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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

기자명 혜국 스님

“온갖 만물에 무심하면 주위 모든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랴”

▲ 소림사 입설정 앞에서 혜국 스님이 눈보라 속에서 자신의 팔을 베어 받치며 달마 스님에게 법을 구했던 혜가 스님 이야기를 불자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

무소의 소가 사자소리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무로 된 사람이 꽃이나
새를 보는 것과 같음이라

목인은 본래 무정물이니
새들이 어찌 두려워하랴
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면
보리도를 이루지 못할까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온갖 법은 늘 한결같아
 
우리가 얻었다고 좋아할 때도 잃었다고 슬퍼할 때도 우리 코를 통해서 들어오는 공기는 그대로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산하대지도 그대로 그 모습입니다. 조금만 더 큰 안목(眼目)으로 보면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그 말은 왼쪽 손에 가지고 있던 물건을 오른쪽 손에 옮겨 잡은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얻었다고 하는 사람도 잃었다고 하는 사람도 저승으로 돌아갈 때는 결국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구슬치기해서 따면 좋아서 까불어 대고 잃으면 시무룩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울적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돌아보니 구슬 그거 땄다고 해봐야 주머니만 무거웠지 아무것도 아니었거든요, 그러니 오늘날 얻었다고 좋아하고 잃었다고 싫어하는 것도 우주 자연의 진리에서 보면 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것이 모두 환영(幻影)이니, 그 생각을 놓아버리라는 겁니다. 옳다, 그르다 하는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을 대표하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은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영웅 중에 영웅입니다. 그러나 일본 쪽에서 보면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그런 훌륭한 분이 안계셨다면 우리나라 조선 역사는 훨씬 빈약했을 겁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흔히 쓰는 다수결의 원칙에서 볼 것 같으면 일본 인구는 1억2700만명이고 우리나라는 7000만명이니 그른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옳다는 것도 자기 이익에 도움이 되면 옳다고 하고 손해가 나면 그르다고 하니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일체 모든 생각, 번뇌, 망상을 몰록 놓아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놓아버리라 하면 놓아버리기 위한 실천을 합니다. 처절하게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놓아버리라고 했지”하고 이론으로만 알게 됩니다. 아니면 노트에 적어 놓거나 컴퓨터에 입력시켜서 환영의 세계를 만듭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첫째도 둘째도 “행(行)하고 행(行)하라. 행(行)하라”고 고구정녕(苦口丁寧) 당부하셨던 겁니다. 놓아버리는 길, 그 길이 바로 덜어내고 덜어내는 길이며 쉬고 또 쉬는 길입니다. 그러면 일념(一念)이 되고 나아가 무념(無念)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이 무념(無念)이 일시(一時)에 놓아버리는 소식입니다. 그나저나 본래(本來) 무일물(無一物)이라 하셔놓고 이제 놓아버리라고 하시니 이 무슨 소식인가 삼조 승찬 스승님의 발아래 큰절을 올릴 수밖에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이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다음 “안약불수(眼若不睡)하면 제몽자제(諸夢自除)요, 눈에 졸음이 없으면 모든 꿈이 저절로 없어지고” 이렇게 이어집니다.

눈을 멀쩡하게 뜨고 있으면서 꿈을 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꿈, 성내고 미워하는 꿈, 오해하고 질투하는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의 꿈은 누구나 눈뜨고 꾸는 꿈입니다. 한평생 우리가 짊어지고 다니는 이 삼독(三毒)의 꿈은 언제 벗어도 벗어야할 인생의 무거운 짐입니다. 불자들은 부처님 전에 기도하면서 복달라고 빌고 기도 성취해 달라고 빕니다. 기도하면서 비는 그 정신력이 모여지는 만큼 물론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가르쳐주신 가르침이 소중함은 그릇을 채우는 가르침이 아니라 비우는 가르침에 있습니다. 그릇만 비워버리면 빈 그릇이 되고 빈 그릇은 허공(虛空)이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허공은 빅뱅이니 빅뱅 이후니 하는 말이 나오기 이전의 허공입니다. 그 허공은 온 우주를 먹여 살리고 온 우주를 감싸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비울 때만 가능합니다. 탐진치 삼독심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내려놓으면 내 마음의 그릇은 그만큼 비우게 되고 비워놓은 만큼 청정(淸靜)인 공(空)이 됩니다. 그러면 청정성인 공(空)에는 졸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졸음 즉, 모든 번뇌 망상이 사라지면 꿈은 저절로 없어질 수밖에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졸음에 대해서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해인사에서 겨울 용맹정진(勇猛精進) 때 일입니다. 성철 큰스님을 증명으로 모시고 해인사 퇴설당에서 한겨울 21일간 용맹정진을 할 때입니다. 용맹정진이란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만 빼고는 하루 24시간 계속 앉아서 참선하는 일입니다. 물론 한 시간에 한 번씩 큰방에서 전 대중이 포행(布行)을 하지요. 그런데 2, 3일도 지나기 전에 얼마나 잠이 쏟아지는지 정신을 못 차립니다. 잠이 얼마나 무서운 업(業)인지 절절이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잠속에서 화두(話頭)가 되느냐하는 오매일여(寤寐一如)는 그냥 나온 말이 결코 아닙니다. 가야산 해인사 도량에 눈이 하얗게 쌓였는데 한 스님이 한참 참선 정진하다가 살짝 일어나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쌓인 눈밭 속에서 슬그머니 드러눕는 겁니다. 그러더니 눈을 손으로 계속 가슴위로 쓸어 올립니다. 눈이 이불인줄 알고 그러는 것이지요. 물론 성철 큰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집니다. 그만큼 잠이란 고약한 마장입니다. 영하 20도 차가운 눈밭에서 눈을 이불이라고 뒤집어쓰면 그게 제정신이냐고 웃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분은 수행 중 잠과의 싸움이 얼마나 처절한가를 체험해 보지 못한 분입니다. 졸음을 이겨내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더 나아가 탐진치 삼독의 잠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심했으면 경허 스님께서 경책하시기를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독한 술에 혼혼불각(喧喧不覺) 잠이 드니 꾸짖어도 아니 듣고 타일러도 아니 듣는다”고 한탄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니 이 탐진치 삼독심에서 그리고, 삼독이라는 잠에서 참으로 발심(發心)을 하고 깨어나야 할 일입니다.
 
“심약불이(心若不異)하면 만법일여(萬法一如)니라, 마음이 다르지 아니하면 만법이 한결 같으니라.”
 
마음에 차별만 없으면 온갖 법(法)이 한결 같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 그 자리는 온 법계(法界)가 ‘나’ 아님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 아님이 없는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이미 다름이며 차별이 돼 버립니다. 거울 자체에는 아무 모양도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모양이든지 그냥 비추는 대로 나타나기만 합니다. 온갖 법(法)이란 마음거울에 비친 그림자 일진데 마음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같은 파도소리라도 청마 유치환 선생님 시인의 귀에는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꿈쩍 않는데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하는 시가 나오게 되고 연인들끼리 해변을 거닐 때는 그러한 소리가 알파파가 되어 밀어의 속삭임이 되지만 귀한 내 자식을 잃은 부모님이 들을 때는 통곡의 소리가 되어 오장육부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분별심이 없으면 차별이 없습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나다, 너다 하는 분별(分別)이 둘이 아닌 세계를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이론적으로 백번 알아봐도 중도(中道)를 깨닫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신심명’을 바로 보려면 첫째 발심(發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심명’은 발심의 언어이며 깨달은 이의 환희에서 나오는 순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말기에 열심히 축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우리나라 양반들이 하는 말입니다.

“에~구, 저런저런 일은 하인들이나 시켜서 하지 직접 한다고 저렇게 촐랑 대냐고.”

그랬답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는 평생 축구라는 운동을 해볼 수가 없듯이 발심(發心)이 안 된 이는 ‘신심명’의 세계를 깨닫지 못하는 게 그와 꼭 같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것은 제법공상(諸法空相)을 깨달았다는 얘기요, 그러면 차별(差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법(法)이 일여(一如)할 밖에 없는 겁니다.

옛날에 어느 노보살님 두 분이 기도하다가 시비가 생겼답니다. 한분은 관세음보살 기도할 때 ‘관셈보살’이 맞다고 하고 한분은 ‘관센보살’이 맞다고 서로 우긴 겁니다. 한 보살님이 먼저 노스님을 찾아가서 “스님, 관셈보살이 맞죠?”여쭈니 스님이 하는 말이 “응, 관셈보살이 맞지”합니다. 또 한 보살이 찾아가서 묻습니다. “관센보살이 맞죠?”하고 여쭈니 스님이 다시 “응, 관센보살이 맞지” 합니다. 둘이 싸우다가 둘이 함께 노스님을 찾아갑니다. 노스님 하시는 말씀이 “관셈보살경에 보면 관셈보살이 맞고 관센보살경에 보면 관센보살이 맞다”고 하십니다. 글자만 따진다면 두 분 다 틀렸지만 정성을 우러나오게 하는데 는 두 분 다 맞는 말이거든요. 더 나아가 바다가 받아들이지 않는 강물이 어디 있으며 허공이 감싸지 않는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바다에 흘러들어간 강물은 이름이 없어집니다. 낙동강이든지 섬진강이든지 인도의 갠지스강이든지 모든 이름이 없어지고 바다라는 이름으로 통일됩니다. ‘신심명’에서는 이러한 원리를 “마음에 분별이 없으면 온갖 법이 한결 같으니라”고 하신 겁니다.

방거사는 이러한 세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다만 온갖 만물(萬物)에 무심(無心)하면 내 주위에 모든 만물이 무슨 방해가 되랴. 무소의 소가 사자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나무로 된 사람이 꽃이나 새를 보는 것과 같음이라. 목인(木人)은 본래 무정물(無情物)이라 꽃과 새들이 어찌 목인을 두려워하랴. 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면 어찌 보리도(菩提道)를 이루지 못할까보냐.”

이렇게 표현한 세계가 바로 그러한 세계입니다. 부디 만법일여(萬法一如)의 소식을 향해서 부지런히 노력해 봅시다.

[1256호 / 2014년 8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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