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웨이스트 랜드
13. 웨이스트 랜드
  • 정장진
  • 승인 2014.07.0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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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없던 일터 쓰레기 매립장에 핀 화엄 연화장

▲ 영화 ‘웨이스트 랜드’는 쓰레기장에서 폐품을 줍는 이들과 예술작품을 만들며 희망을 선물한다.

지난 4월 한국에서 아주 좋은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루시 워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웨이스트 랜드(Waste Land, 2010)’다. 영화는 지금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쓰레기 매립장에서 일하는 보잘것없는 사회 극빈층 사람들의 이야기다. 유명한 브라질 출신 예술가인 빅 무니즈(Vik Muniz, 1961~)가 자르딤 그라마초(그라마초 정원)로 불리는 쓰레기 매립장 노동자들과 함께 폐품으로 미술작품을 만들면서, 거의 인생을 포기하다시피 한 힘도 희망도 없는 가난한 이들을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의외로 감동적이며, 더 의외였던 것은 이 영화가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것이며, 한술 더 떠서 불교영화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불자의 눈으로 보면 ‘카타도르’로 불리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폐품을 줍는 노동자들이 모델이 되고 스스로 작품 창작에 참여하고 나아가 이렇게 만든 작품들이 경매에 붙여질 정도로 인기를 끌며 전시회도 열게 되는 사연은 진흙에서 연꽃으로 장엄된 연화장엄 그대로 쓰레기 매립장이 하나의 극락정토로 이행해 가는 과정 그 자체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
쓰레기장 극빈층 노동자 얘기

예술가 빅 무니즈가 폐품으로
미술작품 함께 만들어가면서
인생 포기했던 이들 변화시켜
정크 아트는 사바세계의 연꽃

이 영화는 폐품들로 예술작품을 만드는 정크 아트(Junk Art)의 모든 문화사적 함의들을 하나하나 곱씹어가며 차분하게 지분지분 보여준다. 하지만 담담한 다큐 형식에 힘입어 이 문화사적 함의들은 결코 우렁찬 목청을 타고 설파되지는 않는다. 이 영화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소리 없이 피고 소리 없이 지는 연꽃처럼, 영화도 그렇게 쓰레기 매립장에서 피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 폐품으로 만들어가는 작품.

섬뜩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의 쓰레기 나라는 조금 독특하다. 시체도 버리고 유기된 갓난아이도 이곳에 버려진다. 다른 쓰레기와 섞인 채. 폐품을 주워 생계를 꾸려가는 카타도르들은 하나같이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서 마지막으로 이곳으로 찾아 든 이들이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 15살 난 여인, 어머니를 따라왔다가 쓰레기차에 깔려 온 몸이 부서진 이후 할 수 없이 주저앉은 청년,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다시피 찾아 든 여인, 초등학교마저도 중퇴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일당 15달러에 팔려온 지 30년이 다 된 노인….

이들은 모두 쓰레기장에서 먹고 잔다. 트럭이 들어오면 뚝뚝 떨어지는 검은 오염수와 함께 쏟아져 내리는 수십 톤의 쓰레기 더미를 헤치고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카타도르들이 몰려든다. 멀리서는 메탄가스를 뽑아내는 굴뚝들이 보인다. 밤이면 이 굴뚝에서는 마치 지옥의 유황불 같은 보랏빛 불꽃이 활활 타올라 주위를 환하게 비춘다. 다시 날이 밝으면 웨이스트 랜드, 이 쓰레기 나라 위로는 검은 까마귀들이 해안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의 흰 갈매기들과 함께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 지옥도가 따로 없다.

없는 물건이 없다. 플라스틱, 페트병, 가구, 유리병, 구두, 인형, 삼바 축제의 화려한 의상과 꽃줄 장식들, 컴퓨터, 사진기, X레이 필름…. 잡지와 책도 쏟아져 들어온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그리고 플레이보이지도 있다. 심지어 개봉하기 전의 야쿠르트도 있어서 카타도르들이 찾아 먹기도 한다. 한 카타도르는 말한다. “중산층의 쓰레기가 좋아요. 못살면 쓰레기도 없죠….”

영화는 중산층의 쓰레기를 갖고 카타도르들을 직접 작업에 참여시키면서 서구 미술사의 걸작들을 모방해 낸다.

이 때 동원된 원작들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밀레와 반 고흐의 ‘씨 뿌리는 농부’, 피카소의 ‘다림질 하는 여인’과 같은 상당히 이데올로기적 성향의 작품들이다.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은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로 알려진 유명한 역사화가가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혁명 위원이었던 마라가 욕조 속에서 암살을 당하자 그의 시신을 마치 성화의 한 장르인 피에타에서 예수의 시신이 취한 포즈를 흉내 내어 묘사한 서구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들 중 하나다. 이 그림 한 장으로 위기에 처했던 프랑스 대혁명의 불꽃이 다시 살아난다. 영화는 브라질 빈민가 출신의 예술가 빅 무니즈(포르투갈어를 쓰는 브라질 식 발음으로는 비크 무니스)가 서구 회화사의 걸작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자리에 쓰레기 줍는 카타도르들을 대신 등장시킨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고 이 밑그림 전체를 온갖 쓰레기들을 갖고 다시 제작한다. 그 다음 이 대형 설치 작품들을 다시 대형 사진으로 찍어 벽에 걸 수 있게 하는 복잡하고 긴 시간이 걸리는 작업을 다큐 형식으로 찍는다. 각 원작의 톤과 음영을 재현해내기 위해 재료인 쓰레기들을 잘 골라 사용해야 한다. 가는 선은 병마개로 처리하고, 머리에 이거나 옆구리에 찬 광주리는 캔이나 플라스틱 병들을 사용하며 세밀한 음영처리를 위해서는 검은 모래를 채에 담아 작품을 이러 저리 돌며 뿌리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작품을 제작하는 데만 거의 1년 이상이 걸린다.

▲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쓰레기장.

감독은 그리고 예술가 무니즈는 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같은 대중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고 또 정치적 의미가 농후한 작품을 썼을까? 밀레가 그린 것을 반 고흐가 다시 그리곤 했던 ‘씨 뿌리는 농부’나 피카소가 아직 파리에 도착하기 전, 자살을 한 친구의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던 슬픈 시절(미술사에서는 흔히 이 시기를 피카소의 청색 시기로 부른다)에 그린 ‘다림질하는 여인’도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적 해석이 가능한 작품들이다. 감독과 무니즈가 이런 작품들을 택한 이유는 영화에서 채 읽지도 않고 버려져 쓰레기장으로 온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주워왔다는 장면에서 일부 답을 찾을 수 있다. “마키아벨리가 쓴 건 그 시대 군주들에 관한 이야기였어요. 당시의 피렌체처럼 지금 리우도 혼란스럽죠. 저마다의 영토에 그들만의 폭력조직과 요새가 있어요. 체사레 보르자도 나와요. 제게도 도움이 됐죠. 협회장이 됐을 때 몸소 체험했고요. 많은 것을 배웠고요.” 또 쓰레기 매립장에서만 26년 넘게 산 한 노인의 입을 통해서도 감독과 무니즈가 전달하고자 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읽을 수가 있다. “도덕성 따윈 버리고 부와 명예만을 좇는 부자가 더 나쁜 거지.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요컨대,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15, 16세기 피렌체나 영화가 제작되던 2008년 혹은 지금 월드컵이 열리는 2014년 브라질이나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꼭 세월호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들에게만 국한된 말도 아니다. 언제 그렇지 않았는가.

영화 속에서 예술가 무니즈는 말한다. “죽은 아이들의 시체도 메탄가스가 되겠지….” 무서운 것은 이것이다. 생명이 쓰레기가 되고, 쓰레기 줍는 사람들 역시 쓰레기가 되고, 월드컵을 반대하는 영상과 그 반대하는 이유는 한 번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월드컵 골 소식만 나오는 전 세계 언론은 언제든지 어린 아이들의 시체로 메탄가스를 만들 수 있는 세력들의 언론일 뿐이다. 화려한 기화요초의 정글은 탐욕과 대중 조작의 화려한 꽃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꽃인 연꽃은 소리 없이 피고 소리 없이 진다. 우리가 부처님오신날에 연등을 다는 참뜻도 여기에 있다.

영화 ‘웨이스트 랜드’는 종교영화도 불교영화도 아니다. 그러나 쓰레기 나라에서 쓰레기를 갖고 예술 작품을 만들었으니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 것이고 우의적으로 보면, 이 정크 아트는 아미타여래의 연화장(蓮華藏)에 다름 아니다. 쓰레기로 예술 작품을 만드는 현상은 20세기 말에 시작된 참으로 특이한 현상이다. 정크 아트에 와서 현대예술은 예술의 심부까지 내려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예술의 거의 마지막 한계를 실험하고 있다. 이 실험은 그것이 삶과 공동체와 역사 그리고 종교에 대한 것이기에 소름을 돋게 하는 치열함과 진정성을 갖고 있다.

영화 ‘웨이스트 랜드’에서 예술가 무니즈는 작품에 대한 전혀 새로운 관념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창작과정 전체를 더 중요시하고 있으며, 그 창작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인간과 대상을 예술 작품의 범위 속으로 끌어들인다. 사실 예술을 대하는 이런 태도는 종교적이며 불교에서나 기독교에서나 옛날의 작품들은 모두 다 이런 식의 예술관이 투영된 것들이었다. 심지어 창작의 전 과정을 신성시했다. 목욕재계를 하고 작품 제작에 임했으며 때론 금반지를 끓는 청동 속에 집어넣기도 했다. 급기야 등신불이 나오기까지 했다. 돌이 울고 쇠가 우는 경지가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짜 역시 얼마나 많았던가. 김동리의 ‘등신불’은 이 가짜에 관한 통렬한 비판이다.

왜 가짜가 많은가? ‘등신불’의 한 대목을 잠시 읽어보자.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서 아낌없이 새전과 불공을 드렸는데 그들 가운데 영검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뒤에도 계속해서 영검이 있었다. 지금까지 여기 금불각에 빌어서 아이를 낳고 병을 고치고 한 사람의 수효는 수천 수만을 헤아린다. 그 밖에도 소원을 성취한 사람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미타불! 나의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염불이 흘러 나왔다.” 그런데 소설에서 정작 주인공은 혈서를 쓰기 위해 물어뜯은 식지, 즉 집게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일 뿐이다.

“아이를 낳고 병을 고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런 불은은 불은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작품은, 진정으로 큰 작품은 등신불의 영검이나 불은으로 얻어 난 자식새끼들이나 얻어 가진 건강과 재산이 아니다. 오히려 영화 ‘웨이스트 랜드’에서처럼, 쓰레기 줍는 카타도르들을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51호 / 2014년 7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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