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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우같은 의심

기자명 혜국 스님

“일체중생 완벽한 부처인데도 항상 의심하는 망상에 빠져”

▲ 조주 스님의 향훈이 남아있는 백림선사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중국인들.

“대도(大道)는 체관(體寬)하야 무이무난(無易無難)이어늘, 큰 도(道)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이 말씀은 대도(大道) 즉 큰 도(道)는 본체가 너무나 넓고 넓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넓고 넓다고 하니 넓은 공간이 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없다는 말이요, 공(空)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온 얘기입니다만 대도는 우리들 각자 내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 바로 내 모습이니까요. 그러나 육신(肉身)의 눈인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아닙니다. 모양 있는 육안(肉眼)으로는 모양 있는 세계밖에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모든 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세계이니만큼 마음 따라 변하니까요.

부처를 새로이 찾고자 한다면
계속 구하는 마음 따르게 되니
욕망이 되어 더욱 더디게 돼
번뇌·망상 버리면 바로 ‘大道’

세월호 참사 참으로 안타까워
GNP 2만달러 넘는 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 참담할 뿐
배려와 양보하는 마음과 문화
돈 버느라 빼앗긴 것은 아닌지

경제력만 크고 정신문화 후퇴
우리 모두 부처라 확신했다면
이와같은 참사 결코 없었을것

사실 우리가 쓰는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정말 얼마 안 됩니다. 총알을 맞고 사람이 죽는데 총알이 눈에 보인다면 총알 맞아 죽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분명히 총알이 날아오고 있는데도 총알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총알을 맞습니다. 또 온 들판에 피는 들꽃이 분명히 피어나고 있지만 피어나는 그 속도가 우리 육안(肉眼)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총알은 너무 빠르기 때문에 볼 수가 없고 들꽃이 피는 모습은 너무 느리기 때문에 볼 수가 없듯이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얼마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주법계의 본체에 비하면 우리 육안으로, 눈으로 보는 세계는 마치 축구장만한 운동장 안에서 점하나 보는 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 점하나 정도를 보면서 우리는 모두 다 보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보고 듣는 것에 집착하고 내가 보는 게 옳다고 고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에서는 육안만이 아니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 다섯 가지 눈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불안(佛眼)으로 볼 것 같으면 쉽다, 어렵다는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입니다. 욕망의 눈이 육안(肉眼)이라면 그 욕망이 없어진 상태를 천안(天眼)이라고 합니다. 천안(天眼)에서만 보더라도 모든 생명은, 하나의 하늘이라는 한 지붕 아래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의 대지(大地)라는 한 방에 같이 살고 있습니다. 대지(大地)나 하늘입장에서 보면 하늘을 나는 새도, 뒷산에 사는 노루나 토끼도, 벌이나 나비도 인간과 꼭 같은 생명이요, 한 건물에 사는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대도(大道)는 하늘이 감싸지 못하고 대지(大地)가 싣지 못합니다. 하물며 거기에 잘났다 못났다가 어디 있으며 네 종교, 내 종교가 어디 있겠습니까? 따라서 쉽다 어렵다는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인과 악마가 손잡고 춤을 춘다고 하는 겁니다. 이 다섯 가지 눈도 개별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들 마음이 열린 만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얼마만큼 열려 있느냐, 바로 그 차이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가 곧 불안(佛眼)인데 불안(佛眼)의 세계가 곧 대도(大道)인 겁니다. 그러한 대도(大道)에서 보면 그 본체에는 벽이나 간격이 없기 때문에 쉽다, 어렵다는 이분법(二分法)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대도(大道)는 본체가 넓고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 다음이 “소견호의(小見狐疑)하여 전급전지(轉急轉遲)로다, 좁은 견해로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서둘수록 더욱 더디어 지도다”로, 좁은 견해란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에 자기 자신이 속고 있다는 얘기죠. 생각의 세계라는 것이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마치 내 생각이 나의 전부인 것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생각자체가 고정불변하게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닌데도 말입니다. 변해가는 그림자요, 환영입니다. 그 그림자를 실상으로 잘못 알다보니 좁은 소견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좁은 소견에서는 나와 남이라는 벽이 생기고 벽을 사이에 두고 그 안에 들어가면 내 것이라고 좋아하고 밖에 있는 것은 모두가 남이 되다보니 이번 세월호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째서 GNP(국민총생산) 2만 달러가 넘는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건지 참담할 뿐입니다. GNP 2만 달러를 이루느라고 우리가 마음 닦는 시간도 다 뺏기고 남을 배려하는 시간도 다 뺏기고 양보하는 마음과 정신문화를 위해서 써야할 시간도 오로지 2만 달러를 버는데 다 빼앗긴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국민 일인당 2만 달러를 벌면서 얻은 것도 참 많겠지만 잃은 것이 더 많은 것은 아닌지 깊이 고민해 볼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경제력 2만 달러이면 정신문화지수도 2만 달러가 되도록 노력할 때 경제력 2만 달러가 우리 재산이 될 수 있지 경제력만 2만 달러이고 정신문화는 몇 천 달러밖에 안된다면 그 경제력이 우리 삶에 행복을 안겨주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모든 중생이 다 부처임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 사실이 바로 여우같은 의심입니다. 모든 중생의 본질이 완벽한 부처임을 믿지 못하고 무언가 밖에서 구하는 마음이 있을수록 서두르게 되고 그럴수록 더 더디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부처임을 믿고 하는 수행은 따로 부처를 구하지 않고 번뇌, 망상만 철저히 내려놓아 버리면 바로 대도(大道)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부처를 새로이 찾고자 한다면 계속 구하는 마음을 따르게 되니 구하는 마음이 욕망이 되어 더디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께서는 “한 생각 일어나는 것이 곧 태어남이요, 한 생각 사그라지는 것이 죽음이라, 나고 죽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진대 생각 일어나고 없어짐을 다스릴 줄 알아야 된다”,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나 괴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그 자리나 근본이 꼭 같다는 가르침을 번번이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으로 돌아가서 보면 즐겁고 괴로움이 둘이 아니지만 감정이 일어난 다음 그 그림자를 따르다 보면 즐거운 생각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괴로운 생각에는 괴로움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겁다, 괴롭다 나누어지기 이전 근본 자리를 바로 보라는 얘기입니다. 생각을 따르는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생각을 일으키는 근본을 바로 깨달아야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보입니다. 여우와 같은 그런 의심의 세계, 자기 스스로 자기를 믿지 못하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집지실도(執之失度)라 필입사로(必入邪路)요, 집착하면 법도(法道)를 잃게 되고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감이라”,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나만 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집착을 만듭니다. 설사 내 생각에 백번 내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름이 둘이 아닌 법(法)의 입장에서 보면 고집이 될 뿐이요, 집착이 될 뿐입니다. 집착이 얼마나 우리자신을 흐리게 만드는지 예를 들어 봅시다.

충주 석종사에는 스님과 재가수행자 사중식구들을 합쳐서 130~150여명의 대중들이 살고 있습니다. 상당히 많이 산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석종사 도량만이 아니라 어느 도량을 가든지 그 도량에는 개미나 곤충, 다람쥐, 박새와 온갖 새들 천만생명 내지 몇억 생명도 더되는 생명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산과 땅에다가 경계를 그어놓고 여기서 저기까지는 우리 땅이요, 저산은 누구네 땅이니 이렇게 집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우리보다 몇 백 년, 몇 천 년 전부터 자기네 터전이라고 집을 짓고 살아오는 개미와 지렁이 온갖 생명이 조상 대대로 주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동물들 입장에서 볼 때는 사람들이라는 게 1년에 몇 번 왔다가는 정도 즉 월세 사는 ‘놈들’이 주인이라고 행세하는 걸 보면 약간 이상한 놈이라고 할 겁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자연이나 모든 생명들을 같이 생각하는 게 아니고 인간들끼리만 경쟁을 하고 투쟁을 하고 네꺼니 내꺼니 그렇게 집착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비디오를 한편 본 일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더군요. 외계에 있는 우주인이 이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부단히 노력하다가 결론 내리기를 이 지구를 살리는 길은 오직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을 멸망시켜야만 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인간보다 수천만배 수억배 되는 그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요. 이건 정말 깊이 생각해봐야 할 일입니다.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 인냥 하는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 그 길을 찾지 못하면 법도를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법도를 잃게 되면 지구에서 쫓겨나는 겁니다. 지구를 잃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심지어 이 지구를 살리려면 사람이 없어져야 된다고 하는 이러한 생각 자체가 가히 충격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러니 집착의 길은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게 되는 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 우리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이라고 하면 삿된 모든 것을 없애두고 바름을 나타내야 되는 걸로 아는데 파사가 현정이요, 현정이면 파사입니다. 삿된 것이 삿된 마음만 놔버리면 그 자리가 바로 바름이죠. 삿된 것과 바른 것 둘이 있어서 하나를 없애두고 하나를 새로 세우는 그런 길이 아니거든요. 고로 집착이면 바로 삿됨이요, 집착을 놔버리면 바로 바른 길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각에서 나오고 생각은 감정을 일으켜서 집착을 하게 되니 법도를 잃게 될밖에 없는 겁니다. 생각에 얽매이면 집착이요, 생각에서 자유로우면 법도입니다. 그래서 법도(法道)가 없는 자리, 그 자리가 삿된 자리지 바른길 따로 있고 삿된 길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청원 선사께서 이르시기를 “타고 있는 것이 나귀 인줄 아나 나귀에서 내릴 줄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부디 삿됨이니 바름이니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아서 임운등등(任運騰騰)하기를 발원합니다.

[1246호 / 2014년 5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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