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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자무위(智者無爲)

기자명 혜국 스님

“직관할 것 같으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지자무위(智者無爲)어늘 우인자박(愚人自縛)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가 없는 대자유의 삶을 사는데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를 생사윤회에 구속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사람이면 지혜로운 이, 바로 부처이고 스스로 구속당하며 살면 어리석은 이, 즉 중생이라는 말이니까요. 바로 보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없다는 겁니다. 즉 지자(智者)와 우인(愚人)의 차이는 한 생각 차이라는 것이지요. 당나라와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650여년의 세월을 대표하는 팔대문장가 중 한사람이라는 천재 소동파의 이야기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 없는
대자유의 삶을 살아가고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를
윤회에 구속하면서 살아
 
당송시대 문장가 소동파
옥천사 승호 큰스님께
“나는 칭(秤)가요”하며 소개
스님들 실력 얼마나 되나
저울질하러 다닌다는 의미
이에 승호 큰스님 하신 말씀이
“억”하고 할을 하면서
“이 할은 몇근인가” 물으니
소동파 큰가르침에 발심
 
소동파는 워낙 박학다식하여 20세 약관의 나이에 고급관료시험에 급제했다고 합니다. 네 지방의 감독으로 황제의 특사가 되었으니 그 도도함이 대단했겠지요. 가는 곳마다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토론하기를 좋아했는데 어쩌면 자기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자랑하기 위함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소동파 자신이 화엄경(華嚴經) 80권을 다 외우다시피 기억하는 천재라서 “화엄경 몇품 몇째 줄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요?”하면서 주로 외우고 기억하는 문제에 대해 묻기를 즐겼답니다. 어느 날 옥천사 승호 스님을 찾아가 객승의 안내도 받지 않고 바로 승호 스님 앞에 나타나니 승호 스님이 “누구신지요?”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소동파가 대답하기를 “나 칭(秤)가요” 저울칭(秤) 자, 스님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저울질하러 다닌다는 뜻이지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승호 스님이 “억”하고 할(喝)을 하면서 “이 할(喝)이 몇 근이나 되는가?”하니 여기에서 콱 막히게 됩니다.
 
소동파 스스로 저울이라고 했으니 그랬겠지요. 소동파는 여기에서 참으로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실감하고 발심(發心)했던 겁니다. 그 후 흥룡사 상총선사를 찾아가 “스님, 저는 제방 여러 고승들을 찾아뵙고 법을 청해들었는데도 아직도 제가 누구인지 참 나를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합니다”며 법을 청합니다. 상총선사가 “왜 유정설법(有情設法)만 들으려고 하십니까? 무정설법(無情設法)을 들어야지요”라고 설하십니다.
 
여기에서 유정설법과 무정설법의 차이는 쉽게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부득이 말로 설명하자면 유정설법은 남의 소리요 즉, 소리가 있는 소리요 무정설법은 자기소리라 소리가 없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즉 무언(無言)의 설법입니다. 소동파는 일찍이 소리가 있는 법문(法門)만 들어봤습니다. 소리 없는 법문을 들어야 한다는 그 말 자체에 콱 막혔던 것입니다. 그길로 소리 없는 설법, 무정설법이 과연 어떤 세계일까, ‘이 뭐꼬?’하는 의문이 극점(極點)에 이를 때까지 그냥 말(馬)이 가는대로 나를 잊은채 오직 그 한 생각에 몰두했던 겁니다. 어떻게 갔는지도 잊은 채 폭포 앞에 도달 했던가 봅니다. 떨어지는 폭포소리에 확연히 깨닫고 게송을 읊기를 “계곡 물소리 부처님의 장광설(長廣舌)이요, 산색(山色) 또한 그대로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이 밤에 본 팔만사천 이 법문을 뒷날 후인에게 어찌 전할 수 있을까”하며 눈이 열렸던 겁니다. 스스로 자박(自縛)에 얽힌 중생이 한 생각 차이로 무위(無爲)의 지혜인이 된 겁니다. 속박을 벗고 나니 무위(無爲)인 겁니다. 지자(智者)와 우자(愚者)는 동일한 사람, 바로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을 깨달았느냐, 미(迷)했느냐의 차이일 뿐 지자와 우자는 같은 한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음은 “법무이법(法無異法)이어늘 망자애착(妄自愛着)하야”라는 내용입니다. 법(法)은 다른 법이 없거늘 망령되이 스스로 애착하여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위와 자박이 둘이 아니니 법에 다른 법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여기에 대해 조사 스님은 일갈(一喝)하시기를 “이미 다른 법이 없거늘 애착이 어디 있겠느냐? 어찌 스스로 망령되이 애착이라고 하느냐. 조사(祖師)의 깊은 뜻을 간파하지 못하면 모두 알음알이일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른 스승들이 계셔서 이렇게 바로잡아 주셨다는 게 우리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이라는 걸 깊이 생각하셔야 됩니다. 법(法)에는 일체 다른 법이 없다면 망령됨이니, 애착이니 하는 법은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입을 열면 그르친다고 하신 겁니다. 이 말이 참으로 중생을 살리는 말씀이지요. 허공(虛空)에 다시 무엇이든지 있다면 이미 허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허공’하면 벌써 앞산과 내가 서있는 이곳까지 그사이 빈 공간을 허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허공은 나는 물론 앞산이나 뒷산이나 모양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공(空)이라는 겁니다. 있는 모양이 없어져서 공(空)이 되는 것이 아니고 모양 있는 그대로 공(空)이라는 겁니다. 집을 비유로 들자면 기둥과 주춧돌, 서까래와 대들보와 기와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서 모여졌을 때 집이라고 합니다. 기둥 따로 기와 따로 서까래, 대들보 각각 따로 따로 있으면 집이라는 세계는 없습니다. 다만 인연이 모여 있는 동안 인연에 의해서 집이라고 하는 이름이 생겼을 뿐입니다. 그래서 연기공성(緣起空性)이지요. ‘모양이 분명하게 눈앞에 있는데 왜 공(空)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초승달이란 그림자에 가려진 둥근달이기에 없는 초승달을 있다고 보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리학에서도 입자가 곧 파장이요, 파장이 곧 입자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치는데요, 불교에서는 그러한 사실까지도 견해가 좀 다릅니다. 눈에 보이는 바깥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있어서 공(空)이라고 하면 이미 공(空)이 아니라는 겁니다. 관찰하는 주관(主觀)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결코 공(空)을 깨닫는 길이 아닙니다. 주관인 나와 객관(客觀)인 사물을 따로 보는 안목으로 공(空)을 증명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공(空)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환영(幻影)인 망상(妄想)으로 인해 스스로 애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꿈속에서 본 금덩어리를 사실로 생각하고 그 금덩어리를 애착하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얘기가 남의 일같이 생각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입니다.
 
예부터 달은 둥그런 보름달 하나뿐인데 초승달이니 반달이니 따로 있는 것이라고 속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달이란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서 초승달도 되고 반달도 되고 그런 것이지 본래 둥그런 달하나 뿐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自然)이 나를 봐야지 내가 자연을 보는 동안은 망자애착(妄自愛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나라고 하는 생각 즉 일체 번뇌, 망상이 사라지고 무심(無心)이 되면 우주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연이 보는바 없이 나를 보게 되는데 그러면 바로 법무이법(法無異法)이 됩니다. 그러나 보는 내가 있는 동안은 법무이법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심용심(將心用心)하니 기비대착(豈非大錯)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니 어찌 크게 그릇됨이 아니랴.”
 
제가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눈(眼)을 가지고 눈(眼)을 보려고 하니 이 어찌 어리석지 않느냐”, 이런 말입니다. 눈(眼)으로 눈(眼)을 볼 수가 없는 일인데 눈(眼)을 찾아다니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다는 의미입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찾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서 옛스승은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자여 참으로 우습고도 우습구나”라고 한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렇게 간단한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처인데 부처인줄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을 듣고 “아! 내가 부처구나”하는 순간 이미 중생심(衆生心)이 되어버리니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이 한평생 마음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났던 일이 일찍이 없습니다. 잠 속에서 잠인 줄 모르고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만약 잠을 자다가 “내가 자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잠에서 깬 상태입니다. 잠속에서는 잠인 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게 없는 마음에서 벌써 한 생각 일으킨 마음 즉, 망상(妄想)이 일어난 겁니다. 자고 있다는 한 생각이 일어났다면 이미 잠을 자고 있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눈(眼)을 가지고 눈(眼)을 보지 못한다고 하니까 눈(眼)을 찾을게 없다, 눈을 찾으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된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찾겠다는 생각만이 아니라 일체 생각이 끊어져야 하니까요.
 
만약 눈(眼)을 감았다고 합시다.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눈(眼)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눈(眼)을 떴느냐 못 떴느냐의 차이입니다. 반드시 눈(眼)을 떠야 하거든요. 눈(眼)을 뜨기 위해서 수행, 정진하느라고 노력하지 않는 스승이 없습니다. 부처를 구하는 것도, 참선(參禪)을 하여 마음을 깨닫는 것도,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크게 그르쳤다는 것이 백번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지 않는 일이 찰나(刹那)인들 있겠습니까?
 
눈을 뜨지 않고는 바로 보기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게 그릇됨이다”하는 말에만 속지 말고 과연 내가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지 않으려면 마음의 눈(眼)을 반드시 떠야 한다는 원력(願力)을 세워야 합니다. 그 마음이 본래 공(空)하다는 청정(淸淨)으로 돌아가지 않고는 크게 그릇됐다는 그 말 자체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참으로 애쓰고 애써볼 일입니다.

[1252호 / 2014년 7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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