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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리틀 부다(Little Buddha)’

기자명 정장진

1990년대 서구 문명 색안경에 비친 부처님 탄생 이야기

‘리틀 부다’는 1993년에 개봉된 영화이니 참 오래 전 영화다. 하지만 언제 봐도 느낌이 새롭다. 이 새로운 느낌에는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심미안과 철학적 깊이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청나라 광서제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다가 만주국 꼭두각시 황제가 된 ‘마지막 황제(1987)’와 지중해에 자리 잡은 북아프리카의 모로코 탕헤르를 중심으로 사랑을 이야기한 ‘마지막 사랑(The Sheltering Sky, 1990)’을 기억하는 이들은, 베르톨루치가 동양을 다룬 세 번째 영화라는 점에서도 ‘리틀 부다’를 흥미롭게 봤을 것이다. 또 영화에서 싯다르타 역을 맡은 키아누 리브스도 영화가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데 한 몫을 했다. ‘매트릭스’를 비롯해 유난히 종교적 주제를 다룬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가 키아누 리브스 아닌가. 영화이기에 종교적 주제를, 그것도 동양 종교의 핵심을 이루는 불교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해도, 감독이나 배우 나아가 특수효과 같은 영화 특유의 제작 방식과 장치들을 몰라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양 정신문화 정수 불교 접근
티베트 라마 환생 이야기 다뤄
계승자 셋 중 금발 미국 아이도

마왕 유혹 물리쳤던 싯다르타
CG로 영상에 담아 억지스러워
마리아의 예수 임신과 비슷해
불교·기독교 오가는 관점 한계

한편 이 영화는 불교가 서양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연구 자료로서 의미도 지니고 있다. 베르톨루치의 동양을 다룬 다른 영화와는 달리 ‘리틀 부다’는 보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다룸으로써 동양 정신사의 핵심에 다가가려는 지적 야심의 결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베르톨루치는 영화 곳곳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불교와 기독교, 부처님과 예수님을 비교하려고 한다(철학과 종교를 다루는 영화들이 상업적 목적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늘 의심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이 의심이 언제나 정당한 것만은 아니다. ‘벤허’를 감독한 윌리엄 와일러는 영화를 찍는 도중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도 했다). 영화 ‘리틀 부다’는 주로 환생을 다루고 있는데 서양인들의 세계관이나 기독교적 존재론에서는 상상하기 어렵고 그래서 한층 호기심이 이는 주제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이룬 과정을 티베트 라마 환생자인 세 아이의 시각으로 다룬 영화 ‘리틀 부다’는 불교와 기독교를 오가는 세계관의 한계를 드러낸다.
문화사 연구의 자료로서 의미에 못지않게 ‘리틀 부다’는 여러 측면에서 한계 역시 그대로 노출하기도 한다. 이 한계들 역시 영화를 새롭게 보게 한다. 이 한계들 중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첫째, 어떻게 해서든 부처님이 되는 싯다르타의 탄생과 탄생을 둘러싼 신비한 일들을 다루려는 감독의 야릇한 고집이다. 두 번째 지적하고 싶은 한계는 놀라운 CG(컴퓨터그래픽) 효과가 종교를 다루는 영화에 과연 적합한지, 적합하다면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는 지를 둘러싼 디지털과 이미지 합성 시대의 영화 미학과 현대인들의 종교관 사이의 관계설정 문제다. CG가 지나치거나 조악할 경우 ‘리틀 부다’ 같은 종교영화가 자칫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 혹은 ‘스타워즈’ 류의 이상한 장르와 구별이 되지 않는, 말 그대로 얼마든지 난장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은 유사종교나 광신도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다.

영화 ‘리틀 부다’는 열반한 라마 도제의 환생한 계승자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2시간15분의 긴 영화 전체가 이 환생을 다루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특이한 점은 환생한 계승자가 하나가 아니라 셋이라는 것과 그 중 한 아이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의 가정에서 태어난 푸른 눈동자에 금발을 한 미국 아이라는 것이다. 제시(Jesse)가 그 아이인데, 어딘지 지저스와 발음이 유사한 이 아이는 다른 두 꼬마인 라주와 지타와 함께 쉽게 말하면 삼두체제를 이루게 된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세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어린 소녀라는 것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서양인 라마가 출현할 수 있고 여자 라마도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생이라는 주제는 불교의 주제이긴 하지만 자칫 언제든지 만화같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영화 ‘리틀 부다’에서는 환생이 우스꽝스럽게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다. 영화 초입에서 염소와 선승의 환생관계가 조야한 삽화를 통해 언급되기도 하고 또 미국 소년 제시가 선물로 받은 만화책 ‘싯다르타의 인생 이야기’가 줄거리 진행에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되긴 하지만, 또 나아가 열반한 라마 도제가 청바지를 입고 꿈속에 현몽하기도 하지만, 결코 가볍다거나 우스꽝스럽지는 않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죽은 라마가 한 아이가 아니라 세 아이에게 동시에 환생했기 때문인데, 이는 아주 독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파란 눈의 미국 아이나 여자 아이로도 환생했다는 설정도 흥미롭고 묵직한 화두를 던져준다.

라마가 세 아이에게 환생했다. 이 환생을 영화 속에서 왕자인 싯다르타가 왕궁을 떠나 수행을 하던 중 깨달은 다음과 같은 진리와 연결시켜 보자. “그들이 왕자였고 왕자가 그들이었다.” 생로병사 고통을 모르고 지내던 왕자는 수행 중 이 깨달음과 함께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줄이 느슨하면 연주할 수 없다”는 한 악사가 하는 소리를 듣다가 중도(middle way)의 진리를 깨닫는다. 이 과정이 너무 조급하게 진행되고 설화 수준으로만 다뤄다는 느낌은 지울 수는 없지만, 세 아이에게 환생했다는 라마 도제의 환생담은 “그들이 왕자였고 왕자가 그들이었다”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을 받은 천불(千佛)사상과 관련이 되어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베르톨루치가 대승불교의 3겁의 삼천불이라는 의미도 알고 있었을까? 아니다. 감독은 파란 눈의 미국 소년과 소녀에게 환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지만 여기서 그치고 말았다. 사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으로 끝나는 영화 ‘리틀 부다’는 불교의 흥미 있는 교리와 설을 가능한 한 많이 담아내려고 애를 썼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싯다르타 탄생 설화를 세 아이들에게 연결시키려고만 할 뿐이다. 그 결과, 세 아이가 만화책에서 보던 싯다르타의 초자연적인 탄생과 수행을 2500년이란 시간을 건너 뛴 채 직접 눈으로 목격하는 장면들이 영화 속에 CG를 통해 등장하고 만다. 이 설정은 타임머신에 익숙한 서양인의 상상력이 낳은 것이라는 의혹을 벗어나기 어렵다.

세 아이들은 캡을 눌러 쓴 일상의 복장을 한 채, 암흑의 마왕인 마라의 유혹을 물리치는 이 환상적인 장면들을 목격한다. 마왕의 다섯 딸이 나타나 유혹하고, 수천의 군대가 불화살을 쏘면 싯다르타는 꽃으로 변하게 하고 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끌어내 환상이요 헛것이라고 일갈하는 장면 등으로 이어지는 전 과정을 아이들이 보는 장면은 부자연스럽기만 하다. CG 기술 없이는 구현해낼 수 없는 것들이기에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세 아이들이 ‘오만, 탐욕, 두려움, 무지, 욕망’이라는 다섯 가지 죄악의 의미를 알았을까 의혹이 드는 것이다. 요컨대 이런 식이라면, 만화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어린 아이들처럼 천진한 마음으로 환생을 믿으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오만이 무엇인지, 무지와 탐욕의 죄와 그 허망함의 끝을 알 수 있었을까? 이건 억지다. 압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싯다르타가 물에 비친 자신의 허상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 역시, 서구식 접근법이다. 장면 자체로는 멋지지만, 물에 비친 자신의 허상을 사랑하게 된 나르시스가 그 허상을 쫓아 물에 들어가려다 물에 빠져 죽게 된다는 신화에 기댄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불교의 허상은 훨씬 더 깊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왜 감독이 싯다르타의 탄생과 그 탄생과 관련된 여러 설화들을 고집했는지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의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수태고지란 천사 가브리엘이 처녀 마리아에게 예수님 임신을 알리는 내용을 다룬 기독교 미술의 주제다. 영화 속에서 싯다르타는 태어나자마자 두 발로 서서 걷고, 걸을 때마다 연꽃이 피어나며 이제 막 태어난 아기가 “난 세상에 광명을 비추고 번뇌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태어났습니다”라고 설법을 편다. 이는 헤아릴 수 없이 그려진 수태고지의 장면들에 지나지 않는다.

스님들이 시애틀로 찾아왔다가 돌아간 후 제시의 엄마는 남편에게 말한다. “마치 동방박사가 우리 집에 찾아온 것 같다”고. 의미심장한 비유다. 이뿐만이 아니라 예수님 탄생이나 심지어 고딕성당과 티베트 스투파와 비교 등 여러 장면에서 감독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적 상상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감독을 탓할 일이 결코 아니다. “동방박사가 집에 찾아온 것 같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감독이 싯다르타 탄생설화를 고집하는 이유를 수태고지에서 찾을 수 있다면, 이는 기독교가 기대고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동정녀와 성육신 교리 등을 감독이 싯다르타에게서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구인들이 환생담에 집착하는 것도 기독교의 이 예수님 탄생을 둘러싼 몇 가지 교리에 대한 회의에 기인할 것이다. 기독교는 결코 환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상당히 유사함에도 불구하고(이런 이유로 최근 교황은 진화론에 반대하지 않았다) 하나의 공간과 하나의 시간에 일회만 존재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본다. 그래서 환생이 아니라 부활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각 종교의 교리나 그에 대한 믿음을 떠나, 이 교리와 믿음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축적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 ‘리틀 부다’의 치명적인 한계는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감독은 스투파를 묘사하면서 은연중에 고딕성당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본의 아니게 이 한계를 고백하고 만다. 라마 도제의 환생을 찾는 임무를 띤 라마 노부가 티베트에 온 지시 부자에게 스투파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자. “네모난 얼굴의 스투파는 지구를 상징하고 돔은 물을 상징합니다. 눈 위는 깨달음의 경지 혹은 불을 뜻하죠. 지붕 위는 공기를 상징합니다.” 세부는 달랐지만 고딕성당이 그랬다. 또 중세 고딕성당처럼 스투파 앞에도 놀이패가 있고 장이 서며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종교는 산 속이 아니라 시장 거리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제시 아버지는 건축가였고 싯다르타도 “난 너의 집이야. 넌 내 안에 산다고. 네가 가고자 하는 곳엔 아무도 없어”라며 요설을 늘어놓는 마왕을 마주 했을 때 꾸짖는다. “집 짓는 자여, 드디어 너를 만났구나. 너는 이제 집을 지을 수 없느니. 이 땅이 그 증인이다.” 감독은 이외에도 여러 번 건축을 강조한다. 시애틀 언덕에 있는 제시의 집을 처음 찾아왔을 때도 집의 공간을 칭찬하고 “공간은 마음의 공간을 말해주죠”라고 말한다. 또 환생을 믿지 못하는 제시 아버지를 만났을 때는 찻잔을 부수면서 찻잔과 그 안에 담기는 홍차를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노자 장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비유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감독의 상상력이 기독교와 불교 사이를 오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결코 감독의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에 대해서 동양인인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실수나 잘못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 ‘리틀 부다’는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 장점과 한계 모두를 통해.

정장진 문화사가 jjj1956@korea.ac.kr
 

[1273호 / 2014년 12월 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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