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2. 무엇이 크고 작은가

기자명 혜국 스님

“우주에서 보면 지구도 점에 불과…크다 작다는 분별망상”

▲ 중국 둔황의 막고굴 입구. 막고굴은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불교가 둔황에서 꽃피운 세계적인 불교문화유산이다.

“극소동대(極小同大)하야 망절경계(忘絶境界)하고,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가 모두 끊어진다.”

상대적인 것이 사라지면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방이니 큰 방이니 하는 차이가 나는 것은 순전히 벽하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벽 하나만 허물면 큰방이다, 작은 방이다 하는 이름 자체가 없게 됩니다. 벽이란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잠깐 동안 설치해 놓은 가설물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벽’이란 우리들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벽’이란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환영(幻影)이라는 의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모든 설명이 경계(境界)를 인정하고 경계에 속을 때만 성립되는 ‘알음알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이 끊어지면 경계가 사라지고 경계가 없어지면 이런 설명이 모두 군더더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큰방이니 작은방이니 하는 차이
순전히 벽으로 분할했기 때문
벽 하나 허물면 차이도 사라져

그런 관점에서 볼때 ‘벽’이란
생각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

진리와 이치 이러하기 때문에
몰록 자신의 생각만 비운다면
크다 작다는 일체 경계도 없어

그래서 옛 어른들은 이런 말을 ‘사족’이라고 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뱀의 발을 그려 넣어서 그르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 몰록 비워 버리면 크다, 작다하는 분별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 속에서 생각을 떠난 세계는 모양 안에서 모양을 떠나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이기에 양변(兩邊)을 초월하게 되고 중도(中道)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있기에 부처도 있고 신(神)이 있게 되는 것이지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고 신(神)도 없게 됩니다. 내가 신이 필요하다면 신은 내가 필요한 줄 알아야 합니다. 신은 받들어야 하는 내가 없으면 굶어 죽습니다. 왜냐하면 신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 지을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살아있는 부처가 되고 살아있는 신이 되는 겁니다. 활발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이 되는 것이지요. 거듭 사족을 붙이자면 나니, 너니 구별하는 벽이 있을 때 크다, 작다, 안이다, 밖이다 하는 이름도 생겨납니다. 벽을 허물어 버리고 텅빈 허공에서 어떻게 크다, 작다고 할 것이며 안과 밖을 구분하겠습니까? 결국 망절경계(忘絶境界)란 벽을 허물어 버린 본래 벽이 없는 상태인 겁니다. 그 벽을 쌓는 것도 나요, 벽을 허무는 것도 나 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있는 벽을 허물어서 없애는 게 아니고 본래 벽이 없다는 한 소식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벽속에서 벽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니 벽은 벽대로 두고 안도 인정하고 밖도 인정하고 하나가 되어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는 자리가 바로 망절경계(忘絶境界)인 겁니다. 이러한 사실을 불교에서는 선(禪)이라고 하고 수처작주(隨處作主)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란 임제 스님 말씀인데, 가는 곳 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자리가 모두 부처가 되어 진리 아닌 게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참으로 귀하고 귀한 말씀이 아닌가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지심(至心)으로 새겨들어야 할 가르침입니다. 내가 본래 주인이라는 의미로, 항상 새겨야 할 진언입니다. 그럼에도 범부는 본래 주인임을 망각하고 번뇌 망상을 따라 다니느라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업(業)이 되어 그 업(業)이 끊임없이 생사윤회하고 있는 겁니다. 업(業)은 태양광명 속에, 태양에 등을 돌린 어두움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한 생각 뒤로 하면 어두움이고 한 생각 앞으로 돌리면 그대로 광명인 것이지요. 실상이 이렇게도 분명하건만 주인이면서 주인노릇 못 하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극대동소(極大同小)하야 불견변표(不見邊表)라, 극대동소(極大同小)하야 극대동소(極大同小)와는 다른 말입니다만 사람들이 큰 것을 구하는 동안은 큰 것은 없습니다. 큰 것은 한정 없이 늘어가니까요.”

끝없이 큰 것, 큰 것 이후 더 큰 것이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큰 것을 구하는 그 마음을 쉴 때만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극히 크다는 것은 생각이 끊어졌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끝과 겉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크다, 작다 분별하는 것은 우리들이 한 생각 일으키는 생멸심(生滅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러한 생각에 빠져 있으면 그 또한 단멸상(斷滅相)이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기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그 은행나무가 환영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또한 크다, 작다 하는 분별입니다. 그렇게 되면 은행나무가 자라나는 것도 연기법(緣起法)이니까요. 환영인줄 아는 자(者)와 하나가 되어서 돌아가는 연기공성(緣起空性)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단멸상(斷滅相)에 빠지는 어리석음이 되는 겁니다. 은행나무라는 상(相)을 보면서 상(相)과 상(相) 아님이 둘이 아닌 사실을 바로 볼때만이 불견변표(不見邊表) 즉, 끝과 겉이 없다는 소식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若見諸相) 비상 즉견여래(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겁니다. 인도나 중국, 미국을 가보면 넓은 땅이 무척이나 부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땅 덩어리는 너무 좁다고 하고 인도나 중국, 미국은 넓다고 하지만 달나라에서 찍어 보낸 사진이나 아니면 저 너머 우주에서 보면 넓다느니 좁다느니 하는 그 모든 나라들을 합쳐봐야 콩알보다도 더 작은 한 점에 불과합니다. 수십 개가 달린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크다, 작다 하지만 그 뿌리는 같은 한그루 사과나무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큰 소리가 나오는 소리기관이나 작은 소리가 나오는 기관이나 같은 한 구멍이니 크다, 작다 하는 분별에 너무 많이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먹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늙었다거나 젊었다거나 하는 것은 겉모습일 뿐 젊음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나 늙은 몸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나 어차피 같은 사람입니다. 7~80세 노인이 젊은이보다 더 젊은 생각을 할 수 있고 4~50세 젊은이도 7~80세 노인의 생각일 수 있듯이 나이 자체에는 늙고 젊음이 없으니 끝과 겉이 없을 수밖에요. 그래서 학능나 스님께서는 “심수만경전(心隨萬境轉) 전처실능유(轉處實能幽) 수류인득성(隨流認得性) 무희역무우(無喜亦無憂)라, 마음은 모든 경계를 따라서 일어나는데 일어나는 그 자리가 바로 그윽하나니 그 흐름에 따라 근원을 깨달으면 기쁨도 슬픔도 사라지는구나”라고 일러주신 겁니다.

그 다음은“유즉시무(有卽是無)요 무즉시유(無卽是有)니 즉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고 이어집니다.

“스승이 죽비를 손에 들고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겠느냐? 죽비라고 하면 착(着)이요, 죽비 아니라고 하면 등진다”고 이르셨습니다. 스승들은 이와 같이 항상 근본만을 보여 주셨습니다. 생각이 남아있는 한 생사윤회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물론 목석같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는 더욱 더 아닙니다.

여기 질 좋은 담배가 한 갑 놓여 있다고 합시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은 그 담배를 보는 순간 바로 담배에 대한 생각을 일으킵니다. 어느 나라 담배인지 그 맛은 어떤지, 더 나아가서 한 개비를 꺼내 피워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담배를 당초 피우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생각 저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눈앞에 있는 사물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결국 한 생각 일으키는 원인은 그 동안 익혀온 습관인 업(業)입니다. 이와 같이 모양 속에서 모양을 떠날 때 있다와 없다는 둘이 아닙니다. 그 뿐 아니라 담배라는 모양이 있든지 없든지, 그 사람에게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있다, 없다 하는 현상계(現想界)를 판단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있을 때 있다, 없다 라는 세계가 존재 할 수 있지 만약 판단하는 내가 없으면 크다, 작다, 있다, 없다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을에 피어있는 쑥부쟁이, 들국화 한 송이에도 우주가 다 깃들어 있고 아름드리 느티나무에도 꼭 같은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현상계를 보고 내 생각대로 되기를 바란다면 있고 없음이 생기고 반대로 내가 현상계를 따르면 크고 작음이 없이 평등합니다. 겨울이 왔을 때 겨울이란 계절에게 춥지 말라고 하면서 나에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라고 한다면 추위가 존재하게 되고 내가 겨울에 맞추어 옷을 껴입고 난방을 하면 추위는 없어지게 됩니다. 내가 계절을 따르면 바로 여여(如如)요, 계절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면 거슬림이 됩니다.

유마거사가 어렸을 적 경(經)을 볼 때 “조그만 방에 삼천대천세계를 옮겨 놓았다”는 글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신통력이라는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신통력이 아니요, 실상(實相) 그대로요, 있는 그대로인데 우리가 육안으로 보기 때문에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좀 다른 비유이기는 하지만 CD 한장에 수백 수천의 장서(長書)가 들어가고 손톱만한 칩 하나에 팔만대장경이 다 들어가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요점은 그 끝과 겉을 볼 수 없는 세계, 망절경계(忘絶境界) 즉 생각이 끊어진 세계를 직접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간화선 즉 화두참선을 할 때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느냐 움직여 다닐 때 일여(一如)가 되느냐, 다시 말해서 현상계(現象界)와 하나가 되느냐”하는 문제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를 갖고 점검했던 겁니다. 꿈속에서 화두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점검하는 방법이 몽중일여(夢中一如)이며 깊은 잠속에서 화두가 여일하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오매일여(寤寐一如)입니다. 이렇게 하는 공부점검은 그야말로 수행과 삶이 하나가 되었느냐를 점검해 보는 것인데 더 없이 좋은 방법입니다. 선방에 앉아서 열심히 참선하는 것은 일상생활 즉 현상계와 하나가 되기 위함입니다. 동정일여가 되기 위함입니다. 물론 무심삼매(無心三昧)에 들어가면 동정일여니 몽중일여니 하는 것을 거치지 않고도 현상계 속에서 현상계를 초월하는 도리를 깨닫고 현상계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이라고 하신 겁니다.

[1271호 / 2014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