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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죽은 시인의 사회

기자명 정장진

생명 자체가 한 편의 시이자 시인이며 부처님이다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인문학과 생명을 죽음으로 내모는 사회를 지적하고 있다. 이를 주인공들은 책상 위에 구둣발로 오르는 행위로 저항한다.

1990년에 개봉된 영화이니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20년을 훌쩍 넘긴 아주 오래 된 영화다.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후로도 영화 채널 등을 통해 여러 번 방영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이 영화가 문뜩 떠올라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왜일까? 왜 이 영화가 세월호 뉴스를 보던 내게 나도 모르게 다시 떠올랐을까? 이 물음에 답을 하면서 불자의 눈으로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자.

영화 속에서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을 하다가 급기야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닐은 무지막지한 시대의 희생물이 되고만 단원고 학생들처럼 어린 고등학생이었다. 이렇게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죽은 시인의 사회’는 문학사에서 ‘성장소설’이라고 불리는 장르의 스토리텔링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얼른 보면 아무 상관도 없는 세월호 사건과 중첩되면서 내게 불쑥 떠오른 것은 주인공들이 같은 어린 학생들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문학 죽음으로 내몬 사회
연극 반대한 아버지로 비유
구둣발로 책상에 올라 항의

안전불감증 한국사회와 닮아
미래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
어린생명 죽인 사회가 ‘참사’

오히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던지는 거대한 화두였던 시(詩)와 관련된 문제가 세월호 사건을 대하며 슬픔과 분노에 겨워 쩔쩔매고 있던 나를 마치 망치 같은 것으로 강하게 후려치고 있었다. 맞다, 그랬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시를 다루는, 나아가 인문학과 인간과 사회에 대해 엄청난 화두를 던지는 영화였고, 세월호 사건도 바로 시가 죽고 인간도 사회도 죽은 한국 사회가 피해갈 수 없었던 사건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어린 생명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죽었다. 다 살아나올 수도 있었다…. 원인을 따져 보자고? 범인을 잡아넣자고? 죽이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었다. 시인들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어린 생명들이 주검으로 남긴 시만 남았다. 민법, 상법, 형법 그리고 헌법 모두 소용없다고 외치는 싸늘한 주검의 어둡고 어두운 시만 남았다.

‘죽은 시인의 사회’가 던지는 화두인 시는 불교에서의 선시(禪詩)처럼, 자구에 매달리지 말고 해석하며 그 뜻을 깊이 새겨들어야 할, 또는 돈오(頓悟)의 벼락같은 깨달음으로 얻어가져야 할 정심(靜心) 같은 것이다.

시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니 답이 없는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시인마저도 답을 못하고 얼버무리고 만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며. 하지만 시(詩)를 한자로 써놓고 보면 조금은 답이 찾아질 수도 있다. ‘言+寺=詩’이니 시는 언어의 사원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 이야기를 하면서 ‘+’와 ‘=’ 등의 수학적 부호를 사용하는 우리의 몰골을 영화에서 시를 가르치는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 분)이 보면 노발대발할 것이 틀림없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첫 수업시간에 한 학생이 국어 교과서인 에반스 프릿차드 문학박사가 쓴 ‘시의 이해’를 펴고 서문을 읽는다. 잠시 함께 읽어보자.

“시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운율, 음조, 비유를 이해하라. 그리고 두 가지 질문을 해라. 첫째, 대상의 예술적 표현도. 두 번째, 대상의 중요도이다. 첫째는 시의 완성도 측정이며, 두 번째는 중요도의 판단이다. 이 두 질문에 답이 나오면 시의 위대함이 쉽게 판별된다. 시의 완성도를 가로축에 놓고 중요도를 세로축에 놓으면, 그 시의 위대함은 완성도와 중요도의 영역이 된다. 바이런의 시는 중요도는 높지만 완성도는 겨우 보통을 넘는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14행시는 두 가지 면에서 모두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범위가 매우 넓으므로 실로 위대한 시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시를 읽는 동안 이 평가 방법을 연습하도록 해라. 이러한 방법으로 시를 평가하는 능력이 길러지면 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이해도 깊어질 것이다.”

학생의 읽기가 끝나자 칠판에 좌표 같은 것을 그리던 키팅 선생은 한 마디로 일갈한다. “쓰레기.” 그리고 곧 이어 “시는 재는 것이 아니다. 자, 이제 그 장을 찢어버려라. 어서, 몽땅 찢어 버려! 찢어내 버려, 프리차드 박사님을 쫓아내는 소리가 듣고 싶다. 여러분 그 페이지 말고도 서문 전체를 찢어 버려. 서문은 오늘로 끝이니 완전히 찢어내 버려라. 찢어내 버려!”라고 외친다.

▲ ‘시의 이해’를 찢어버리는 학생들.

학생들이 찢어버린 ‘시의 이해’ 서문은 쓰레기였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서문의 논조나 시에 대한 이해가 왠지 한국의 수능 국어 시험에 나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서문을 찢어버리라고 한 키팅 선생이 보는 시란 어떤 것인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말과 생각은 세상을 바꿔놓을 수가 있다. 비밀 하나를 이야기해주지. 시가 아름다워서 읽고 쓰는 것이 아니다. 인류의 일원이기 때문에 시를 읽고 쓰는 것이다. 인류는 열정으로 가득 차 있어.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해. 하지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시가 목적이란다. 이 말은 얼마나 위험한 말인가! 동시에 오해의 여지가 많은 말이기도 하다. 시에 대한 이 정의가 위험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은 정의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시에 대한 이 정의를 듣고 있는 대상이 어린 고등학생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학생들이 시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시이고 시인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 오히려 엄마 아빠에게 그들은 시였고 시인들이었다.

시는 좌표를 그려가며 측정할 수 있는 물리적이거나 화학적 대상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런 시도는 사실 코미디에 지나지 않는다. 또 꼭 영화에서처럼 가로축 세로축 운운하며 완성도와 중요도의 비율을 측정하지는 않는다 해도 시를 한국의 국어 수능에서처럼 모법답안이 있는 것처럼 하는 것도 못지않게 우스꽝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시는 언어의 사원이기 때문이다. 시가 그다지 필요 없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사실은 행복한 이들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시를 잘 쓰는 시인들도 있다. 하지만 언어의 사원으로서의 시는 이럴 때의 시, 즉 문학 장르로서의 시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백일장의 시도 아니며 ‘시의 이해’ 같은 개론서에 등장하는 시도 아니다.

오직 인간만이 실어증 등 언어와 관련된 병을 앓는다. 또 경전과 기독교 성서의 언어는 시 그 자체이며 경은 설법과 해석, 깨달음과 지혜로 이루어진 심원한 언어의 사원인 것이다. 깨달음으로 사물의 이치를 알고 견성성불의 지혜를 얻는다면 이 지혜의 거의 마지막 단계는 시의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도를 깨우쳐 사물을 떠나 언어 홀로, 그리고 스스로 서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두렵게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인간은 신과 짐승 가운데 어디쯤에 있다. 신이 아니며 짐승도 아니지만 신도 되고 짐승도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에서 늘 두렵게 떨고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이 두려움과 영혼의 떨림으로, 즉 시로 말미암아 인간인 것이다. 신과 짐승은 시를 쓰지도 읽지도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시를 필요로 한다.

언어의 사원인 시는 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언어의 죽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시의 세계에는, 즉 언어의 사원에는 역설적이게도 언어가 없는 것이다. 언어는 구분하고 분류하는 기능을 한다. 이 기능의 모든 경우의 수를 정리해 놓은 것이 문법이다. 이 언어의 법인 문법의 사회적 구현물이 형법, 민법 하는 법률집들이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늘 금기의 칼날만을 들이대는 최악의 윤리인 법은 그러나 얼마나 허망한가. 동시에 얼마나 준엄한가. 잘못된 판단으로 죄 없는 사람을 사형대로 보낸 판사가 머리를 깎고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법(法)은 언제나 불법(佛法)의 작고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에서 한 어린 학생이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반에 들어가 연극을 하다가 그만 아버지에게 들키고 끝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이 어린 학생은 깊은 밤 권총으로 목숨을 끊기 전에 연극 무대에서 머리에 썼던 화관을 다시 쓴다. 그리고 죽는다. 이 장면은 마치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를 연상하게 하는 장면인데, 이 연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영화는 어린 학생의 죽음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아니면 영국 왕실 전통인 계관시인(桂冠詩人)의 분위기를 내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린 학생이 죽었고 동시에 그 학생 속의 시인도 죽었다. 누가 죽였는가? 그토록 꿈꾸었던 연극을 하지 못하게 한 아버지가 죽였을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면 답답하게 영화를 본 것이다. 이 옹졸하고 편협한 관점을 벗어나면,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의 연극 사랑을 병신 머저리 같은 짓이고 나아가 죄악으로까지 여기게 한 사회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관점 역시 두루뭉술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것은 “연극은 어릴 때 잠시 취미로 하는 거야”라는 인식일지도 모른다. 시도 어릴 때의 취미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들에게 삶 자체가 시라는 것을, 인간이 시인이라는 것을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일어서는 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시학개론을 찢어버리라고 한 키팅 선생은 학생 자살사건의 여파로 학교에서 쫓겨나고 만다. 키팅 대신 시 수업을 맡게 된 교감선생이 수업을 하는 교실로 키팅 선생이 들어선다. 개인사물을 찾으러 온 것이다. 교감선생이 모든 학생들의 시학개론 첫 장이 찢겨나간 것을 발견하는 순간 키팅 선생이 막 교실을 나가려고 할 때, 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올라선다. 교감선생이 아무리 앉으라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었다. 두 번째 학생이 책상 위로 올라갔고 이어 다른 학생이 또 일어선다. 이렇게 해서 시학개론을 듣던 거의 모든 학생들이 구둣발로 책상 위에 올라선다.

키팅 선생은 어떤 잘못을 범했을까? 그는 시학개론을 배우기 전에 시는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보라고 했을 뿐이다. 시는 문학 장르가 아니며, 도표는 더더욱 아니다. 시학개론을 찢어버릴 때만 보이는 세계에서 “시는 어릴 때 잠시 해보는 거야. 법대를 가라”고 말하며 아들의 연극을 극구 반대한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 그 너머에서, 자신들이 시인들인 줄도 모르고 어린 학생들이 새떼처럼 재잘거리는 그 소리가 언어의 사원인 시일 것이다. 시는 생명인 것이다. 일어설 수밖에 없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47호 / 2014년 6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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