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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의례위원장 인묵 스님

“천천히 정성을 다해라, 청정심 담은 하늘소리다”

▲ 연못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잉어를 따라가기만 해도 소리가 나올 법한 인묵 스님이다. 봉선사 제공

‘선사는 범패를 잘 불렀다. 옥을 굴리는 듯한 음조와 상쾌하고 애환 깃든 목소리는 능히 하늘을 환희, 감동케하고 인간의 감정을 오랫동안 부드럽게 하여 천인일체(天人一體)를 이루게 하면서 은은히 울렸다. 마침내 이를 듣고 배우는 자가 항상 당(堂) 안을 꽉 메웠다.’

산사에 울린 범패 소리에
가슴 뭉클해 14세에 출가

어산작법 초대학교장 맡아
15년간 260명 후학 양성

아버지 일응 스님 가르침
“풍각쟁이는 되지 말아라”

의례 속 의미 이해한다면
의식의 숭고함 더해질 것

30명 기숙·교육시설에서
선생 노릇하다 가고 싶어

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짓고 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의 한 대목이다. 중국 유학길 범패를 배운 진감선사는 귀국 후 쌍계사 전신 옥천사에서 머무르며 후학들에게 소리를 전했다.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 영산재 기능보유자였던 일응 스님은 작법무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그 일응 스님 또한 ‘천상에 내려온’ 듯한 소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1960년대를 전후한 범패는 서울을 중심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개운사, 봉국사 등을 중심으로 한 동교(東敎)와 봉원사, 진관사, 흥국사, 백련사를 중심으로 한 서교(西敎)가 두 축을 이루고 있었다. 개운사 우운 스님 문하서 소리를 배웠던 일응 스님은 동교의 봉원사 월하 스님 문하에서도 소리를 배워 득음의 경지에 올랐다.

▲ 조계종 어산작법 교육이 펼쳐지고 있는 서울 안암동 보타사 대원암 전경.

개운사 옆 보타사 대원암. 탄허 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하고, 운허 스님이 석전 한영 스님을 모시고 공부했던 그 도량이다. 조계종 어산작법 교육도 이 도량에서 이뤄지고 있다. 툇마루에 늦가을 석양이 내려앉았다. 어쩌면 어산작법학장을 지낸 조계종 의례위원장 인묵 스님도 이 마루에 앉아 아버지 일응 스님의 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유년의 기억을 되살린 인묵 스님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어렸을 적 절집 툇마루에 앉아 범패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전율과 환희가 온몸을 휘감곤 했다. 범패소리가 봄날 햇살에 섞여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을 때도 나는 하염없이 그 소리에 취해 있었고, 늦은 가을 황혼녘 낙엽 수북이 쌓인 뒷마당에 서서도 가슴을 적시며 오래도록 그 소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어이 아에 히에 야에 히에 야으아 어 으어 어어 으어…. 영혼을 울리는 저 깊고도 그윽하며 맑고도 평화로운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정우서적 출간 ‘영산에 꽃피다’ 인용)

일응 스님이 먼 길을 떠나면 대원암에 앉아 있다가도 조계사와 홍은동 백련사, 왕십리 안정사를 한 걸음에 달려갔다. 어려서부터 일응 스님 손을 잡고 가 보았던 그 도량에서도 소리가 울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소리를 좇아간 소년! 어쩌면 소리가 소년을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개운사와 대원암을 찾곤 했던 전주 남고사 주지 송월 스님이 이 소년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넌, 소리가 그리 좋으냐?”

“예!”

“머리를 깎겠느냐?”

“예!”

1971년 14세의 소년은 남고사로 가 삭발했다. 1년여의 행자여정을 마친 그는 대원암으로 돌아와 수계를 받았다. 일응 스님이 물었다.

“어디로 가겠느냐? 소리를 배우고 싶다면 봉원사로 보낼 것이고, 경을 보고 싶다면 봉선사로 보내 주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리를 한다 해도 부처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제대로 할 수 있다.”

일응 스님은 열다섯 살 사미 손을 잡고 봉선사로 가 월운 스님에게 맡겼고, 월운 스님 또한 한 눈에 재목임을 알아보았다. 조계종 어산작법학교장과 봉선사 주지를 역임한 조계종 의례위원장 인묵 스님과 봉선사 조실 월운 스님과의 사제인연은 그렇게 맺어졌다.

우선 한국불교 의식의례 발전가능성을 여쭈어 보았다.

“승가대학에서는 상용의례가 정규과목으로 채택되었고 의식 한글화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국불교 의식의례 미래는 밝다고 봅니다.”

2011년 10월, 조계종은 종단 차원에서 준비한 ‘한글반야심경’을 세상에 내놓았다. 교계 대표 경전의 한글화는 다른 경전의 한글화는 물론 의식집전 또한 우리말로 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2013년 표준화된 ‘한글천수경’이 나왔다. 그 중심에 조계종 의례위원장 인묵 스님이 있다.

“천수경을 ‘복 주는 주문’으로만 알고 있는 불자님들도 있습니다. 의식을 집전하는 사람이나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나, 그 의식에 깃든 의미를 명확히 알아 상호 소통 속에서 의식이 진행된다면 의식의 숭고함도 더할 수 있습니다.”

불공이나 천도재, 다비의식문도 한글로 옮겨 놓을 것이라고 한다. 한문경전이나 의식문보다 범패는 더 어렵게 느껴진다. ‘천상의 소리’라 하지만 서양 클래식을 듣는 것보다 더 지루할 때가 있다. 혹, 신촌 봉원사에서 봉행되는 영산재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능히 짐작할 법하다.

“큰 물고기가 연못에서 노닙니다. 유유히 유영하다가 꼬리를 한 두 번 치고는 옆으로 갔다가 이내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여운과 역동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범패의 짓소리가 이와 같습니다. 장중하지요. 작은 물고기가 연못에서 노닙니다. 좌우상하 방향전환 속도가 빠릅니다. 굴곡의 변화가 심하지요. 범패의 홑소리가 이와 같습니다. 경쾌합니다.”

단순명료한 해설이 탁월하다. 소리가 그려진다!

▲ 수륙대재에서 인묵 스님이 ‘하늘의 소리’로 도량을 장엄하고 있다. 윤성수 사진작가 제공

위(魏)나라의 조식(조조의 아들)이 천석(泉石)이 깊고 아름다운 어산(魚山)수도장에서 산책(경을 읽는 중이였다는 설도 있음)하는데 홀연 공중에서 하늘의 소리(梵天聲)가 들려왔다. 맑으면서도 애잔한 그 곡조를 따라 범패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이와 더불어 산 속의 호수에 노니는 고기의 모습에 착안해 범패 곡조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범패를 ‘어산의 묘(魚山之妙)’라고 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2003년 국립극장 무대에 올린 ‘한여름 밤 보리수 아래에서 부르는 범패소리’에서 인묵 스님은 고기가 호수에서 노니는 영상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천상의 소리를 들려줘 큰 호응을 받은 바 있다. 불교정수의 하나인 범패를 대중의 품에 전해보려는 스님의 마음이 읽힌다.

인묵 스님은 지난해 3월 어산작법학교 학장소임을 내려놓았다. 1997년 어산작법학교로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초대학장을 맡았으니 15년 동안 후학양성에 매진한 셈이다. 이 학교를 졸업한 인재만도 260명. 세납을 고려하면 아직 현장지휘를 하고도 남을 법한데 퇴임을 결심한 연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리를 비워줘야 합니다. 새 인재가 좌장을 맡아 새로운 청사진을 펼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노를 저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재도약은 변화라는 발판을 힘차게 구를 때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인묵 스님이 현장을 완전히 떠난 건 아니다. 지금도 제자들과 마주 앉아 북을 치며 소리를 다듬고 있다. 의례의식을 배우겠다며 대원암 찾는 후학을 보면 지금도 가슴 뭉클하다는 인묵 스님이다. 지하공간에서 교육했던 지난날의 힘겨움도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는가 보다.

어산작법학교의 전신은 어산성악학원이다. 처음엔 학생들을 가르칠 공간도 없었다. 개운사 중앙승가대학 지하,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 동아리방 옆에서 교육해야 했다. 그나마 좋은(?) 공간을 발견했다며 이전한 게 현재 대원암 옆 고려대장경연구소가 있는 비구니기숙사 지하였다. 종단의 관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중앙승가대가 김포로 이전할 당시엔 이미 어산작법학교가 중앙승가대 부설에서 종립 특수교육기관으로 전환(2002년)돼 독립기관으로 서 있을 때다. 굳이 김포로 가야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인묵 스님은 2005년 학교를 대원암으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일언이 있을 듯 싶어 여쭤보았더니 “풍각쟁이는 되지 말라”고 한다. 인묵 스님은 봉선사에서 교학을 공부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일응 스님 곁에서 소리를 배웠다. 일응 스님이 허공에 소리를 던지면 제자들은 그 곡조를 그대로 소리내야 했다. 함께 공부한 도반 두 명이 있는데 동파 스님(입적)은 30여번 해봐야 비슷하게 소리를 냈고, 현 봉선사 주지 정수 스님은 10여번 해야 했지만, 인묵 스님은 두세번이면 됐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들은 소리의 영향도 컸겠지만 일응 스님의 ‘예기’를 그대로 물려받은 듯하다. 범패를 본격적으로 공부하던 초기 때 일응 스님이 인묵 스님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풍각쟁이는 되지 마라. 천천히 소리 내고 천천히 발을 들어도 부처님께 올리는 찬탄공양을 다 할 수 있다.’

“경망스러운 소리(범패)나 몸짓(작법 무용)을 하지 말라는 말씀인데 실은 잿밥에 눈 돌리지 말라는 경책입니다. 시간을 아껴야만 한다면 내용을 줄이라는 말씀 또한 맥을 같이 합니다.”

범패나 작법은 불교무형문화재 중에서도 정수다. 필요 이상의 ‘재물’에 끄달리는 순간 ‘정수’가 사라진다는 걸 일응 스님은 간파했고, 인묵 스님 또한 인지하고 있음이다. 인묵 스님은 장아함의 ‘사니나경’에 설해져 있다는 범패의 의미를 전했다.

“범패(梵唄)의 ‘범’에는 ‘청정’이 스며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범음범성(梵音梵聲)에는 다섯 가지의 청정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바르고 곧은 것’이고, ‘부드럽고 고상한 것’이며 ‘맑고 트인 것’입니다. 또한  ‘깊고 그윽한 것’이며 ‘두루 퍼져 멀리 들리는 것’입니다.”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면 범패의 의미는 그만큼 퇴색된다는 뜻이다. 인묵 스님도 처음엔 범패에 담긴 수행의 의미를 제대로 꿰뚫지 못했다고 한다. 수행은 선방이나 염불원에서 따로 해야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게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40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일상에서의 언행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번잡하면 소리가 제대로 안 납니다. 소리를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소리 또한 일념으로 할 때 순일무잡의 소리가 나오고, 이 때는 저 역시 환희심에 젖습니다. 번뇌마저도 이 소리에 묻힙니다.”

연못 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잉어를 따라가기만 해도 소리가 나올 법한 인묵 스님이다. 그런 스님도 바람이 있다. 범음, 작법에 매진하려는 후학을 위한 전문공간을 갖고 싶어 한다. 30명 정도의 인재들이 기숙하며 공부할 수 있는 공간, 즉 기숙사와 강의실이 한 공안에 자리한 그런 도량(건물)이 있다면 그 곳에서 ‘선생노릇’하다 가고 싶다 한다.

맑으면서도 그윽한 스님의 눈에 그 간절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원력을 세우면 인연이 닿는다’ 했다. 불교문화의 정수 영산재를 보존하려는 불자들의 마음이 닿기를 기대해 본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269호 / 2014년 11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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