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술관의 설립자이자 조선 제일의 수장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삶과 문화재 수집 이야기를 추적한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다큐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일대기가 눈에 환하게 그려진다.
간송은 서울 중심 99칸 대가의 자손이었다. 휘문고보 시절에는 야구부 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세기의 보물들을 수집, 수장하기 위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승부를 펼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조선 40대 부자 중 한 명으로 조상에게 물려받은 막강한 재력과 함께 청소년 시절 운동선수의 경험도 있었을 것이다.
광복 후 국보 제68호로 지정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을 놓고서, ‘매입가의 두 배를 주겠다’는 일본인 원매자 무라카미에게 이보다 “더 좋은 청자를 저에게 주신다면, 그 대가는 시세대로 드리는 동시에, 천학매병은 제가 치른 값에” 주겠다고 해서 오히려 그를 감동시킨다.
“자신의 입으로는 산 가격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나, 자신의 손에 들어오자 “눈물을 흘리다가는 웃었고, 웃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고 할 정도로 수집품 중에서 가장 아끼던 ‘훈민정음’ 해례본을 “연구를 위해 영인본으로 출판”하자는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고 “손수 한 장 한 장 해체해서 사진을 찍게” 했던 것도 문화재 수집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삼았던 다른 이들과 다른 면모일 것이다.
조선 제일의 수장가가 되는 길은 “돈이 있다고, 안목이 있다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돈과 안목 뿐 아니라 명확한 책임의식과 과감한 결단력이 함께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이다.” 그에게는 타고난 기질과 안목도 있었지만, 이것을 더 넓고 깊게 해주는 인연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특히 당대 최고의 문화재 감식가였던 오세창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은 민족 문화유산 보호 측면에서도 행운이었다.
“힘들게 수장한 물건을 절대 다시 내놓지 않아도 될 만큼만 모으게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애써서 모은 수장품이 자네 스스로 또는 자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지고 말 것이니, 내 말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게.” 오세창의 이 간곡한 당부를 지켰기에 간송의 수집품과 함께 그의 멋진 이름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이다.
흔히 계미명삼존불(癸未銘三尊; 1962년 국보 제72호 지정)이라고 알려진 삼국시대 불상을 손에 넣게 된 과정도 극적이었지만, 그 인연으로 또 다른 선연(善緣)을 짓게 된다. “이렇게 귀한 분을 모셨으면, 베푸는 덕을 쌓아야 하지 않겠나. 그래야 복이 참복이 되고 길게 이어진다고 했어. (…) 귀한 부처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덕을 쌓으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우리 집에 오신 것 같구나.”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를 받은 간송은 그날부터 인보관이라는 “양로원에 식량이 떨어지지 않도록 매해 기와집 한 채 값인 1천 원씩을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은 오늘날 기준으로 하면 재벌급의 거부였다. 서화와 전적, 청자와 불상 등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들은 그가 20대 젊은 시절부터 온갖 정성을 기울여 수집하지 않았으면 사라지거나 외국 수집가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일부에서는 ‘숱한 사람들이 굶주리며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 그런 일을 한 것이 과연 정당하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물음에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그가 정당했다’고 답할 것이다.
이병두 대한불교진흥원 사무국장
[1317호 / 2015년 11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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