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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도솔산 선운사

기자명 김택근

소통하고 호흡하는 문화공동체의 꿈, 도솔산에 영글다

▲ 주지 법만 스님은 불자와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공동체 구축의 원대한 계획을 실현해가고 있다.

고창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선운사(주지 법만 스님)를 찾아갔다. 가을은 우리보다 먼저 완행버스에서 내린 모양이다. 산도 강도 들녘도 막 가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억새들이 우리더러 함께 들어가 가을 풍경이 되자고 흰 손을 흔든다. 버스는 송창식의 노래 ‘선운사’ 가락처럼 약간 느리게 흔들렸다.

백제 고승 검단 스님이 창건
인근지역에 난민·도적 들끓자
소금·숯·한지 등 제조법 전수
은덕 보답하고자 보은염 바쳐

조선시대에 6년 걸친 중창불사
260명 스님 머무는 거찰 성장

도솔암 보물 1200호 마애불에
비결 숨겨졌다는 전설 이어지다
동학혁명 때 접주 손화중이 꺼내

수좌 법만 스님 주지부임 이후
수입·지출 공개로 재정 투명화
‘수행, 복지, 문화공동체’ 표방
첫 승려노후 수행마을도 조성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맞다. 선운사 동백꽃을 보지 않았어도 바람 불어 설운 날에는 마음속의 동백꽃이 송이채 졌다. 고창 선운리에서 태어난 서정주 시인도 ‘선운사 동구’란 절창을 남겼다.

‘선운사 골째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자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동백꽃이 피지 않았으면 또 어떤가. 어제 핀 것이 지금 핀 것이고, 내일 필 것이 지금 피어있음이 아닌가. 시인이나 가객이나 선운사는 슬퍼서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다고 한다. 선운사 입구에 내렸다. 바람 불고 구름은 낮게 내려왔다. 어쩌면 ‘슬픈 날’이었다. 그런데 길을 내주며 줄지어 선 거목들이 그런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은행, 당단풍, 배롱, 편백, 벚, 팽, 삼, 비자, 느티, 고로쇠, 감, 물푸레, 보리수 나무 등이 도열하여 나그네를 선운사로 안내하고 있었다. 선운사로 가는 길은 도솔산(선운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 길을 걸으니 흡사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세상을 뜨기 1년 전(2008년 여름) 이 길을 걸으며 깊이 감동했다.

“고창 선운사를 찾았다. 목포상업학교 시절 여름방학에 찾은 적이 있었다. 그때가 그리워 들렀다. 그때처럼 가는 길에는 거목이 햇빛을 가렸다. 정적과 유현(幽玄)의 분위기가 나그네의 마음을 조용한 회고와 사색의 경지로 이끌었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시주했다.” (김대중 자서전)

▲ 선운사는 봄 동백, 여름 녹차 밭, 가을 단풍, 겨울 설경이 아름답다. 붉게 물들기 시작한 도솔산을 배경으로 대웅보전, 만세루, 지장보궁 등의 전각이 단아하게 자리 잡았다.

선운사는 봄 동백, 여름 녹차 밭, 가을 단풍, 겨울 설경이 아름답다. 머잖아 도솔산이 단풍으로 물들면 길옆 도솔천에 붉은 물이 흐를 것이다. 도솔천은 주차장에서 도솔암까지 3킬로미터 이어져 있다. 일주문을 지나 걷다보면 천왕문이 나온다. 경내에 들어서면 만세루가 우람하다. 옛날에는 스님들이 공부하던 강원이었지만 지금은 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는 속가의 사랑채 같은 공간으로 쓰인다. 만세루 앞 키 큰 감나무에 매달린 감들이 붉다. 그 아래 노스님 둘이서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그 풍경이 따스했다.

선운사는 백제 고승 검단 스님이 위덕왕 24년(577)에 창건했고, 여기에 퍽 의미 있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스님이 산세를 살피니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이 상서로웠다. 검단 스님이 용을 몰아내고 연못을 메워나갔다. 그때 아랫마을에서 눈병이 돌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연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날라다 연못 속에 던졌다. 큰 못은 금방 메워졌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였다.

당시에는 삼국이 치열하게 싸우던 때라서 마을에는 난민들이 넘쳐났고, 도적들이 들끓었다. 이에 검단 스님이 소금, 숯, 한지 만드는 법을 가르쳐 스스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다. 또한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지금도 선운사는 해마다 보은염 이운식을 거행하고 있다. 주민들이 백제시대 의상을 입고 인근 염전에서 생산한 소금을 지게에 지고, 일주문을 거쳐 대웅전으로 가져와 공양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행호 스님이 절을 크게 중창했다. 성종 3년(1472년) 선운산 한 암자에 머물며 제자 종념 스님과 함께 불사를 진행했다.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이 재물을 주며 직접 원문까지 써주었다. 선운사는 숭유억불 사회에서도 왕실의 원찰로서 법등을 환히 밝혔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든 전각이 불에 타 버렸다.

다시 일관 스님과 원준 스님이 광해군 5년(1613)부터 6년에 걸친 중창불사를 했다. 이 무렵 선운사는 수행승이 무려 260명에 이르는 거찰이었다. 조선 후기 번창할 무렵에는 산중 곳곳에 89개의 암자와 189개 요사가 서있었다고 한다. 실로 장엄한 불국토였다.

▲ 도솔암 마애불은 높이만 13m에 이른다. 사람들은 마애불을 미륵부처님으로 모시고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고창, 정읍 일대는 동학혁명의 발원지이다. 선운사 또한 혁명의 중요 거점이었을 것이다. 도솔암 옆에는 거대한 마애미륵불(보물 제1200호)이 있고, 마애불 배꼽 부위에 네모난 감실(龕室)이 있다. 그 감실에는 비결(秘訣: 반왕조적 내용 등 혁세사상을 담은 책)이 들어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부처님 배꼽 속에 들어있는 비결이 밖으로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이야기였다. 1820년 전라도 관찰사 이서구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운사 도솔암에 들렸다. 그는 백성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의 ‘무도함과 황당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감실을 열고 비결을 꺼내자 별안간 천둥 벼락이 내리쳤다. 겁에 질려 읽을 엄두도 못 내고 다시 집어넣으며 얼핏 첫머리만 보았다.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본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가 퍼지자 마애불에 대한 믿음은 단단해졌고, 민중의 호기심은 증폭되었고, 신비감은 더욱 짙어졌다.

그 후 1892년 8월 동학 접주 손화중이 마애미륵불에 올랐다. 그리고 도끼로 부처님 배꼽을 부수고 감실에서 비결을 꺼내갔다. 농민의 세상을 준비하는 무리에게 미륵불의 계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비결에 무엇이 적혀있는지, 또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다. 갑오농민전쟁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니 그 비결에 동학혁명의 실패를 예언하는 글이 적혀있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은 전봉준과 함께 처형된 농민군지도자 손화중만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그 일로 수백 명의 동학군이 관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고, 그 중 3명은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운사는 사격(寺格)에 맞게 고승대덕들을 많이 배출했다. 조선 후기 화엄학 대가 설파 스님, 선문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백파 스님,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 스님, 근대불교의 선구자 박한영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었다.

백파 스님은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등과 선문의 요지를 놓고 치열한 교리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백파 스님이 입적하자 김정희는 비문을 써서 스님의 행적을 찬했다.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라 씌여진 비문을 후세 사람들은 웅혼한 힘을 보여준 추사체의 절정이라며 찬했다. 백파 비문은 지금도 선운사의 선사상을 지키고 있다.

석전 스님은 근대불교의 선구자였다. 박한영이라는 속명으로 더 유명하다. ‘해동불교’를 창간하여 불교유신을 주장했고,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강원을 개설하여 불교계의 영재들을 길러냈다.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종단을 이끌었고, 동국대의 전신인 불교전문학교 교장을 지냈다. 한용운 최남선 정인보 오세창 이동영 등과 교유했고, 이광수 신석정 서정주 조지훈 김동리 등을 제자로 맞았다. 또한 근현대의 많은 문인들이 선운사를 소재로 글을 지었다. 선운사는 이러한 문맥과 문향을 보존하기 위해 ‘석전기념관’과 ‘선운근대문학관’을 조성할 계획이다.

선운사에는 보물들과 천연기념물이 많다. 대웅보전(제290호), 소로비로자나 삼불좌상(제1752호), 참당암 대웅전(제803호), 선운사 금동지장보살좌상(제279호),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제280호) 등이 나라의 보물이다. 경내의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ㆍ영산전ㆍ팔상전ㆍ명부전ㆍ산신각ㆍ만세루ㆍ천왕문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ㆍ당간지주ㆍ석주 등이 있다. 또 참당암 도솔암 동운암 석상암 등 네 곳의 암자가 있다.

법만 스님은 2007년 4월 주지소임을 맡았다. 20여 년 동안 선방만을 지켰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불려갔다. 법만 스님은 소임을 맡으며 어느 사찰보다 절 살림을 투명하게 해야겠다는 원을 세웠다. 우선 수입과 지출을 공개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소위 개혁승을 자처하는 스님들마저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도솔암에 들어온 시주물을 빠짐없이 기록하여 시주한 사람이 직접 열람해보도록 했다. 또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알 수 있도록 지출 장부도 비치했다. 절 돈의 흐름이 절 앞 도솔천처럼 깨끗해졌다. 그로부터 신뢰가 우러났다. 신도가 늘고 시주 또한 늘었다.

법만 스님은 ‘수행과 복지, 문화공동체 선운사’를 표방했다. 역대조사들이 일구어낸 강학(講學)과 수선(修禪)의 전통을 이어가고 사회복지와 승가복지의 토대를 만들기로 했다. 불자와 주민들이 함께 어울리는 문화도량 공동체를 구축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우선 승가지도자를 길러내는 인재불사를 시작했다. 2010년 개원한 초기불전 불학승가대학원이 그것이다. 또 자신이 정진했던 참당선원을 운수납자들의 수행공간으로 일신했다.

▲ 승려노후 수행마을에서 노스님들은 직접 텃밭과 차밭을 가꾸며 반선반농(半禪半農) 생활을 하고 있다.

선운사에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승려노후 수행마을’이 있다. 노스님들이 직접 텃밭과 차밭을 가꾸며 반선반농(半禪半農) 생활을 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해나가고 있다. 우리네 절 풍토로 스님의 노후는 그저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선운사의 스님들의 노후는 ‘일하며 증명하는 것’이다. 선운사의 노스님들은 텃밭을 가꾸며 신도들과 수행자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얘기해주는 어른이다. 개울이 흐르고, 소일거리가 있고, 멀지 않은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날마다 가장 좋은 날이다. 노스님이 사는 마을을 사람들은 선운골이라 부른다. 이를 보기 위해 통도사에서도, 천주교단에서도 사람을 보내왔다고 한다.

선운사는 고창 군내에 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다. 복지관에는 노인복지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또 앞으로는 불교회관 및 아동복지타운을 건립할 예정이다. 각종 영유아보호시설과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문화시설이 들어선다. 주민들을 위한 복지시설이지만 결국 미래 세대를 겨냥한 포교활동이다. 어쩌면 백성들을 끌어들인 검단 스님의 창건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법만 스님과 선운사 대중은 주민들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문화공동체를 차근차근 만들어가고 있다.

법만 스님에게 선운사의 사계절이 모두 좋겠지만 그래도 특별히 좋은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스님은 4월1일부터 10일까지 열흘간이라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때는 산벚꽃이 막 피기 시작할 무렵인데 온갖 새잎들이 하루하루가 아닌 시시각각으로 새 세상을 연다고 했다. 분명 같은 곳인데 돌아서서 다시 보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단다. 그것은 눈부신 광명과 환호가 산천을 뒤흔들고 있음이었다. 극락과 천당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 있음이었다.

선운사에는 동백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을과 구름도, 곱게 늙은 나무도 있고 천지인(天地人)지장보살도 계시다. 그리고 선운사에는 선운사가 있다.

김택근 본지 고문 wtk222@hanmail.net

[1266호 / 2014년 10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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