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 이근복 번와장

“세월 무게 짊어진 기와로 목조건축 숨결 천년을 지킨다”

▲ 이근복 번와장은 지붕에 기와 잇는 일이 목조건축문화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고 믿는다.

불타고 있었다.

2008년 2월10일, 50대 중년남성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국보 1호 숭례문, 아니 자신의 피와 땀이 스민 ‘숭례문’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도 무너져 내렸다. 서늘한 한기 한 줄기가 등골을 스쳤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숭례문으로 향했다. 1997년 숭례문 지붕을 보수하던 기억이 흑백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
‘지붕 기와 잇는 장인’ 뜻
2008년 지정 뒤 국내 유일

전통건축 곡선미 번와가 좌우
단열·제습·건축수명도 늘려
“잘 이은 기와가 천년 버팀목”

혼자 집 짓던 부친 곁에서
어깨너머로 건축 배워가며
기와 중요성 깨닫고 ‘발심’

1970년 고건축 입문한 뒤
대가들 작업 현장 좇으며
땡볕·추위 참고 기술 익혀
교육 등 전승자 양성 매진

손때 묻혔던 숭례문에 애착을 느꼈던 그였다. 화재진압 현장에서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고건축 지붕과 기와 전문가였지만 화재진압이 이렇다 저렇다 따질 여유가 없었다. 불현듯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소방호스가 꺾여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소방관도 아닌데 다짜고짜 호스를 폈다. 다른 호스가 꺾이면 달려가 또 폈다. 미친 듯이 뛰어 다녔다. 질서유지에 나선 경찰도 소방관도 시민들도 그가 누군지 몰랐다. 그는 하룻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숭례문은 탄 기와와 목재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눈물로 그날 밤 화기를 달랬다.

“선조들 지혜가 담긴 문화재였고, 국보 1호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직접 지붕과 기와를 보수했던 숭례문이었지요. 애착이 갈 수밖에요. 당시 너무 황망해서 화재진압이 끝나고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갔지만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근복(66) 한국문화재기능인협회 이사장에게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 숭례문 기와와 목재들이 불길에 떨어져 나갈 때 살점이 뜯기는 심정이었다. 반년이 흘렀을까. 애꿎게도 문화재청은 그해 10월21일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했다. 번와장(翻瓦匠)이었다. 그리고 숭례문 머리인 지붕을 복원하는 시절인연도 그를 찾아왔다. 지붕과 기와에 관한 국내에서 최고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이다. ‘기와[瓦]를 뒤집는다[翻]’는 뜻말이다. ‘뒤집는다’는 기와를 뜯고 다시 잇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기와를 사용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출토유물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됐던 것으로 추정한다. 기록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와박사(瓦博士)’라는 장인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 원년(1392)에 ‘와서(瓦署)’를 설치해 기와를 생산했고, 태종 6년(1406)에는 ‘별와요(別瓦窯)’에서 기와보급을 담당했다.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翻瓦)’라고 하기 때문에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와공(翻瓦瓦工)’이라고도 한다.

지붕은 한국 목조건축에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부분이다. 특히 기와지붕은 한국전통목조건축물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인 곡선미를 완성한다. 기와 잇는 장인의 번와가 중요한 이유다.

그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국내 첫 번와 장인이 됐다. 아직까지 유일무이하다. 세상에 알려진 이력이 ‘1970년 한옥고건축 입문’뿐이니 46년 동안 기와를 놓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실제 그는 반백년을 기와와 흙에 파묻혀 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부친은 어린 저와 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피난가셨습니다. 서울에서 목수, 미장 등 건축일을 배우셨던지 집 한 채를 혼자 지으실 정도였지요. 어린 시절 부친을 따라가 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미장을 잘 하셨지만 지붕에 기와도 올렸습니다. 17~18살 때도 시간이 나면 가서 부친의 일을 도왔지요.”

부친은 막둥이 아들을 데리고 건축현장을 다녔다. 막둥이는 현장에서 밥도 얻어먹고 허드렛일 도우며 곧잘 아버지를 따랐다. 인부 몇을 데리고 척척 집을 짓는 아버지의 분주한 손놀림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기와 잇는 모습이었다. 눈과 비바람 막는 기와를 잘 이은 목조건물이라면 가족들 보금자리로서 오래오래 그 수명을 이어가리라 어렴풋이 믿었다.

서울에 올라와 제대로 배우겠노라 결심했다. 친지가 살던 돈암동에 한옥집이 많았는데 공사현장을 찾아다니며 기와 잘 잇는 명인을 수소문했다. 기성길이라는 세 글자를 들을 수 있었다. 숭례문을 중수하고 불국사 대웅전, 근정전 무위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지붕에 모두 올라 기와를 얹었던 당대 고건축 분야 대가였다. 마침 창덕궁에 있다고 해서 한 걸음에 달려갔다. 인부 7~8명과 함께 시공 중이었는데 인사를 해도 보는 체 만 체 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 너도 나도 기술 하나 배워 가족들 목구멍에 풀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다.

“돈 안 받겠습니다. 밥만 먹여주세요. 내일부터 나오겠습니다.”

혈기 넘치는 스무살 청년의 결의에 스승은 그제야 지붕 아래를 내려다봤다.

초보는 아니었다. 청년은 남들보다 잘했다. 이미 부친의 건축현장에서 보고 듣고 해봤던 일들이었다. 그래도 하는 일은 지게질뿐이었다. 지붕에는 번와 장인 1명과 그 곁에 기와 집어주고 흙 깔아주는 조공(助工) 1명이 오를 수 있었다. 나머지 인부들은 지게에 기와와 흙을 실어 나르기를 반복했다.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조공은 언감생심. 당시 장인의 조공은 가까운 친지들이 다수였다.

청년은 누구보다 빨리 지게를 지고 나르면서 기와 잇는 모습을 살폈다. 당시는 해 뜨면 일하고 지면 작업을 끝냈다. 점심 먹고 다들 낮잠으로 쉴 때 청년은 잠을 물렸다. 뜨거운 여름 땡볕에도 지붕 흙 위에 장인이 하던 대로 기와를 이었다.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 다시 뜯어놓고 깔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1년 동안 번와를 배우며 가정집 공사를 하기도 했다. 번와는 작업 특성상 집의 기둥과 서까래가 들어서면 10~20일 내에 마쳤고, 해서 이곳저곳 전국을 이동하며 일감을 찾아야 했다. 청년은 부지런히 현장을 누볐다. 가정집 현장에서 매일 담배 한 갑이 나오면 10일 동안 모아두고 장인들에게 선물하면서 번와에 대한 지식을 쌓아갔다. 결국 1976년 기성길씨와 그의 제자 고 이금천(와공 192호)에게 번와를 사사했다.

독립한 청년은 우리나라 목조문화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았다. 경복궁 근정전 등 서울 5대궁은 물론 종묘 정전, 봉정사 극락전 등 국보와 전국 1000여개 사찰 전각, 향교와 서원 등 문화재를 보수했다.

 
▲ 반백년 기와와 흙에 묻혀 산 이근복 번와장은 번와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기와를 잇는 번와를 단순히 기와를 쌓는 것으로 보시면 오해입니다. 아무리 목재가 좋아도 지붕에 물이 새서 습기 차면 썩는 게 나무입니다. 그래서 번와가 중요하지요. 기와 한 장 잘못 놓으면 대들보가 썩습니다. 목재 위에 보통 흙을 놓는데 비가 새면 흙이 물을 먹고 목재가 흙으로부터 수분을 흡수하니 속에서부터 썩는 겁니다. 기와 재질도 중요합니다. 양지와 음지에 놓일 기와를 고려해 이어야 합니다. 덜 구워진 기와는 겨울에 수분이 얼고 녹으면서 터져 깨지기 일쑤입니다. 지붕을 올릴 때도 기둥에 하중을 덜 실어야합니다. 세월은 목조건축물을 잠재웁니다. 잘라낸 나무도 집을 구성하는 생명체로 삶을 살아가고 기와도 마찬가지인데, 지붕 무게로 눌리면 휘고 눈과 비바람 견디면서 나이를 먹지요. 오래오래 그 생명력을 유지하도록 정성스럽게 기와를 잇고 지붕을 올려야 선조들의 장인정신이 담긴 목조건축 문화재가 오래오래 살아 숨 쉽니다.”

번와는 깊었다. 오랜 지혜가 숨어 있었다. 자연의 순리를 고려하면서도 건축목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혼이 담겼다. 그래서 번와 과정은 단순하지 않다. 생석회를 피우고 기와가 앉을 자리인 연암을 다듬어 설치한 뒤 적심(積心)을 넣고 보토(補土)를 덮고 나서야 기와를 깐다. 적심은 지붕의 뼈대를 이루는 서까래와 지붕 사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 목재를 넣는 작업이다. 그 위에 단열과 습기조절을 위한 보토를 덮는데, 적심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기와 선이 죽고 너무 적으면 쉽게 기와가 부서진다.

기와 수명은 기와에 까는 흙에 첨가되는 생석회에 따라 결정된다. 시멘트가 100년이라면 생석회는 1000년까지 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기와 밑을 지탱하는 흙에 생석회가 잘 섞이지 않으면 기와는 흘러내린다. 심하면 무너진다.

“곡선미와 목조건축물 생명력을 좌우하는 것은 바닥기와 잇기입니다. 보토 위에 까는 바닥기와를 어떻게 잇느냐에 따라 용마루(지붕 중앙의 수평으로 된 부분)와 추녀의 곡선이 나오지요. 대개 바닥기와 3~4장을 놓은 다음 기와 위쪽에서 용마루까지 줄을 띄워 곡선과 높이를 조정합니다.”

그는 1983년 작업한 서울 봉은사 대웅전 기와불사가 흐뭇하다. 얼마 전 다녀왔을 때도 곡선과 기와가 그 생명력을 내뿜고 있어서다. 더구나 조계종 전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새참 먹을 때 다가와 건낸 한 마디가 아직도 생생해서다.

“부처님 비 안 맞게 해주시니 복 받으실 겁니다.”

가끔 문화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가 부럽다. 비행기에 장인 1명 이상을 태우지 않는단다. 하지만 장인을 잘 대우한다는 한국은 한 비행기 좌석 모두에 장인이 앉아도 말릴 사람 하나 없다는 쓴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맥이 끊기지 않도록 혼신을 다하고 있다. 2009년부터 매년 1회씩 일반인과 문화재 관련 종사자들을 초대해 공개시연회를 열고 이론강의도 한다. 제자들에게는 작업현장에서 직접 지혜를 전한다. 서울시한옥교실과 고건축캠프 등을 통해 전통건축물에서 번와가 중요한 이유를 알리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그에게 문화유산유공자 은관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껏 자신이 올린 지붕을 얹고 있는 목조건축물이 자랑스럽지 않다.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고 단언했다. 세월의 무게는 보수 등 시공할 때 곡선미를 꺾는다. 기둥이나 서까래 등 목재가 잠을 자고 추녀의 선도 휜다. 그 위에 해와 달 몇 천 번 오르내리고 벼락 수십번 그리고 수차례 내린 비와 눈이 앉기도 했다. 그는 선조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곡선미와 번와를 계승하고자 다시 기와를 뜯고 잇는다. 그 위에 얹힐 천년 세월을 견디며 날마다 숨 쉬는 문화재로 오래 보존되길 기원한다. 그래서 일일시호일이다. 세월의 무게를 버티는 하루하루가 천년으로 흐르는 날마다 좋은날을 꿈꾼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국보·보물 전각 등 사찰 1000여곳 보수

장인 손길 닿은 문화재

국보 제1호 숭례문 복원부터
법주·불영·봉은사 대웅전까지

▲ 울진 불영사 대웅전.

▲ 안성 청룡사 대웅전.

이근복 번와장 손길이 닿지 않은 국내 문화재가 없을 정도다. 특히 국보·보물 전각 등 전국 사찰 1000여곳에 기와를 새로 잇거나 보수했다. 불교계에서 그가 빠진 채 마무리 된 기와불사가 없다.

이 번와장이 기와를 올리고 이은 대표적인 문화재는 국보 1호 숭례문이다. 1997년 보수한 인연이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 기와복원으로 이어졌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창덕궁, 경희궁 등 서울 5대궁 내 전각 지붕도 그의 손이 매만졌다. 경회루(국보 224호), 근정문(보물 812호), 근정전(국보 223호), 돈화문(보물 383호), 희정당(보물 815호) 지붕이 그의 번와로 보수됐다.

▲ 서울 길상사 극락전.

▲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

▲ 서울 숭례문.

사찰 내 국보 및 보물 전각 지붕과 대문 다수도 이 번와장이 손질했다.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15호)을 비롯해 도갑사 해탈문(국보 50호) 기와에서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915호), 안성 청룡사 대웅전(보물 824호)까지 그가 작업했다. 뿐만 아니다. 서울 길상사 극락전과 조계사 일주문 그리고 봉은사 대웅전, 남양주 불암사 대웅전, 남한산성 국청사, 울진 불영사 대웅전, 문막 동화사 대웅전, 인제 백담사와 오세암 요사채, 단양 구인사 일주문과 대조사전 모두 그가 기와를 올리고 이었다.

이밖에 서울 종묘 정전(국보 227호)과 문묘(보물 141호), 동묘(보물 142호)를 비롯해 전통고건축물인 향교, 재실, 서원, 사당 그리고 백제역사재현단지, 수원 화성 서장대 번와도 그의 솜씨다.

 

[1327호 / 2016년 1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