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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더해줌 아닌 성취시켜 주는 것

즉 도에 뜻을 둔 사람 중에 현명하다고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실행이 지나치기도 하고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은 지식이 지나친 경우가 있다. 성인께서 이 때문에 절충하여 크게 지나친 것은 억누르고 미치지 못하는 것은 이끌어주신다. 그리하여 크고 지극한 중정(中正)의 본체에 돌아가서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을 완전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거울 밝음은 본래 갖춰진 것
씻어서 밝음 더해지지 않아
마음속의 의미를 잘 활용해
열어주는 것이 바로 도일 뿐

천연적으로 갖추고 있는 진실함을 잃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닦는다고 말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것을 버리고 저 밖에서 따로 닦아야할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중용에서 말하기를 “도를 닦게 하는 것을 가르침[敎]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사람에게 더해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사람이 부여받은 것을 마무리해서 성취시켜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뜻을 두고 있는 것에 따라서 잠재력을 이끌어내어 발현되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알아차리고 감각기관이 발동할 때와 기거하면서 밥 먹고 숨 쉬고 하는 것이 본래 밝은 것에서 드러나지 않음이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숙세에 익힌 습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면서 장애가 생긴다. 그러므로 밝은 본체 자체에서 가려져 있는 것을 소통시켜준다. 눈이 물질에 가려져 있으면 물질자체에서 소통시켜주고, 귀가 소리에 가려져 있으면 소리에서 소통시켜주고 혀가 맛에 가려져 있으면 맛에서 소통시켜주고 코가 향기에 가려져 있으면 향기에서 소통시켜주고 몸이 감촉에 가려져 있으면 감촉에서 소통시켜주고 생각이 지식에 가려져 있으면 지식에서 소통시켜 주어서 숙세의 습기를 씻어내어 본래 밝음이 발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거울을 갈면 때가 묻었던 것이 깨끗해져서 밝은 상태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거울의 밝음은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갈아내거나 씻는 것에 의해 새삼스럽게 밝음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익혀야 할 것은 도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의 의지를 활용해서 열어주는 것이다. 만약 오롯한 상태가 되어 뽑혀나가지 않는 의지가 없으면 반드시 습기의 오염에 의해 뜻을 빼앗겨서 나날이 점점 어두운 세계로 흘러가 막연해져서 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게 되니 사람이라고 해 줄 수가 없다. 또 어떻게 선비라고 불러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선비는 의지를 귀하게 여기고 의지는 닦음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한다. 이것으로 사수(士修)라는 자를 주는 이유를 설명하노라.

서자후에게 자를 지어준 이야기
서천재(徐天載)가 예를 올리고 자를 청하였다. 나는 자후(子厚)라는 자를 지어주었다. 이에 그를 위해서 설명해본다.

천(天)은 우리의 본성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싣는다’고 말한 것은 의미를 본성이 만물을 실을 수 있다는 것에서 취한 것이다. 중용에서 말하기를 “중화(中和)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제 위치를 잡고 만물이 길러진다”고 하였다. 이 중(中)은 본성의 체(體)이고 화(和)는 본성의 덕(德)이다. 우리가 그 본성을 극진하게 다 발휘할 수 있으면 체가 두루 퍼지고 덕이 넓어진다. 그렇게 되면 천지의 위치를 제자리 잡게 하고 만물을 기를 수 있다.

이것은 단지 본성의 직분이 본래 그러한 것일 뿐이다. 본성에 본래 갖추어져 있긴 하지만 여기서 그쳐버리고 그것을 기름이 없으면 본성의 광대하고 정미함을 극진하게 발휘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내가 후(厚)를 취한 것이니 그 의도가 기르는 것을 깊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후함을 소중하게 여겨야 비로소 지니고 실어서 빠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러므로 “바람이 축적된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날개를 가진 새를 짊어지는 데 힘을 쓸 수 없고 물이 축적된 것이 두텁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우는 데 힘을 쓸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박상준 고전연구실 ‘뿌리와 꽃’ 원장 kibasan@hanmail.net

[1296호 / 2015년 5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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