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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블레이드 러너

기자명 정장진

죽음의 공포와 마주할 때 더 빛나는 삶의 가치

▲ 자신을 제작한 사람에게 “더 살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한 복제인조인간은 씁쓸하게 웃었다.

1982년에 나온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SF 영화의 고전 중 고전으로 안본 사람이 없는 영화다. ICT, BT, CT 등 T자 돌림의 첨단과학과 이를 응용한 산업들이 회자되는 오늘날, 30여년 전인 1982년이면 거의 ‘태고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액정 모니터 대신 커다란 덩치의 CRT 모니터가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그 이후 제작되는 인조인간을 다룬 SF 영화들의 전범 역할을 하고 있다.

수명 4년에 불과한 복제인간
더 살기 위해 인간들과 싸움
“더 살게 해달라” 애원하지만
거절당하며 살인까지 저질러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
‘죽음’의 노예란 사슬에 매여

1982년이면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은 스필버그의 ‘ET’를 떠올릴 수도 있다. 당시 ‘ET’는 안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어린 아이를 데리고 버스를 탄 30대 초반의 엄마가 뒷자리에 앉은 남자승객과 싸움을 하다 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는데, 사연인 즉 나이 든 남자 승객이 아이를 보고 “너 ET처럼 생겼구나”하며 머리를 쓰다듬자, 자신의 귀여운 아들이 지독하게 못 생긴 ET에 비교된 것에 발끈한 젊은 엄마가 멱살을 잡았던 것이다.

처음에는 ‘ET’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승자는 ‘블레이드 러너’였다. ‘블레이드 러너’는 그만큼 오락영화의 틀을 벗어나 상당히 진지하게 인간 존재와 죽음 나아가 과학과 인류의 미래에 대해 광범위하면서도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자라면 SF영화라는 이유로 영화가 던지는 이 둔중한 질문들을 몰라라 할 수가 없다.

과학자도 아니고 엔지니어도 아닌 우리 같은 평범한 보살들은 가끔씩 보도되는 첨단 과학 뉴스에 그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몇 가지 충격적 뉴스만 들어보자.

1. 향후 5년 안에 잠재적인 부모가 될 남녀의 DNA를 분석해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건강 상태나 신장 심지어 눈동자 색깔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불임 전문가인 마이클 채프먼 뉴사우스 웨일즈 대학의 산부인과 교수는 “이 기술을 통해 유전적 질환을 피할 수 있고, 한 단계 발전시키면 정자와 난자의 결합 시 ‘최고의 조합’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미국의 유전자 정보회사 진픽스는 비의료 목적으로 피부색, 눈동자 색 등을 선택할 수 있는 유사한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2. 내년부터 여성의 피부 밑에 호르몬 생성을 제어할 수 있는 작은 칩을 소개하고 내년부터 이 기술이 임상실험에 들어간다고 전했다. 피부 밑에 이식할 수 있는 20×20×7mm 크기의 피임용 칩은 인체에 배란 억제 효과 물질인 ‘레보놀게스트렐(levonorgestrel)’을 매일 30㎎씩 공급한다. 이 칩의 작동 기간은 여성의 생애에서 일반적으로 임신할 수 있는 기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최장 16년이다. 칩 안의 내용물을 피임용 호르몬 대신 다른 약물로 대체하거나 투약 일정을 따로 지정해 넣을 수도 있다. 현재 이 기술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로버트 랭거가 이끄는 팀의 명의로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서 지원하는 가족계획 프로그램 일부로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내년 임상실험을 통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고 오는 2018년 상용화할 수 있기를 기대 중이다.

3. 한 성형외과는 최근 3차원(3D) 프린터를 수술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단층촬영(CT)을 이용해 환자의 뼈 모양을 스캔한 뒤 3D프린터를 이용해 얼굴뼈를 출력하면 수술할 부위에 딱 맞는 보형물을 제작할 수 있다. 얼굴뼈와 똑같은 뼈 모형에 맞춰 만드는 보형물이기 때문에 들뜨거나 기존 뼈와 신경선을 피할 수 있어 안면윤곽성형을 원하는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다. 한 대학병원도 지난해 11월 처음으로 인공 머리뼈를 이식한 후 올해 두 번째로 성공했다. 기존 골시멘트는 빨리 굳어 성형이 어렵고 잘 깨지는 소재적 단점이 있었지만 3D프린터로 티타늄을 사출하는 방법을 활용하면서 이 같은 단점을 극복했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조인간을 색출해 죽이는 특수부대를 지칭한다. 위에 길게 인용한 신문기사들은 요즘 몇 달 사이에 보도된 것들이다. 영화에서는 상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리고 무섭게도, 영화 속 상상이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우린 살고 있다.

하지만 진정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상상이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과학의 발전만이 아니라, 오히려 영화가 과학과 맺고 있는 관련성이다. 이 관련성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왜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이런 종류의 과학 영화를 만들지 못할까?”하는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답은 간단하다. 서양 SF 영화들은 잘 만든 것일수록, 창조주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을 창조했다는 창조론에 대한 이의제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불교문화권인 동양에서는 과학은 존재하지만 SF, 즉 공상과학영화는 거의 제작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문화사적으로 연구해 볼만 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창조론에 대한 이의제기로서의 SF 영화는 20, 21세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서구 중세 시대의 스콜라철학 역시 신앙과 이성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말 한 필이 끌 수 있는 분량”의 ‘신학대전’들을 집필하곤 했다. 그 본영이 바로 소르본느로 불리는 파리 대학이다. 잔다르크를 마녀로 몰아 화형을 시킨 소르본느 대학은 천사를 보았다는 18살 처녀의 이야기를 그림에서 본 것이 환영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해버렸다. 신앙과 이성 혹은 과학 간의 싸움은 서구 지성사, 문화사 그 자체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다”며 투덜거리며 교회 법정을 나서던 갈릴레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의 싸움이 이제 인조인간 시대에 영역을 확대하여 거의 삶의 전 부분으로 확전된 셈이다. 영화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이 싸움의 도화선이기도 하고 찬반을 불러일으키는 대중적 선동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 죽음이란 철학적 명제를 던진 SF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죽음 앞에 직면해야 삶이 더 간절해진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바로 이런 영화로서, 기독교 성서적 상상력과 세계관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과학이나 성서의 세계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어서 섣불리 안이한 해석을 내릴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과학적 해석이나 기독교적 해석이 실패를 하는 순간 전혀 다른 불교적 관점이 자연스럽게 개입하는 순간을 허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SF 영화치고는 거의 ‘단아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트랜스포머’나 ‘어벤저스’ 같은 이상한 영화와 비교하면) 차분한 이 영화는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도 해서 여러 면에서 깊이 음미해 볼 만한 작품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아주 간단하다. 복제인간을 제작하는 타이렐 사가 제작한 거의 인간과 동일한 인조인간들이 4년이라는 정해진 수명(내구연한이라고 해야겠지만)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살기 위해 지구로 돌아와 인간과 싸움을 벌인다. 특수경찰인 블레이드 러너는 여러 명의 남자와 여자 인조인간들을 만나 하나씩 처리해 나간다. 인조인간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19세기 초인 1818년 메리 셸리가 쓴 SF 영화의 선구자격인 ‘프랑켄슈타인’이나 이 소설을 바탕으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제작된 영화를 연상할 수도 있다. 또 거꾸로 먼 후배 격인 카메론의 ‘터미네이터’같은 영화도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는 신의 창조 행위에 대해 거의 단도직입으로 질문을 던진다. 인조인간이 자신을 제작한 회사 사장을 만나는 장면을 보자.

“더 근원적인 문제요 / 뭐가 문제야 / 죽음 / 죽음?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어 / 더 살게 해줘요 아버지! / 네 생명은 이미 만들 때 결정된 거고. 변경은 불가능 해.”

이 대화가 끝나자 아들은 아버지를 죽인다. 아들은 역설적이게도, 두 손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잡은 뒤 두 눈을 눌러 죽인다. 이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두 눈을 후벼 파버린 유명한 비극을 뒤집어 놓은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도 조금은 답답한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조인간인 아들에게는 어머니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어린 시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명도 길어야 4년이다. 기억도 없다. 오직 파편적인 몇 가지 감정들만 갖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조인간이기에 처음부터 입 밖에 낼 수도 없었던 질문들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 특히 “더 살게 해줘요 아버지!”라고 울부짖을 때,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왜 섬뜩한 느낌을 받는 것일까? “더 살게 해줘요, 아버지!” 사실 인조인간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인조인간의 입에서 나왔기에 오히려 인간의 입에서 나왔을 때보다 더 절절한 것으로 들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 간절한 애원에 대해 지극히 과학적인 이론들을 들려주며 불가능하다는 말만 한다. 인조인간이 아닌 우리 인간은 어떤가? 과연 누구보고 “더 살게 해줘요”라고 애원을 할 것인가? 아버지일까? 아니면 어머니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자연일까? 터무니없는 질문이다. 그래서 “더 살게 해줘요”라는 말은 오직 인조인간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인간은 하기 힘든 이 애원을 하는 인조인간은 우리 자신 속 깊은 곳에 살고 있는 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분신은 우리 자신이면서 동시에 아니다. “아버지 더 살게 해줘요”라고 말하는 이 분신을 우리는 살면서 아주 가끔씩만 대면하게 된다.

“아버지 더 살게 해줘요”라는 이 말은 강박관념에서 나온 외침일 수도 있고 인간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인식에서 나온 탄식일 수도 있으며 나아가 불자라면 늘 대하는 윤회의 사슬에 대한 직관이 헐거워졌을 때 불쑥 튀어나오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아들은 그를 죽이려고 쫓아오는 인간 형사 블레이드 러너가 거꾸로 죽음의 위협에 처했을 때 말한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노예의 기분이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것은 죽음의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조인간이 이런 정도의 철학적 명제를 던지다니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이 수명 4년으로 제조된 인조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이다. 우리 인간의 수명은 몇 년일까?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준엄한 순간, 자신만이 아니라 인간 일반의 죽음까지도 문제가 되는 순간이 함께 찾아오는 것이다. 그 순간은 영화 속의 인조인간이 우리들 자신의 분신임을 일러주는 상징이 비유의 틀을 깨고 날 것 그대로 죽음을 들이미는 무서운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인조인간”이라고.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55호 / 2014년 7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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