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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선오 스님의 상주물(常住物)

기자명 성재헌

노인·환자 우대로 상주물 가치 일러주다

▲ 일러스트=이승윤

세상에는 사유물(私有物)이 있고, 공유물(公有物)이 있다. 그 적정한 균형에 대해서 고래로 논란이 많지만 어느 한쪽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건 역사 속에서 입증된 바이다. 그럼, 공유물의 사용처는 어떻게 결정되어야 할까?

“공공의 기물이니 공공의 뜻에 가장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이런 원론적인 구호는 해석의 영역이 너무 광범위하여 실효성이 없고, 구체적이지도 않고, 왜곡의 여지도 많다. 그 왜곡된 해석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공공의 뜻’을 ‘다수의 뜻’이라 여기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다수’가 양심적인 사람들의 세력이라면 얼마나 다행스럽겠는가.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수두룩하다. 만약 ‘다수’라 지칭되는 개인이나 집단이 비양심적일 경우 공유물은 특정 개인과 집단의 새로운 사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긴 역사 속에서 이런 오류들을 수도 없이 겪어왔기에, 인류는 시행착오라는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공유물의 사용처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교의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부양자가 없는 노인에게 공유물을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제도이다. 즉 공유물은 우선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이슬람교 등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항상 제시되어 온 법규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대표적 공유물인 세금 사용처에 복지(福祉)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니, 매우 마땅한 일이라 하겠다.
 
현 사회의 제도와 비교할 때,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제도는 사유물에 대한 제약이 보다 강하고 공유물의 범위가 보다 넓다. 그리고 부처님 역시도 공유물의 사용처에 있어서는 그 우선순위를 병자와 노인과 아이들에게 두셨다. 개인의 탐욕을 극도로 억제하고 사회적 약자를 최대한 보호하는 부처님의 제도는 욕망의 힘으로 움직이는 ‘다수’에 의해 끝없이 공격받아 왔다. 하지만 2500여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산문의 전통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암 선오(高菴善悟)선사 역시 부처님의 제도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스승 가운데 한 분이셨다.
 
고암선사께서 운거사(雲居寺)의 주지로 계실 때였다. 고암선사는 납자가 병이 들어 연수당(延壽堂)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자기 탓인 것처럼 슬퍼하였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병문안을 하고 몸소 약을 달여 먹이며, 손수 음식을 먹여주기까지 하였다. 환자가 입맛을 잃어 통 음식을 삼키지 못하면, 원주를 불러 좋은 쌀로 죽을 끊이고 참기름까지 듬뿍 치게 하였다.
 
운거사 대중들 사이에서 불만이 퍼져나갔고, 그 불만은 이름 모를 한 스님의 장례식 날 터지고 말았다. 스님이 돌아가시면 그의 유품을 대중들에게 팔아 그 돈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산문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너무도 가난해 사유물이라고는 깨진 발우에 딸랑 누더기 한 벌 뿐이었다. 그래서 대중은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시신을 화장해 산속에 뿌리자고 논의하였다. 그 소식을 듣고 고암선사가 대중들의 처소로 찾아가셨다.
 
“그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께 수행하며 평생을 살아온 우리의 형제이다. 장례를 후하게 치러주는 것이 남은 자들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원주가 나서 공손히 말씀드렸다.
 
“스님, 후하게 치러주고 싶어도 그가 가진 것이 너무 없습니다.”
 
“원주, 창고의 물품들로 관을 마련하고 제사상을 차리게.”
 
얼굴에 각이진 납자 하나가 얼굴을 붉혔다.
 
“스님, 그건 상주물(常住物)입니다. 대중 전체를 위해서 써야지, 어느 한 사람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평소 불만이 많았던 젊은 납자들도 거들고 나섰다.
 
“스님, 대중들이 먹는 공양에는 거친 푸성귀 하나까지 제한하시면서 노인과 환자들에게는 음식이며 옷까지 펑펑 꺼내 주시니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과일이나 귀한 찬이 들어오면 몽땅 환자들에게 갖다 주고, 겨울에 홑겹의 옷을 입은 노장에겐 옷감까지 끊어드리니, 노장과 환자만 대중이고 저희는 대중이 아닙니까!”
 
고암선사가 눈빛을 번쩍이셨다.
 
“자네들은 병도 들지 않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사람들 같구나!”
 
호령에 입을 닫았지만 대중들의 얼굴엔 불만이 여전했다. 이를 눈치 채고 원주가 나섰다.
 
“스님, 상주물은 온 대중이 고루 나눠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스님께서 노인과 환자와 죽은 사람만 후대하시니, 대중들의 불만도 일리가 있습니다.”
 
잠시 침묵한 고암선사께서 낯빛을 누그러뜨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자네들은 내가 상주물을 독단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하는군. 내 변변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자네들에게 한마디에 해야겠네. 내 젊은 시절에 대장경을 뒤지면서 부처님의 의도를 살펴본 적이 있었네. 비구에게 본래 내 것이란 없네. 하루하루 걸식하며 물품을 축적하지 않는 사람이 비구야. 가만히 앉아서 공밥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어? 게으른 마음이 생기고 ‘나는 존경받아 마땅한 비구다’는 아만심이 일어날 게 뻔하지. 부처님이 그걸 염려하신 거야. 그래서 새벽마다 제자들과 함께 발우를 들고 걸식하셨지.
 
하지만 늙고 병든 비구들은 걸식을 나갈 수 없었어. 그래서 상주물(常住物)이라는 제도를 만드신 거야. 젊고 건강한 비구들은 아예 상주물을 사용할 수 없었지. 부처님이 입멸하시고도 몇 백 년 동안은 그 제도가 그대로 실천되었어. 하지만 중국에 와서는 기후도 다르고 여건도 달라 약간의 변형을 가할 수밖에 없었지. 유능한 사람을 선발해 시주를 받게 하고, 받은 시주를 상주물로 축적해 두었다가 대중들이 사용하게 한 것이지.
 
제도가 변형되었다고는 하나 상주물은 노스님, 환자, 어린아이에게 우선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우리 절집의 전통이야. 자네들은 젊고 튼튼하지 않는가. 옷이고 밥이고 절에서 제공하는 것이 부족하면 얼마든지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어. 하지만 노인이나 환자들은 그렇질 못해. 그들은 상주물이 아니면 기댈 곳이 없어.
 
어떤 마음을 가져야 부처님 마음에 맞고, 어떤 일을 해야 부처님 행동에 맞을까를 생각해야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겠는가? 부처님께서도 공양청(供養請)에 참석하지 않는 날이면 항상 승방(僧房)을 돌면서 늙고 병든 비구들을 보살피셨어. 이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솔선수범이야. 또한 ‘소나무와 더불어 노스님은 산문의 아름다운 풍경이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맘에 거슬리는 바가 있더라도 참고 이 늙은이의 뜻에 따라주게나.”
 
그날 이후 운거사에서는 상주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1257호 / 2014년 8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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