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파이의 삶, Life of Pi’
21. ‘파이의 삶, Life of Pi’
  • 정장진
  • 승인 2014.10.28 09:47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생이 던지는 무수한 고난이 감춰진 불성을 드러낸다

▲ 인도 소년과 호랑이는 작은 구명정서 7개월간 위험한 동거를 한다.

2013년 개봉한 대만 출신 이안 감독의 영화 ‘파이의 삶’에 불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반면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들은 모두 나온다. 영화 속에 유독 불교 자리만 없는 것인데, 불자들이 섭섭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가 사실은 화두로 가득 찬 불교 영화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나아가 감독이 침묵으로 일관한 채 남겨두었던 그 빈자리가 바로 불교 자리임도 알게 된다. 감독의 불교에 대한 이 고의적인 침묵은 힌두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 위의 종교가 불교임을 에둘러 말하는 화법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종교 나오는 영화 속에
유독 불교는 언급되지 않지만
작품 가득 화두 같은 메시지

난파선서 살아남은 인도 소년
호랑이와 위험한 조각배 동거

고통의 바다에 던져진 삶 비유
정신 차리게 해준 호랑이 존재
우리들 가슴 속에 자리한 불성


‘파이의 삶’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비평가들로부터도 호평을 받은 영화이니 안 본 사람이 드물 것이다. 아카데미상도 여러 개 수상했다. 하지만 잘 만든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파이의 삶’ 역시 다시 보아야 할 영화이며, 그만큼 이 영화 속에는 많은 이들이 아직 보지 못한 것들이 숨어있다.

‘파이의 삶’을 보자. 난파한 화물선에서 살아남은 인도 소년 파이와 무시무시한 벵골호랑이가 7개월 가까이 작은 구명정을 타고 태평양 해상에서 함께 표류하다가 소년만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실제로 일어난 일처럼 만들어 관객들 앞에 장장 2시간이 넘게 펼쳐놓는다. 사실, 우리 모두는 살면서 호랑이와 함께 바다에 버려지는 것 같은 유사한 경험을 한다. 이미 겪었을 수도 있고 앞으로 겪어야만 하는 이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진짜처럼 믿게 했을 것이다.

여기서 잠시, ‘파이의 삶’이 기대고 있는 서사 구조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 필요가 있다. 난파당해 무인도에 정착해서 고생을 한 다음 살아 돌아오는 이야기는 18세기 초인 1719년에 나온 다니넬 드포의 유명한 소설 ‘로빈슨 크루소우’에서부터 시작한다. 이후 수많은 모작을 비롯해 많은 유사 작품들이 뒤를 이었다. 문화사에서는 이러한 서사 장르를 ‘로빈소네이드(Robinsonade)’, 즉 ‘로빈손 이야기’라고 특정해서 부른다. 영화 ‘파이의 삶’에서도 영화 초반부에 꼬마 파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인 ‘신비의 섬’을 통해 이 영화가 로빈소네이드임을 암시한다. 쥘 베른의 모험 소설을 읽던 꼬마 파이가 사춘기를 지나 청년이 되었을 때 그의 손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 카뮈의 ‘이방인’이 들려있게 된다. 그러니까, 영화 ‘파이의 삶’은 주인공 파이가 로빈손 크루소에서 도스토옙스키를 거쳐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로 성장해 가는 영화인 셈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다수 관객들은 주인공 파이의 손에 들려있던 이 책들을 무심히 흘려보내고 말았을 것이다. 잠깐 나오기도 했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이 세 권의 책을 지적한 평론가들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영화 관객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 철학 소설인 카뮈의 ‘이방인’ 역시, ‘신비의 섬’처럼 바다와 태양을 뜻하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주인공 뫼르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 역시 영화화되어 있다. 영화를 비롯해 예술은 그리고 그 속의 종교적 메시지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늘 문화사라는 거대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그런 영화를 잘 보기 위해서도 문화사 속으로 들어가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얀 마텔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파이의 삶’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앞서 지적했듯이, 흔히 고해(苦海)로 일컬어지는 바다에 던져진, 그것도 맹수 중 맹수인 호랑이와 함께 던져진 우리의 삶에 대한 우의로 볼 수 있다. 감독은 스토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자칫 관객들이 영화의 숨은 뜻을 파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인지 친절하게도 영화가 끝나갈 때쯤 숨은 뜻을 밝힌다. “그러니까, 이야기 속 다리가 부러진 얼룩말이 그 선원이로군요…. 그리고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죽였었죠. 그러니까…, 하이에나가 요리사이고 그 선원이 얼룩말이고…, 당신 어머니가 오랑우탄인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호랑이였던 거군요….” 이런 대사를 군말 혹은 사족이라고 한다. 감독은 관객들이 문화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 눈앞의 영화마저도 이해하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제작자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 ‘파이의 삶’이 일러준 논리를 따르면, 제작자는 감독에게는 하이에나였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소설을 각색해서 영화로 만들어줄 적절한 감독을 찾는 데만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고 또 예산도 충분치 않았다고 하니 감독의 심리적 압박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감독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관객 서비스를 위해 친절하게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풀어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본 보험사 직원들을 등장시켜 배가 침몰한 원인과 난파에서 생존까지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장면을 삽입한다. 이 때 병실에 누워있던 파이는 전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리사는 짐승이었어요. 선원이 죽자 그의 시체를 미끼로 삼아 고기를 낚았어요. 쥐도 잡아먹고, 울 엄마와도 싸우다가 죽였어요. 나도 틈을 봐서 그를 죽였어요. 나도 살아남기 위해 그의 시체를 미끼로 썼어요. 내 속의 악마를 보았어요….” 마지막으로 감독이 묻는다. “당신은 어느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들어요?” 영화 속에서 파이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는 작가가 이 질문에 답한다.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가 제일 마음에 듭니다.” 파이가 다시 답한다. “그게 신과 더 잘 어울리죠.”

그러니까 영화 ‘파이의 삶’은 신의 문제를 다룬 종교 영화이고 영화 속의 인도 벵골호랑이는 신의 화신이자 표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호랑이는 어떤 신의 화신일까? 어느 종교의 표상일까? 화신, 표상, 상징은 실체가 없는 수사법의 일종으로 인간의 표현수단으로는 거머쥘 수 없는 불가사의한 신비의 전체상을 나타낼 뿐이다.

영화 속에서 일본인 보험사 직원들처럼 “보고서에 쓸 만한 간단한 이야기가 필요해요. 우리 전부가 믿을만한 이야기요”라고 다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파이의 아버지처럼 “종교 이야기는 다 거짓말이야. 과학이 이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수 있어”라고 한 쪽으로 경도된 무식한 말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주인공처럼,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사랑한다. 리차드 파커. 넌 항상 내 곁에 있을 거야”일 뿐인지도 모른다. 파이는 리차드 파커로 불리는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호랑이가 없었다면 파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낙담한 끝에 일찍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만일 호랑이가 신의 화신이자 표상이라면, 신도 사람을 정신 차리고 살게 한다는 것인가? 여기서 감독의 종교관, 신관이 드러난다. 살아 돌아와 후일 종교학 교수가 되어 밀교를 가르치는 주인공 파이는 소설가가 “믿음의 방들이 많죠?”라고 묻자, “의심의 방도 층마다 있어요. 의심이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니까요”라고 답한다. 정신 차리고 살게 하는 신도 그리고 이 신을 의심하는 회의도 모두 호랑이인 것이다.

영화 ‘파이의 삶’에서 가장 종교적 메시지를 잘 전달하고 있는 것은 로빈소네이드도, 우의적이자 교훈적 의미를 지닌 이중 서사 구조도 아니다. 오히려 3D 영상이 자아내는 놀라운 영상미이다.

자체 발광하는 별들이 반짝이는 밤바다 장면, 수천수만 마리 날치들이 날아드는 모습, 살아있는 모든 것을 녹여 버린다는 신비한 섬의 밤 호수, 돌아가신 어머니가 무지갯빛을 타고 어른거리는 장면…. 이 영상들은 사바세계를 떠난 화엄 장엄의 세계를 그대로 나타낸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영화는 이미지 예술이다. 아직도 불상을 제작하고 불화, 탱화를 그리고 범종을 주조하지만, 영화는 갈수록 첨단 테크놀로지의 온갖 기법을 동원하여 꿈과 환상의 세계를, 나아가 서방정토와 화엄 세계를 묘사하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안 감독은 이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영화의 서사 속에 섞어 놓았다. 한 마리의 호랑이가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톨릭 힌두교도이자, 힌두 이슬람교도이기도 한 파이는 원주율 3.14 파이의 무한수를 수천 자리까지 암기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우주의 한 본질인 수의 세계에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갖고 있다. 이 호기심은 호랑이의 눈에서 신의 눈빛을 읽게 하고, 예수의 성육신에 의문을 제기하고, 3300만의 신이 있다는 힌두교의 세계를 탐하게 한다. 또 파이는 연화문의 만다라 속에서 꽃 피는 우주 그 너머의 황홀경을 보게 한다. 영화 초두에 나오는 연꽃 옆을 지나치는 호랑이의 그림자, 이것이 화두일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했던.

▲ 영화 ‘파이의 삶’에서 영상미로 구현한 바다는 꿈과 환상, 화엄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가슴 속에 호랑이를 한 마리씩 키우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호랑이는 난파를 당했을 때처럼 큰 위기를 맞았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 쪽배가 해안가에 도착했을 때 마치 자신의 임무를 끝냈다는 듯이 호랑이는 우리를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는 오직 자신만이 키울 수 있는 호랑이가 있다. 잘 키워야 한다. 모두의 가슴 속에 있는 이 불성(佛性), 이 호랑이가 영화 ‘파이의 삶’의 마지막 화두일 것이다. 서양인들이나 서구문명에 익숙해져 버린 현대인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든 화두임에 틀림없다.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67호 / 2014년 10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불자 2014-11-02 14:19:49
나는 행복한 사람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때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부처님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부처님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