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 항하사수의 그림자

空生初請問 (공생초청문)
善逝應機酬 (선서응기수)
先答云何住 (선답운하주)
次敎如是修 (차교여시수)
胎生卵濕化 (태생난습화)
咸令悲智收 (함령비지수)
若起衆生見 (약기중생견)
還同着相求 (환동착상구)
 
수보리 존자가 처음에 질문하자 / 선서(부처님)께서 근기에 맞게 대답하셨으니 / 먼저 마음을 어떻게 유지해야 되는지에 대답하시고 / 다음에 이와 같이 마음을 닦아야 된다고 하셨네
 
/ 태생·난생·습생·화생의 온갖 중생을 / 모두 자비와 지혜로 거두어 들여도 / 만약에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소견을 일으킨다면 / 껍데기에 들러붙어서 구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로다.
 
금강경에서 “한량없고 수를 헤아릴 수 없고 가이없는 중생을 해탈케 하더라도 실제로 해탈을 얻은 중생은 없느니라. 무엇때문인가. 수보리여, 만약에 보살이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한 대목에 부대사가 붙인 게송이다.
 
먼저 마음을 어찌 유지할 지를
대답한 후에 마음을 닦아야
온갖 중생을 자비로 거두어도
제도할것 있다면 껍데기 불과
 
육조 스님은 독특하게 이 네가지 껍데기에 집착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눈먼 사람이 재산과 학벌과 집안을 자랑스럽게 여겨서 모든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아상이라고 한다. 비록 인의예지신을 실천하더라도 생각이 교만하고 자부심이 지나쳐 두루 공경하지는 않고 ‘나는 인의예지신을 실천하는 것은 안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공경하지 않는 것을 인상이라고 한다. 좋은 일은 자신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중생상이라고 한다. 어떤 상황을 맞이했을 때 취사분별하는 것을 수자상이라고 한다”
 
부연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이 저절로 반성이 된다.
 
채근담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風來疎竹 (풍래소죽)
風過而竹不留聲 (풍과이죽불유성)
雁渡寒潭 (안도한담)
雁過而潭不留影 (안과이담불유영)
是以君子 (시이군자)
事來而心始現 (사래이심시현)
事去而心隨空 (사거이심수공)
 
바람이 성근 대나무 숲에 불어옴에 /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대나무 숲은 바람소리를 붙잡아두지 않고
/ 기러기가 차운 연못 위를 지나감에 / 기러기가 지나가고 나면 연못은 기러기의 그림자를 붙잡아두지 않는다네
 
/ 이 때문에 군자는 / 상황이 다가오면 마음이 비로소 나타나고 /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텅 비워진다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오전에 지하철 계단에서 두 계단을 벽에 손을 짚으면서 내려선 다음 한참 쉬고 또 벽을 의지해서 두 계단 발을 옮기고 한참 쉬곤 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아직 한참 남은 내리막 계단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던 모습. 저 할머니께서는 앞으로 사시는 동안 몇 개의 계단을 저렇게 내려가고 또 올라가야 하는 것일까. 길 건너 저쪽 편에 엘리베이터가 있긴 한데 초행길이셔서 계단을 걸어 내려가시는 걸까. 멀찌감치서 나도 천천히 계단을 내려서면서 만감이 교차하고 또 교차했다.
 
무릎주사를 맞으시다가 효력이 더 이상 나지 않아서 걷지도 못하게 되신 채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떠오르면서 가슴 안으로 눈물이 흘러내려갔다.
 
시를 읽고 고전을 읽고 글쓰고 하는 일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대신 아파줄 수도 없는 저 무릎을 어쩌란 말인가. 친딸에게 “누구신데 저한데 이렇게 잘해주세요?”하고 묻는 어머니는 또 어떻고.
또 잊어버리게 될 것이고 비슷한 상황을 만난다면 또 생각날 것이다. 내 마음이 연못이라면 도대체 몇 마리의 기러기 그림자가 또다시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가.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59호 / 2014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