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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관(空觀)

방편과 진리 어느 쪽으로 보냐에 교설 달라져

불교에 관한 지식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인상 깊은 불교의 교리를 물어보면 대부분 공(空)이라고 말할 것이다. 공은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차별되는 불교를 대표하는 가르침이다. 불교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구절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공은 보편적인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의 의미를 물어보면 이에 대해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불교를 상당히 공부했다는 사람들도 공을 빈 공간이나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원리로 오해하기도 한다. 더러는 공을 과학적 입장에서 풀이한다며 물질과 현상의 근원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다. 공을 과학적으로 이해한다는 사람들은 만물은 유무(有無) 이전의 공으로부터 탄생하였고 다시 공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만물은 변하지만 만물의 근본원리인 공은 절대 불변하다는 설명도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나 공에 대한 이런 설명은 공을 크게 왜곡시키는 것이다. 공을 중국 사상인 음양 이전의 도(道)의 원리로 착각하고 있는 셈이다.

상당수 사람들 ‘공’ 오해
‘빈 공간’이나 ‘무’와 달라

초기는 공과 공 아님을
상호대립의 관계로 설명

대승은 공과 공 아님 모두
공으로 본질은 같다 설명

‘반야심경’에서 설하고 있는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의 교리는 중생의 번뇌와 번뇌의 소멸에 방점을 두고 있다. 이는 중생들이 일상 가운데에서 먹어야 하는 네 종류의 음식인 사식(四食) 즉 단식(段食)·촉식(觸食)·사식(思食) 식식(識食)에 따른 번뇌의 생멸과 증장 그리고 오염의 견해를 바로 잡기 위함이다. 공으로 관찰한다면 중생들이 사식을 통해 일으키는 번뇌의 생멸(生滅)이나 증감(增減) 그리고 구정(垢淨)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공을 엉뚱하게 과학에 접목한다하여 우주의 탄생원리나 물질의 성립원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그림=최병용 화백

그러나 공의 교리를 설명하는데 있어 역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방향과 차원을 달리한다. 초기불교는 공을 대승불교처럼 강조하지는 않는다. 니까야 경전에서 공을 설하고 있기는 하지만 많이 설해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이나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깨닫는 것으로 목적을 삼지 않고 공을 깨닫는 것으로 목적을 삼는다. 그래서 경전에는 공이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등장한다. 초기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공의 내용을 살펴보면 의미가 매우 다양하다. 경전 맛지마 니까야 ‘소공경(小空經)’에서는 공을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앉아 있는 미가라마따라는 강당에 코끼리·소·말·남자·금·은 등의 세속적인 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자들의 마음 가운데에 이들이 공하다고 말한다. 대신 수행자들이 앉아 있는 강당에서 보이는 숲은 수행자들에 의해 지각이 되므로 공이 아닌 불공(不空)이다.

또 수행자가 삼매를 닦는 도중에 나타나는 과정들에 맞춰 공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수행자가 삼매를 닦다가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었다면 공무변처는 존재하기 때문에 공이 아닌 불공이다. 그렇지만 수행자가 공무변처를 떠나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었다면 공무변처는 공이 된다. 따라서 수행자가 높은 차원의 경지에 들려면 현재에 얻어진 경지는 공으로 버려져야 한다. 공을 제법의 실상으로 설명한다. 초기경전에서는 자아와 자아에 속한 것은 모두 공하며 세계 또한 공하다고 가르친다. 자아와 일체의 세계를 공으로 관찰할 때에 죽음을 초월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초기불교는 대승불교처럼 공을 무아(無我)나 연기(緣起)의 동일개념으로 쓰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당연히 무아와 연기와 공의 개념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나 공이 무아나 연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무아는 공의 토대가 되는 것이지 공이 곧 무아라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초기불교의 공관(空觀)에 비해 대승은 공을 대단히 확장시켜 설명한다. 우선 대승불교에서는 공을 여기에 있는 불공의 반대개념으로써 보지 않고 불공 그대로를 공으로 규정한다. 위의 예를 들어 미가라마따라고 하는 강당에 코끼리·소·말·남자·여자·금·은 따위가 존재하고 있더라도 그들이 모두 공하다고 가르친다. 또한 수행자들에 의해 지각되어진 숲의 내용도 공하다고 본다. 그리고 혹 삼매에 들어 공무변처나 식무변처를 얻었다면 공무변처건 식무변처건 그 자체가 공한 것으로 여긴다. 공에서 불공으로, 불공에서 공으로 나아가는 방식이 아닌 불공 그대로가 공임을 깨달아 높고 낮은 차원의 단계가 본래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공과 불공을 대립관계로 보는 초기불교와 달리 대승불교는 불공과 공에 차별이 없다. 다음으로 대승불교는 공을 무아와 연기를 차이 없이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기는 곧 공이고 공은 곧 무아이다. 붓다고사의 경우 무아에 대한 명상과 공에 대한 명상은 문자만 다를 뿐 의미는 같다고 했다. 대승불교에서 무아라는 말이나 아공(我空)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이며 법무아(法無我)라는 말이나 법공(法空)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다. 특히 대승불교의 공이 초기불교의 공과 다른 점은 방금 나온 법공을 설한다는데 있다. 법공은 자아라고 여기는 오온(五蘊)만 공한 것이 아니라 대상세계를 비롯한 모든 존재가 함께 공했다는 의미로 설명한다.

그러나 보다 핵심적인 것은 법공은 일체의 법이 공했다는 의미만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증득해서 확인한 초기불교의 법성들 또한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데 있다. 오온만 공한 것이 아니고 오온에 깃들여진 법칙들 예컨대 무상이니 무아니 고니 하는 등의 법인(法印)들도 함께 공하다고 여긴다. ‘금강경’에서 실로 어떤 법도 얻은바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고 한 말은 부처님이 발견한 법칙이나 진리 또한 실체가 없는 공임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의 공은 중생 개개인의 무아성과 대상 세계의 무아성과의 법칙 또한 무아라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 부처님이 깨달아 확인하신 초기불교의 핵심교설들이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실체가 없는 공한 것으로 정해진 진리로 못 밖을 수 없다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주장하는 법공이다. 대승불교가 일체개공(一切개空)을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아와 세계는 연기되었고 연기된 자아와 세계는 모두 무아이며 무아이므로 공이고 공이므로 어떤 법칙도 정해질 수 없다는 것이 대승불교의 입장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자아와 세계를 공으로 자각하라고는 가르친다. 그러나 공의 자각을 통해 얻어진 내용들, 즉 무상의 이치·무아의 이치·고의 이치 등 또한 공하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무한정 공관(空觀)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와 기본적 차이가 있는 것이다.

법림법회 법사  yoomalee@hanmail.net

[1271호 / 2014년 11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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