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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불성관

불성, 모든 중생 마음에 깃든 부처님 덕성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비교하는데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불성(佛性)이다. 초기든 대승이든 불성에 대해 약간의 오해를 가지고 있다. 불성을 진아론(眞我論)이나 유아론(有我論)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초기불교에서는 불성을 인도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은 아트만의 변용으로 알고 있기도 하고 대승불교에서도 불성을 영원불변하는 실체개념으로서 진아(眞我) 혹은 절대적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이는 불성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생긴 무지의 결과다.

초기불교는 불성 개념 없고
중생도 무명으로부터 연기

대승불교 교리 토대는 불성
무명과 번뇌의 뿌리도 불성

진아·참나·주인공 용어들은
무언가 있다는 착각 일으켜

불성이라는 용어는 대승경전에만 등장한다. 초기경전 ‘니까야’에는 불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볼수 없다. 불성이란 부처의 성품 혹은 부처의 마음이라는 의미로 모든 중생들의 마음에 깃든 본래의 청정한 깨달은 마음이다. 만약 대승불교에서 불성의 교리가 배제된다면 대승불교의 교리기반은 무너지고 말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라는 말 외에도 여래장(如來藏), 진여심(眞如心), 마하반야(摩訶般若) 원각(圓覺) 묘정명심((妙淨明心), 진심(眞心) 등의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표현만 다를 뿐 의미는 같다. 대승불교에 따르면 중생의 마음은 본성에 있어서 부처와 조금도 차별이 없다. 나타나는 바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이라도 그 속에는 부처가 성취한 깨달음과 열반과 해탈의 공덕이 깃들어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에서는 삼보(三寶)에 대한 믿음 외에 불성에 대한 신심을 일으킬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마음속에 불성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으로 수행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대승불교의 불성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불성이란 용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초기불교는 중생심 외에 어떤 특별한 의식이나 성질에 대해 설하지 않는다. 더구나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를 근거로 중생의 구조를 설명하고 있는 초기불교의 교리에서 중생들에게 부처와 동일한 덕성을 갖춘 불성이 존재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중생의 의식구조를 초기불교처럼 무명과 번뇌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광명과 각성의 성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중생이 연기하는 과정도 무명을 시작으로 하는 업감연기(業感緣起)가 아닌 불성을 시작으로 하는 진여연기(眞如緣起)를 설한다. 무명 역시 본래는 불성으로부터 일어났다고 보는 연기가 진여연기이다. 그렇다면 불성은 과연 아트만이나 진아 혹은 유아의 성질을 지닌 존재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불성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다. 불성은 무명이 사라진 마음의 본래 성질일 뿐이다. 물이 오염돼 흐려지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도 본래의 성질은 맑고 고요하듯 불성은 무명을 떠난 특별한 마음이 아닌 무명과 번뇌가 지니고 있는 본래 성질을 뜻한다. 대승불교에서도 초기불교처럼 마음도 모두 연기된 존재로 본다. 전오식(前五識)에서 제팔아뢰야식(第八阿賴耶識)에 이르기까지 중생의 모든 의식은 연기에 따른 것이다.

▲ 그림=최병용 화백

모든 마음은 홀로 일어나거나 스스로 있을 수 없고 오로지 근(根)과 경(境) 즉,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지되는 대상의 조건을 통해서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는 마음에 독자성이 없고 실체성이 없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마음은 번뇌에 의해 더럽혀지는 성질과 반대로 번뇌가 정화되어 청정해지는 성질을 안고 있다. 스스로에 대해 마음에 자성이 있다거나 아(我)가 있다고 여기면 번뇌의 마음이 되고 자성이 없고 아가 없다고 깨달으면 청정해져 부처가 되는 것이다.

대승불교의 마음에 대한 이런 시각이 비단 대승불교의 가르침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무명을 중심으로 중생의 마음을 설명하고 있는 초기불교에서도 마음의 본성에 대해 소극적이지만 청정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디가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중생의 의식은 빛나는 것이다. 참으로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갖가지 번뇌에 의해 덮여 있구나”라고 했다. 이는 중생의 마음이 꼭 번뇌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본래는 청정한 성질을 지니고 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대승불교의 불성사상이 나오기 전 초기불교에도 심성본정(心性本淨)사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접하다보면 그 속의 내용들이 대승불교의 독창적 사상이라기보다는 초기불교 안에 들어있던 가르침들을 적극적으로 발현 확대시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불성이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아트만의 변용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에 따라서는 불성에 대해 자세히 설하고 있는 ‘대승열반경’의 내용을 들어 불성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했으니 결국 아(我)가 아니냐고 반문하겠지만 이때의 아는 유무의 이변을 떠난 중도실상의 아지 분별하는 실체로써의 아가 아니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중생들 가운데에 이런 잘못된 견해를 짓는 것을 염려하여 불성과 열반의 상락아정에 대해 아무에게나 함부로 알려주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불성과 열반에 대해 부처님이 혹 아(我)라는 용어를 붙여 설명하더라도 외도들이 말하는 아가 아니며 이를 잘못 알면 불성을 실체로 여겨 부처님이 뜻하는 바가 크게 왜곡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 수행자들 중에 툭하면 참나를 찾으라고 외치는 분들이 많은데 과연 이런 언어를 함부로 사용해도 되는지 묻고 싶다. 불교경전 안에는 진아니 참나니 주인자리니 하는 용어들을 찾아 볼 수 없다. 선가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의 소식이라거나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주인공(主人公)등도 잘못하면 유론에 빠지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용어들이다. 이들 용어들이 불성의 다른 말이고 의단(疑端)을 이루게 하는 긴요한 수행방편이기는 하다. 하지만 근기가 성숙하지 못한 중생들에게는 불교가 마치 태어나기 이전의 자기모습이나 알고 우주생성 이전의 비밀이나 깨닫는 공부로 여겨질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가운데 주인공이라는 용어는 불성의 의미를 왜곡시키는데 가장 위험성이 많은 표현이다. 마치 중생의 오온 속에 몸과 마음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어떤 특별한 또 다른 실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여기게 하는 이름으로 외도견(外道見)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중생들에게는 몸과 마음만이 있을 뿐 몸과 마음의 근원이 되는 어떤 지배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이 일체법의 주체가 되기는 하지만 마음 역시 근(根)과 경(境)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고 움직인다.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고 마음이 없으면 몸도 없다. 몸과 마음은 서로 조건 지어진 관계로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 따위는 없는 것이다. 불성을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사용하는 것이야 말로 불성에 대한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제열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67호 / 2014년 10월 2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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