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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법인관(法印觀)

삼법인 바라보는 차이에 따라 교설 달라져

▲ 그림=김승연 화백

부처님 교설 중에 삼법인(三法印)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다. 그러나 이는 초기불교의 삼법인이고 대승불교에서는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포함시킨다. 초기불교는 삼법인이라는 말 대신 삼특상(三特相)이라는 용어를 쓴다. 근래 한국불교가 상좌부불교와의 교류가 활발해져서인지 삼법인을 무상(無常)·무아(無我)·고(苦)로 규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삼법인이라는 말 대신에 삼특상이라는 용어도 등장한다.
 
초기는 삼법인을 진리로 보고
 
대승은 이 또한 공함으로 봐
모든 것이 공함을 바로 알고
삼법인마저 뛰어넘어야 해탈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삼법인에 대해 이견이 생기는 것은 법을 적용하는 범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초기불교가 유위법인 오온(五蘊)을 중심으로 교설을 펼치는 반해 대승불교는 유위법인 오온뿐 아니라 무위법인 열반까지를 포함시켜 교설을 펼치고 있다. 대승불교는 유위와 무위를 통틀어 광범위한 개념으로 법인(法印)을 삼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의 삼특상(삼법인)은 중생을 지배하는 결정적 법칙이다. 무명(無明)에 휩싸인 중생의 오온은 무상과 무아, 고를 수반한 채 생로병사를 겪는다. 오온은 존재하지만 무상이고 무아이고 고이므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유위법인 오온을 통찰하여 무상(無常)을 깨달으면 위없이 자유로운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이루고 무아(無我)를 깨달으면 나라고 할 것이 없는 공해탈(空解脫)을 이루며 고(苦)를 깨달으면 더 이상 구할게 없는 무원해탈(無願解脫)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삼법인을 오온에 속하는 절대적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승은 무상·무아·고 거기에 더하여 열반까지도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삼법인이든 삼특상이든 절대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연기의 법을 공(空)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교리에서는 오온 그 자체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어떠한 법칙도 진실할 수 없다. 눈병으로 인해 일어난 허공의 무늬들이 아무리 다양한 모습을 펼쳐 보인다 해도 실제에 있어서 허공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온 자체가 실제가 아닌 공이므로 당연히 오온에 따른 어떠한 법칙도 실제로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온이 공하므로 무상도 공하고 무아도 공하며 고도 공할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열반마저도 공하다고 가르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 일체의 모습은 전부 허깨비 같은 존재들이어서 무상하지도 항상하지도 아니며 실체가 있는 것도 실체가 없는 것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또한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니다.
 
대승불교의 이 같은 논리는 비단 삼법인에 관한 내용뿐만이 아닌 초기 불교의 모든 교법에 관한 내용까지 포함한다. 대승에서는 제법의 공성을 파악하면 삼법인만이 아닌 십이연기(十二緣起) 사성제(四聖諦) 업(業) 사과(四果) 등의 제반 진리들도 실체로써 존재 할 수 없게 된다고 설한다. ‘금강경’에 어떤 법도 얻은바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한다는 구절이 있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내용이 확고부동한 진리는 아니며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은 얻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초기불교는 부처님이 수행을 통해 삼법인을 비롯한 십이연기와 사성제 등의 모든 이법을 확인하고 이를 진리로 삼았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공이라는 명제 하나를 깨달으면 삼법인·십이연기 등의 법칙도 실제의 모습이 아니어서 얻었다라고 할 만한 내용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꿈속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여인은 본래 허구이므로 만난 적도 헤어진 것도 없는 것처럼 일체의 존재들이 공하다면 비록 수행을 통해 법칙을 발견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들이 오온을 비롯한 일체의 법이 공하다는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무상하다느니 항상한다느니 괴롭다느니 즐겁다느니 하는 분별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오온을 관찰할 때 초기불교처럼 무상과 무아와 고를 관찰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오온이 실재하지 않는 공임을 관찰하여 무명을 타파하고 삼법인마저 뛰어넘을 것을 강조한다. 오온이 연기된 존재라면 오온은 실재가 아니며 오온이 실재가 아니라면 무상·무아·고· 열반 등의 법인과 특상도 실재가 될 수 없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가 삼법인을 무시하거나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이와 같은 교설을 수용은 하되 대승불교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과정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인다. 불도를 닦는 보살은 삼법인(삼특상)을 진리로 삼되 종국에 가서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고 있는 것이다.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진리를 유상교(有相敎)라 하고 대승불교의 진리를 무상교(無相敎)라 한다. 유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있다고 보는 가르침이고 무상교란 확인하고 얻을 만한 법칙이 없다는 가르침이다. 초기불교의 삼법인(삼특상)은 범부들에게 있어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진리였다. 범부들의 보편적 시각에서 보면 세간은 무상이며 무아이며 고라고 설하는 초기불교의 교설이 훨씬 합리적이고 사실적일 수 있다. 이에 반해 대승불교는 자칫 관념론에 빠지기 쉬운 약점을 지닌다. 오온을 관찰 할 때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무상과 무아와 괴로움이지 공은 아니다. 오온을 관찰 할 때에 삼법인은 확인하기 용이해도 공은 확인하기 어렵다. 공은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깨달음의 영역이지만 과연 공을 어떻게 체득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초기불교만큼 그 방법을 흔쾌히 답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오온을 직접적으로 바라보는 수행보다는 철저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모든 것이 분별로 인해 나타나는 허망한 것이므로 분별을 타파하면 일체가 공해져 존재의 그물에 걸려 장애를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한쪽에서는 삼법인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치고 한쪽에서는 공을 궁극적 진리로 가르친다. 똑같은 좌선이지만 한편에서는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고 하고 한편에서는 분별심을 타파하기 위해 마음을 집중하라고 한다. 또한 초기불교를 가르치는 도량에서는 제법의 생멸을 강조하고 대승불교를 가르치는 쪽에서는 제법의 불생멸을 가르친다. 삼법인을 결정적 진리로 받아들여야 할지 공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자들은 혼란해 한다. 그 접합 점을 찾아야 할 때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59호 / 2014년 9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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