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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포탈라궁

푸른 하늘 아래 저물어가는 찬란했던 불교왕국의 기억

▲ 순례단 앞에 홀연히 나타난 포탈라궁의 위용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언덕 위에 1000여개의 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관음성지’ 포탈라궁을 건립한 티베트인들의 간절한 신심이 경건하게 다가온다.

노블링카를 출발해 라싸시내를 달리던 버스가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적막했던 버스 안이 순례단의 갑작스러운 탄성으로 술렁인다. 커튼을 젖히고 창밖을 바라본다. 히말라야의 강렬한 햇살이 시야를 뿌옇게 흐린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이곳 햇살과의 대면은 언제나 힘겹다. 용기를 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풍경은 조금씩 선명해진다. 도로와 차, 수많은 인파 그리고 하얗고 붉게 물들어있는 포탈라. 완만한 곡선의 마르뽀리(紅山) 언덕 위로 솟은 포탈라궁의 압도적인 위용이 순례단 앞에 홀연히 나타난다. 라싸로 진입하는 외곽도로와 조캉 사원 옥상에서 스치듯 조망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코앞에서 그 웅장함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다. 높이 117m, 길이 360m, 총면적 10만㎡, 1000여개의 방. 이만한 규모의 궁전이 산 위에 올려져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겨지지 않는다. 도대체 어떻게 건축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높이 117m에 길이만 360m
송첸캄포왕 임시법당이 시원
 
5대 달라이라마에 의해 증축
완공 후 달라이라마 주석처로
 
4400kg 금을 입힌 영묘탑 등
불교유물만 20여만개 보존돼
내부 총 1000여개 방 가운데
23개 방만이 일반인들에 공개
 
포탈라궁 앞 연지 메꾼 광장엔
오성홍기와 인민해방탑 들어서
 
포탈라궁은 조캉과 라모체 사원을 중심으로 만다라 형식으로 배열됐다. 토번 왕국 제33대 왕 송첸캄포가 명상을 위한 임시 법당 건립을 명령한 것이 그 시원(始原)이다. 그 후 토번 왕국이 부침을 거듭한 탓에 1000여년의 시간 동안 미완성인 상태로 이어지다 17세기 제5대 달라이라마 롭상 갸초에 의해 본격적으로 증축되기 시작했다. 정부청사인 백궁(白宮)을 완공한 후 사원 역할을 담당 할 홍궁(紅宮)을 건립하던 중 롭상 갸초는 열반에 든다. 하지만 섭정은 포탈라궁의 공사가 중단될 것을 우려, 그 사실을 12년 동안이나 감춘다. 그 사이 공사는 차질 없이 진행돼 1694년 준공될 수 있었고 미이라로 보존된 롭샹 갸초의 법체는 홍궁의 영묘탑에 안치된다.
 
▲ 포탈라궁 가장 높은 곳에는 오성홍기가 휘날리고 있다. 저 오성홍기를 내리기 위해 몸에 폭탄을 둘렀던 티베트 청년은 결국 붙잡혀 사형당했다.

이후 포탈라궁은 달라이라마의 주석처가 됐다. 하지만 현재 포탈라궁은 주인을 잃어버렸다. 대신 하늘과 맞닿은 가장 높은 곳에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있다. 1999년 티베트의 한 청년이 몸에 폭탄을 감은 채 포탈라궁 진입을 시도했다. 오성홍기를 내리기 위해서였다. 뵈릭 민족 최대의 유산, 조캉 사원과 함께 역사적·문화적·민족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포탈라궁 가장 높은 자리에 티베트의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 대신 오성홍기가 걸려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야말로 참담했을 것이다.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오성홍기를 내리려했던 그 청년은 결국 공안에게 붙잡힌 후 사형을 당했다. 현재 뵈릭 민족이 처한 상황을 목도하며 그리 멀지 않은 과거, 한민족의 아픈 수난사를 떠올려본다.
 
▲ 포탈라궁에 들어가기 위해선 고소증세를 견디며 100m 이상 올라가야 한다.

작렬하는 태양빛을 뚫고 포탈라궁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간다. 주차장과 포탈라궁 사이에는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널찍한 도로가 놓여있다. 차들이 질주하는 대로변에 간신히 걸쳐 서서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는데 귀를 찢을 듯 요란한 경적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운전자들은 저마다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순례단을 노려본다. 내 차가 지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건너지 말라는 경고다. 머나먼 타국에서 온 순례자, 더군다나 스님들에게 너무하는 것 같아 분노가 일었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힌다. 저 차들을 운전하는 사람은 티베트인이 아닌 한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니 그래야한다는 바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가이드조차 놀라워할 만큼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에 물들어가는 라싸에 대해 느껴왔던 실망감이 남은 순례일정을 더 이상 힘들게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이다.
 
도로를 건너 한참을 걸어가니 입구가 나온다. 포탈라궁 출입은 중국정부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하루에 2000명만이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1시간만 주어진다. 다급한 마음에 입장하자마자 계단을 뛰어 올라간다. 포탈라궁은 해발 3650m에 위치해 있으나 관람을 위해서는 100m 가량 더 올라가야 한다. 고산증세로 숨이 가빠오는 찰나 사천왕상과 조그만 평지가 나온다. 홍궁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관문이다. 잠시 숨을 고르려 벽에 기대 라싸시내를 바라본다. 가장 먼저 인민광장이 보인다. 천안문광장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그 자리에는 해자(垓字)가 있었다. 거대한 연못, 출렁이는 물결 속으로 들어간 포탈라궁의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화신인 달라이라마가 티베트 백성들을 미륵세상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만든 거대한 반야용선(般若龍船)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극적인 모습을 연출하며 뵈릭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준 포탈라궁은, 중국이 연지를 메우고 광장을 조성한 후 그 위상이 격하되고 말았다. 오성홍기 휘날리는 인민광장과, 점점 화려해지는 라싸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뜻밖에도 어색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근처 휴게실에는 1990년 당시 중국 주석이었던 장쩌민(江澤民)이 라싸를 방문한 기념으로 썼다는 글귀가 걸려있다. ‘민족단결을 수호하고, 민족문화를 번성시키자.’ 저들이 수호하려는 ‘단결’과 번성시키려는 ‘문화’는 이 땅에서 수천년 꽃피워온 티베트인들의 단결과 문화를 짓밟아야만 가능한 게 아닌지. 거창한 구호와 눈앞의 현실 사이 모순을 상기하니 입가에 쓴웃음 맺힌다.
 
▲ 5대 달라이라마 영묘탑. 높이만 12m에 달한다.

이제 백궁으로 들어가는 사다리를 오른다. 티베트인들이 수백 년 동안 공양 올린 야크버터 냄새 짙게 배어있는 방들이 미로처럼 얽혀있다. 퀴퀴하고 습한 분위기 속에서 가느다란 등잔조명이 간신히 어둠을 밝히고 있다. 어두운 회랑 곳곳에 숨어있는 방들을 찬찬히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을 ‘감옥’으로 여겼다는 14대 달라이라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는듯하다. 회랑을 통과해 옥상으로 연결된 계단을 오르면 역대 달라이라마의 영묘탑(靈廟塔)이 나온다. 온통 금으로 치장된 영묘탑들은, 하나같이 포탈라궁의 지붕을 뚫어버릴 듯 거대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5대 달라이라마 롭상 갸초의 영묘탑은 나머지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12.6m 높이의 영묘탑을 만들기 위해 무려 4400kg의 금이 사용됐다. 영묘탑 내부에는 고급향료로 방부처리한 법체가 보존돼있으며, 이 역시 금으로 덮여있다고 한다.
 
▲ 석가모니 불상과 5대 달라이라마 존상의 크기가 동일하다.

5대 달라이라마 영묘탑을 지나자 역대 달라이라마와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한 파드마삼바바, 그리고 티베트 불교 중흥조 쫑카파의 존상이 나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가모니 불상과 동등한 크기로 조성된 5대 달라이라마 존상이다. 오히려 5대 달라이라마 존상을 앞으로 돌출시켜 석가모니 불상보다 더욱 부각시키려는 의도였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한 규모의 영묘탑과 존상을 통해, 환생을 거듭하며 살아있는 관세음보살로 일컬어지는 달라이라마에 대한 이들의 존경심을 추측할 수 있었다.
 
좁은 통로를 가득 메운 관광객과 순례자들에게 떠밀리듯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뜨거운 햇살과 다시 마주한다. 1000여개가 넘는 방 가운데 23개만을 관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중국정부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포탈라궁을 빠져나온 것이다. 1시간 안에 둘러봐야 한다는 가이드의 엄포로 긴장하고 있었지만, 걸어서 올라가고 다시 내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30~40분이면 충분한 동선이었다. 차창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포탈라궁의 모습에 환희가 샘솟았던 게 불과 1시간 전이었지만, 지금은 밀려오는 허탈감을 감출 수 없어 온 몸에 힘이 빠져버린다. 뵈릭 민족의 찬란한 유산이 바로 저기 살아 숨 쉬고 있지만, 앞으로 그것들을 누구도 목격하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엄습한다.
 
씁쓸한 마음 달래며 포탈라궁 뒤편 계단을 내려가는데 오색 타르쵸가 나그네의 마음을 위로하듯 나부낀다. 이곳에서도 티베트인들의 꼬라(순례) 행렬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마니차를 돌리며 천천히,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옴마니반메훔’ 진언은 마치 슬픈 노래처럼 가라앉으며 포탈라궁 뒤안길을 장엄한다.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흔적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은 이제 저 티베트인들의 고귀한 영혼뿐이다. 지금 꼬라를 하고 있는 티베트인들의 간절한 신심만이 뵈릭 민족의 숨통을 조여오는 중화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설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을 바라보듯 안쓰러운 마음 가득하다.
 
▲ 원래 연지였던 자리에는 천안문광장을 본뜬 인민광장이 들어섰다.

포탈라궁 맞은 편 인민광장을 지나 다시 버스로 가는 길. 즐거운 표정의 관광객들 너머로 오성홍기와 20m 높이의 ‘해방기념탑’이 보인다. 1950년 10월 중국 인민해방군이 ‘봉건주의 농노’인 티베트인들을 ‘해방’시켰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앞에는 복을 기원하는 흰 천인 카타를 손에 들고 꽃비를 뿌리는 티베트인 동상이 서있다. 인민해방군을 환영하는 모습이다. 수백년 흐른 뒤에는 어쩌면 이 낯선 풍경이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인식되진 않을는지. 포탈라궁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티베트인들의 뒷모습이 문득 처연하게 느껴진다.
 
라싸=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56호 / 2014년 8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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