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 갼체

히말라야 고원을 가로질러 구법승의 발자취를 좇다

얌드로쵸를 지나 설산을 배경으로 뻗어있는 협곡을 가로지른다. 높은 산과 낮은 하늘 사이에 걸쳐있는 도로가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며 끝없이 이어진다. 저 멀리 하얀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더니 어느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다. 풍경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주변에는 뜻밖의 적막만이 가득하다. 마치 수만 년 동안 감춰졌던 비밀을 향해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는듯하다. 이 광활한 대자연 앞에서 순례자의 마음은 환희로 고동친다. 인간의 힘으로 이 모습을 만들어낼 수 없듯, 인간의 언어 또한 감히 이 모습을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티베트에 도착한 후 많은 불교유산을 참배해왔지만 지금 눈앞의 광경이야말로 삼독에 물든 마음을 말끔히 씻어주는 가피임이 분명하다.

티베트 곡창지대를 품은 갼체
한때 무역거점으로 명성 떨쳐
현재는 티베트 6대 도시 전락

도시 외곽에 우뚝 솟은 갼체종
요새로 지어져 왕궁의 역할도
영국군에 저항하며 목숨 바친
티베트인들의 영웅담 스며있어

펠코르사원에는 3대종파 공존
높이만 33m 9층탑 쿰붐 유명
대법당서 구법승 위패 모시고
구도열정 되새기는 법회 봉행

협곡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너른 평야가 펼쳐진다. 얌드로쵸와 목적지인 갼체(Gyantse) 사이의 평야는 티베트에서도 보기 힘든 곡창지대다. 기름진 흙에 터를 잡은 나무들이 탐스럽게 영글어있다. 면양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먹는 벌판 너머에는 밭을 일구고 있는 농부들이 느릿느릿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그것들을 품고 길러내는 강물과 햇살이 풍요롭게, 따사롭게 순례자를 감싼다. 목가적인 풍경 앞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얌드로쵸에서 출발한 버스가 2시간여를 달리자 갼체가 나온다. 갼체는 라싸에서 260km, 시가체에서 146km 떨어져 있다. 인도와 네팔, 부탄에서 티베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했기에 무역거점이자 교통중심지로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누렸다고 전해진다. 티베트에서 인도로 넘어가기 위해서도 갼체를 지나쳐야 했는데, 차마고도를 누빈 마방들이 히말라야를 넘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한 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점령 이후 군사도시들이 급성장하면서 6번째 규모의 중소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라싸에서 느꼈던 혼잡함은 이곳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오래 전부터 면면히 내려온 티베트 고유의 전통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하얀 흙담과 오색 처마의 전통가옥, 그리고 맑은 눈망울로 이방인을 향해 웃음 짓는 티베트인. 중국의 지배가 아니었다면 수도 라싸도 지금 갼체의 모습을 간직했을 것이다.

▲ 1904년, 갼체의 난공불락 요새 갼체종에 영국군이 들이닥치자 티베트인들은 가파른 절벽 아래로 스스로의 몸을 내던졌다.

갼체로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 위로 높게 솟은 요새, 갼체종(Gyantse Dzong)이 보인다. 토번왕조의 전신인 얄룽왕조 마지막 왕 팔코르찬이 만들었던 궁을 갼체의 군주 팍파팔상뽀가 요새로 개축했다. 이는 네팔의 구르카왕국과 라다크왕국의 침입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후 토번왕조가 멸망하고 갼체의 규모가 커지면서 통치를 위한 정부기관이 입주하는 등 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바위절벽에 건설된 갼체종은 그야말로 난공불락, 절대 정복을 허용하지 않을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요새는 영국군에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티베트인들의 슬픈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100여년 전, 복잡했던 국제정세 속에서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라싸 침공을 감행한다. 라싸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갼체를 점령해야 한다. 프랜시스 영허즈번드 대령이 이끄는 영국군이 1904년 갼체로 들이닥치자 주민들은 갼체종으로 모여 항전을 결의한다. 하지만 대포를 쏘는 영국군 앞에 돌과 활로 무장한 티베트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항복이 아닌 죽음을 택한 티베트인들은 영국군이 갼체종으로 진입하는 순간 가파른 절벽 아래로 스스로의 몸을 내던진다.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기리는 의미로 갼체종을 ‘영웅성’으로 부르고 있다.

갼체종 영웅탑에는 당시 결사항전을 감행하는 티베트인과 인민해방군을 환영하는 티베트인의 모습이 앞뒤로 조각돼있다. 히말라야 역사, 그 유구한 흐름의 단절에 이은 새 시대의 범람을 알리는 표지석인 것 같다. 문득 티베트가 경험하고 있는 격동의 역사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조상의 숭고한 영웅담과 조작된 진실이 엇갈리는 현 시점에서 티베트인들은 어떤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일까.

▲ 펠코르 최데의 9층탑 쿰붐. 티베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여겨지며 내부에 10만개 불상이 조성돼 ‘십만탑’이라고도 불린다.

갼체종을 출발한 버스는 이제 펠코르 최데(Pelkhor Chode, 白居寺)로 향한다. 펠코르 최데는 티베트 최대 규모의 불탑 쿰붐(Kumbum)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팔코르찬의 지시로 최초로 건축된 후 1414년 원나라를 등에 업고 티베트를 호령하던 사카파에 의해 증축됐다. 그러나 티베트불교가 달라이라마의 겔룩파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갼체와 펠코르 최데를 지배하는 종파 역시 겔룩파가 됐다. 그 후 여러 종파가 힘을 합쳐 발전을 거듭했으며 한때 17개 승가대학이 운영되는 등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침략과 문화혁명을 거치며 대부분이 파괴되고 현재는 대법당인 쭉라캉, 쿰붐과 두 개의 승원만이 남아 다소 초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펠코르 최데에 들어서자마자 쿰붐의 웅장함이 일행을 맞는다. 기단을 포함해 9층으로 구성된 쿰붐은 높이만도 35m에 이른다. 티베트에서 가장 아름다운 탑으로 여겨지며 내부에는 10만개의 불상이 조성돼 ‘십만탑’이라고도 불린다. 쿰붐은 신비로운 힘을 지니고 있어 탑 안에서 한 번 경전을 읽으면 다른 곳에서 천 번 읽는 것과 동일한 가피를 받는다고 한다. 또 복을 기원하는 흰 천인 카타를 바치면 부처님이 모든 업을 소멸해주며 불탑의 향기를 맡거나 풍경소리를 듣기만 해도 짐승들이 사람으로 환생한다는 믿음이 내려오고 있다. 때문에 쿰붐에는 정성껏 기도하는 티베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펠코르 최데 내부를 장엄한 불화.

쿰붐 오른편에는 대법당인 쭉라캉이 있다. 야크버터 냄새가 진동하는 쭉라캉 내부로 들어가니 벽에 그려진 불화가 창건 당시 조성된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티베트인들은 불상과 불화 등을 일체 손질하지 않는다. 고색창연한 불화로 가득한 쭉라캉 벽면은 세 군데 법당으로 이어진다. 쭉라캉에는 겔룩파와 사카파, 까규파의 법당이 사이좋게 자리 잡고 있다. 티베트불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종파들이 이곳에선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 펠코르 최데 대법당 본존 양 옆으로 9대와 10대 판첸 라마의 사진이 걸려있다.

순례단은 사카파와 꺄규파 법당을 참배한 후 겔룩파 법당으로 들어간다. 석가모니불 양 옆으로 9대와 10대 판첸라마의 사진이 모셔져있다. 역대 판첸라마들은 펠코르 최데에서 불법을 공부했다고 한다. 법당을 참배한 순례단은 미리 준비해온 위패를 주법당에 모시고 법회를 봉행했다. 현각(玄恪), 혜업(慧業), 혜륜(慧輪), 오진(悟眞) 등 티베트를 거쳐 인도를 향했던 한국의 구법승들을 기리기 위해서다. 1500여년 전, 스님들은 오직 불법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한반도를 떠나 중원의 사막을 가로지르고 눈 덮인 히말라야를 넘었다. 그들의 여정은 목숨을 내걸어야 할 만큼 험난했다. 무더위와 혹한이 교차하는 낯선 기후와 산짐승과 도적떼가 생명을 위협하는 모진 상황을 불굴의 의지로 견뎌내며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천축의 하늘은 멀고멀어 만첩 산인데(天竺天遙萬疊山)/ 가련타 떠나는 자들이여, 힘겹게 오르는구나(可憐遊士力登攀)/ 몇 번이나 저 달 따라 외로운 배 떠나갔지만(幾回月送孤帆去)/ 구름 따라 돌아오는 이 보지 못했네(未見雲隨一杖還)

▲ 순례단은 부처님 가르침을 좇아 천축국으로 향했던 구법승들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부처님 가르침을 좇아 천축국으로 향했던 스님 대부분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시를 지었다. 설령 죽음에 이른다고 해도 끝내는 도달해야만 했던 부처님 세계. 그 숭고한 정신은 천년 넘는 세월을 지나 지금 법회를 봉행하고 있는 순례단 스님들에게 이어져 내려왔다. 합장한 스님들의 뒷모습에서 구법승들의 결연한 각오와 간절한 신심을 엿본다.

순례단은 펠코르 최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시가체로 출발한다. 그동안 버스로 이동하며 바라봤던 풍경을 떠올려본다. 대자연 광활함 속에 구법승들의 흔적이 아로새겨져있음을 느낀다. 이제껏 순례에 그들의 발자취가 짙게 배어있음을 깨닫는다. 갼체를 벗어나 다시 만난 히말라야. 끝없이 펼쳐진 고원에 구법승들의 숨결이 바람 되어 불어온다.

갼체=김규보 기자 kkb0202@beopbo.com

[1261호 / 2014년 9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