에서 아미타여래의 황금빛을 볼 수 있지만, 그 반대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깊이 해석되어야 한다. 하나의 풀어야 할 화두처럼. 그리고 영화 속에서 佛을 만나자면.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45호 / 2014년 5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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