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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카슈미르-④ 현장의 카슈미르 순례

현장법사, 피르판잘 산맥 넘어 서쪽 석문 통해 카슈미르에 들다

▲ 현장법사가 카슈미르에 입국하여 첫날밤을 묵었던 바라물라의 후쉬카라(또는 우스쿠라) 승원의 스투파.

파리하스포라는 스리나가르에서 바라물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바라물라는 적어도 1947년 10월26일 카슈미르의 마하라자(왕)에 의해 인도연방에 편입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라왈핀디-머리-무자파라바티에서 카슈미르 계곡으로 들어오는 서쪽 관문이었다. ‘서역기’에 의하면 카니시카 왕은 불교성전의 결집을 마치고 간다라로 돌아가면서 이 서쪽 관문에서 동쪽(카슈미르)을 향해 꿇어앉아 이 나라를 승도(僧徒)들에게 보시하였다.

왕의 외숙이 찾아와서 영접
후쉬카라 승원서 첫 밤 묵고
스리나가르서 왕 환대 받아

70 노령의 승칭 법사에게서
오전 ‘구사론’, 오후 ‘순정리론’
저녁에 인명론·성명론 수강

현장은 이 강습 통해 불교철학
제 문제의 기초를 확립했을 것

오공 또한 이곳을 통해 카슈미르로 들어왔고 현장 역시 그러하였으니, 혜초도 이 길을 통해 간다라로 넘어갔을 것이고, 간다라의 세친도 이 관문을 통해 카슈미르에 입국하였을 것이다. 진제의 ‘바수반두(세친)법사전’에서는 사방으로 성과 같은 산들로 막힌 카슈미르(罽賓)는 오직 한 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공입축기’에 의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카슈미르에는 당시(759년) 세 길이 열려 있었다. 동쪽은 티베트(吐藩)에 접해있고, 북쪽은 발티스탄(勃律, 오늘날 길기트-스카르두)과 통하였으며, 서쪽 길은 간다라와 통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별도의 한 길(아마도 남쪽 길)은 항상 닫혀 통행이 금지되었지만 천군(天軍)이 행할 때만 잠시 열렸다고 한다. (M. A. 스타인은 아랍세계의 동점을 막기 위한 조처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라다크와 잠무로 통하는 동쪽과 남쪽 길만 열려있고 발티스탄과 간다라로 통하는 북쪽과 서쪽 길은 닫혀있다.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玄)은 탁실라에서 우라샤(오늘날 파키스탄 동부 하자르 지방)를 거쳐 험준한 피르판잘 산맥을 넘어 카슈미르 서쪽 석문(石門)에 이르렀다. 당시 카슈미르 왕(후술)은 외숙으로 하여금 수레와 말을 끌고 가 현장을 영접토록 하였다. 현장은 석문을 지나 몇몇 가람을 순례하고 나서 그날 카슈미르에서의 첫 밤을 후쉬카라(Huṣkara: 護瑟迦羅)라는 절에서 묵었다.

▲ 흑백사진은 1869년 발굴 전 사진(John Burke, 위키도피아).

후쉬카라라는 명칭은 카니시카 2세에 이은 쿠샨의 후계자 후비쉬카(Huṣkara)에서 유래한다. 그는 후비쉬카푸라(Huviṣkapura, 오늘날 우쉬쿠라 Ushkura)라는 도시도 건설하였는데, 이곳은 파리하스포라에서 약 35㎞ 서쪽에 위치한 바라물라 지역 내에 위치한다. 내친 김에 그곳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스리나가르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 몇구도 거기서 출토된 것이었다. 국경지역이라 외국인의 출입이 통제될까 염려하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미루나무 가로수에 논밭이 펼쳐지고 사과와 복숭아, 구운 옥수수를 파는 좌판이 띄엄띄엄 길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네 옛 신작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길가에 큰 석조물이 나타났다. 파탄이라는 마을이다. 9세기 힌두 왕 샹카라바르만에 의해 건축된 시바사원이다. 카슈미르의 힌두교 사원 역시 14세기 초 이슬람 술탄에 의해 거의 다 파괴되었다. 파탄을 지나자 길을 가로지르는 큰 아취형의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바라물라 12㎞, 우리 57㎞, 무자파라바티 127㎞, 이 길을 계속가면 파키스탄의 아자드(자유)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티에 이를 것이고, 좀 더 가면 아쇼카 왕이 그의 법(法)의 칙령을 바위에 새겨 세운 만세라와 샤바즈가리, 그리고 간다라의 고대수도였던 푸쉬카라바티(차르사다)와 푸루샤푸르(페샤와르)에 이를 것이다.(1325호 11면 지도 참조) 앞서 말하였듯 세친도, 간다라의 여러 논사들도, 현장도, 혜초도 이 길을 지나갔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우리의 국경검문소(Kaman post)는 완전히 폐쇄되어 인근 마을사람들조차 왕래할 수 없다고 한다.

파리하스포라에서 탄 세어 택시는 한 시간 반이 걸려 바라물라에 도착하였다. 국경지역이니만큼 군부대가 눈에 띄었고, 몇 군데 검문소를 지났지만, 검문은 없었다. 바라물라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 저만큼 우뚝 솟은 산이 보였다. 스리나가르에서 계속된 평지는 여기서 끝나고 길은 이제 첩첩의 산악 속으로 이어져 절벽을 타고 오르내릴 것이다. 도시는 젤룸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 양편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버스터미널 부근은, 시장에 둘러싸여 있어 그런지, 오늘이 장날인지, 인근의 다른 마을로 향하는 버스들로 뒤엉켜 몹시 혼잡하였다.

▲ 바라물라 버스터미널 인근 거리.

후쉬카라(우쉬쿠라) 불교승원 터는 터미널에서 시내 쪽으로 좀 내려가다 성 요셉 하이스쿨을 조금 못 미쳐 ‘구루 나나크’라는 시크교 교조의 이름을 딴 중등학교 담을 끼고 좌측 골목길로 200∼300미터 올라간 마을 초입에 있었다. 철망으로 울타리가 쳐져있었지만, 처음에는 다만 조그마한 공터인줄 알고 그냥 지나쳤다. 마을까지 올라갔다가 상투를 튼 시크교도 행색의 학생들에게 묻고 물어 다시 내려왔다. 문이 잠겨 있었지만, 관리인인 듯한 노인이 바로 나타나 열어주었다. 입장료는 없었다. 하르완에서도, 파리하스포라에서도, 아크누르의 암바란에서도 역시 그러하였다. 파키스탄에서는 여행자의 눈에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외국인 입장료가 있었는데, 카슈미르의 불교유적지는 입장료 자체가 없었다. 아예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그러한지.

‘카슈미르 중점보호 유적’ 팜플릿에는 후쉬카라의 불교승원 터를 ‘고대 스투파(Ancient stupa)’라고 하였지만, 파리하스포라의 법당(차이트야)과 동일한 형태로 그 사분의 일도 채 되지 않을 크기였다. 이 또한 8세기 중엽 랄리타디트야 왕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주변으로 마을이 들어서서 그런지 유적지 자체만으로는 매우 협소하였다. 대제국의 황제 이름(후비쉬카)에 전혀 걸맞지 않았다. 하르완의 승원 터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이 언덕배기 마을 전체가 승가람이 아니었을까? 현재의 유적지는 다만 탑지(塔址)일 뿐이다. 현장이 방문하였을 때는 어느 정도 규모였을까? 왕의 외숙까지 나와 영접하고 첫 밤을 묵은 곳이라 하였으니, 이 일대에서 가장 큰 절이었을 것이다. 그날 밤 이 절 승려들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선신(善神)의 가호를 받는 중국에서 온 현장법사를 들먹이며 잠자고 있는 그들을 경책하여 아침에 모두들 법사에게 와 예배하였다고 한다.

▲ 1897년 바라물라 출토 7세기 불상. 스리나가르 SPS 박물관.

후쉬카라 승원에서 카슈미르의 첫 밤을 보낸 현장은 며칠 후 왕성(스리나가르 新城)에 도착하여 왕의 환대를 받았다. 그 때의 장면을 ‘자은전’에서는 이같이 묘사하고 있다.

“왕성 근교 1유순을 남겨놓고 달마사라(達磨舍羅, dharmaśālā: 여행자 숙소)에 이르렀을 때 왕은 여러 신하와 도성 안의 승려들을 이끌고 이곳까지 마중 나왔다. 이들을 맞이하는 이들은 1000여명에 이르렀다. 깃발이 길을 덮고 향의 연기와 꽃들이 길을 채웠다. 왕이 법사를 만나자 정중히 예찬하고 손수 수없이 많은 꽃들을 공양하고 뿌렸다. 그리고 법사를 큰 코끼리에 태워 도성에 이르러 왕가에서 세운 자옌드라사(闍耶因陀羅寺, Jayendra vihara)에 머물도록 하였다.

다음 날 왕은 법사를 왕궁으로 초대하여 공양하였는데, 대덕 승칭(僧稱)을 비롯한 수십 명의 고승도 배석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왕은 대덕에게 강연을 청하고, 법사로 하여금 토론(論難)하게 하였는데 이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 후쉬카라 출토 7~8세기 무렵 초기 간다라 양식의 테라코타 불두(佛頭). 영국박물관(위키도피아).

칼하나의 카슈미르 왕통 연대기에 따르면 현장이 카슈미르에 체재할 당시(631∼632년) 카슈미르의 왕은 카르코다 제국을 세운 두르라바와르다나(Durlabhavardha na, 625∼661)였다. 현장의 기록으로만 본다면 왕은 불교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현장이 멀리서 [불교]학을 사모하여 이곳에 왔지만 읽고자하는 책이 없다는 말을 듣고 20여명의 서사(書士)로 하여금 경론을 베끼게 하였고, 이와는 별도로 다섯 명의 수행원을 제공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제반 경비도 모두 후원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손자 랄리타디트야에서 보듯이 그들 제국에서는 불교와 힌두교를 함께 신봉하였다.)

그날 왕궁의 연회에서 승칭법사는 무엇에 대해 강연하였고, 현장은 무슨 문제에 대해 토론하였을까? ‘자은전’에 따르면 승칭법사는 70세의 노령으로 덕이 높고 계행이 청결하였으며 사려도 깊고 박학다식하였는데, 열의에 차 강연하였고, 현장 역시 마음을 기울여 논평하여 밤이 밝도록 피곤한 줄도 몰랐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현장은 그에게 불교의 여러 논서에 대해 강의해 줄 것을 청하였고, 이후 카슈미르에 2년간 머물면서 오전에는 ‘구사론’을, 오후에는 ‘순정리론’을, 그리고 저녁에는 인명론(因明論)과 성명론(聲明論)을 수강하였다.

‘불타정법에 대한 논의 해석’이라는 의미인 아비달마(abhidharma: 對法)는 최초기 아함경설에 대한 해설로부터 시작하여 특정 불교교리와 관련된 온갖 술어를 정리 집성하고 그것들의 정의와 상호관계 등에 대해 논의하는 단계를 거쳐 가다연니자(Kātyāyaniputra, BC. 150∼50 무렵)의 ‘아비달마발지론’에 이르러 마침내 이를 전체적인 하나의 교리체계로 구성하였다. 이로써 불교학의 기초골격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방대한 주석서가 카슈미르 결집에서 편찬된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었다.

▲ 스리나가르에서 국경도시 우리를 거쳐 파키스탄의 아자드(자유) 카슈미르의 주도인 무자파라바드에 이르는 공로 상의 아취형 이정표. 옛날 혜초 스님도, 현장법사도 이 길을 지났고, 세친 역시 이 길을 통해 간다라에서 카슈미르에 입국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경 검문소가 폐쇄되어 통행할 수 없다.

이후 유부교리체계에 대한 크고 작은 해설서가 제작되었는데, 세친(400∼480C.)의 ‘아비달마구사론’도 그 중 하나이다. ‘아비달마의 핵심(要義)을 갈무리(kośa: 攝藏)한 논’이라는 이름답게 후세 가장 완전한 논서로 평가받기도 하였지만, ‘아비달마=불설’론을 비롯한 유부의 학설을 부분적으로 경량부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해설하였기 때문에 카슈미르 유부계통에서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해서 이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부의 정의(正義)를 밝힌 논서가 제작되었는데, 중현의 ‘순정리론’은 바로 그 중의 하나이다. 짐작컨대 현장은 이 두 논서의 강습을 통해 불교철학 제 문제에 관한 기초를 확립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인명(hetuvidyā)과 성명(śabdavidyā)은 일종의 학습방법론으로, 전자가 어떤 주장의 정사(正邪)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논쟁 논리의 학이라면, 후자는 성전 암송과 관련하여 말소리의 장단고하와 굴곡 등을 따지는 일종의 음운학이라 할 수 있다.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에 의하면 당시 인도에서는 특히 성명을 중시하여 이를 익히고 나서야 비로소 인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고, ‘구사론’ 등에 정성을 쏟을 수 있었으며, ‘다문(多聞)’이라는 칭호 또한 성명에 관한 일체의 논서를 학습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후 현장은 당시 새 도성(新城)이었던 스리나가르 동남쪽 10여리에 위치한 불아(佛牙) 스투파가 있는 승도 300의 승가람, 이 가람 남쪽 15여리 관자재보살 입상이 있는 작은 가람, 이로부터 다시 동남 30여리 중현 논사가 ‘순정리론’을 저술한 승도 30의 오래된 가람, 그리고 불아 가람에서 동쪽 10여리 스칸디라(悟入) 대논사가 ‘중사분비바사론’(현존명은 ‘입아비달마론’)을 쓴 작은 가람, 왕성 서북쪽 200리 푸라나(圓滿) 논사가 ‘석비바사론’을 지었다는 상림(商林) 가람, 왕성 서쪽 140∼150리 붓디라(佛地羅) 논사가 ‘대중부집진론(集眞論)’을 지었다는 대중부 가람 등을 순례하고 있다. 과연 불교학의 고향, 불교학의 산실답다. 이곳 카슈미르는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 편찬된 곳이 아니던가? 그런데 이곳은 다 어디인가? 아쉽게도 오늘날 확인된 곳은 아무데도 없다.

그렇더라도 중현 논사가 ‘순정리론’을 지었다는 카슈미르 도성 남동쪽 50여리 떨어진 오래된 가람 터는 찾아보아야 한다. 필자는 오랜 시간 이에 관심을 가져왔고, 카슈미르로의 향수나 답사여행 또한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33호 / 2016년 3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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