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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영 스님과 금산사 만두

간장도 귀한 시절…밥 한 공기, 김치 한쪽으로 대가람 일궈

▲ 일러스트=강병호 작가

완주 송광사 회주 도영 스님은 맑은 눈빛과 미소를 간직한 스님으로 불자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세납으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포교에 대한 열정과 구도심은 출가 당시와 변함이 없다. 스님에게서 느낄 수 있는 맑은 미소는 변함없이 청정한 원력 때문일 것이다.

정화로 대처스님들 쫓겨나자
간장·된장 항아리마저 부셔

500명 대중에 관광객들까지
먹을만한 식량 턱없이 부족

열무국물김치인 ‘싱건지’는
스님이 가장 좋아한 음식

가난한 살림에 양념 적어도
금산사 김장맛 언제나 일품

표고버섯 넣은 만두 별미
부각은 대표적인 제사음식

도영 스님은 1961년 김제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금오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석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금산사 승가대학과 동국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금산사 주지와 조계종 종회의원, 조계종 포교원장을 역임하며 불교 발전과 포교 활성화를 위해 쉼 없이 정진해 왔다.

행자시절, 스님에게 맡겨진 첫 소임은 채공이었다. 출가 당시 금산사는 간장조차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비구·대처 분규로 공양간에는 조리도구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금산사에 기거했던 대처스님들이 사찰 밖으로 쫓겨나자 그 보살들이 조리도구는 물론 간장·된장항아리까지 모두 깨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정화의 혼란 속에 사찰을 재건하는 길은 철저한 계행과 근검 절약 뿐이었다. 당시 금산사 총무 정겨운 스님은 철저하고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대중들은 정겨운 스님의 지도 아래 계율에 따라 생활했고, 푸성귀라도 반드시 부처님 전에 올리고서야 입에 댈 수 있었다.

“불교 내부의 혼돈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금산사는 ‘호남제일’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봄·가을 관광철을 맞으면 하루 400~500명이 다녀갈 만큼 대중적인 도량이었습니다. 금산사 주변은 지세가 험하지 않고 금산사 소유의 논과 채전도 많아 먹고 사는 덴 큰 어려움이 없었어요. 문제는 금산사를 찾아온 분들에게 밥을 주어야 했는데 봄·가을에는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밥을 해대느라 이곳이 식당인지 절인지 모를 정도로 바빴습니다. 때로는 관광객들로 인해 대중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할 정도였지요.”

공양이라야 밥 한 덩이와 국, 김치가 전부였다. 하지만 한꺼번에 500여명이 먹을 공양을 만들려면 공양간 스님들은 쉬지 않고 불을 때 밥을 해야 했다. 때문에 금산사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부목을 비롯해 불을 때는 화목, 산을 관리하는 산감도 있었다. 덧붙여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일 년 내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가야 했다. 김치는 보통 한 번에 200동이씩을 담았는데, 맛은 둘째 치고 그 많은 배추를 절이고 씻고 건지는 일은 웬만한 노동 저리가라 할 정도의 신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놀라운 것은 별다른 양념을 하지 않았는데도 김치의 맛은 그야말로 천하일품이었다.

스님이 유독 좋아하는 김치가 있다. 호남지역에서 ‘싱건지’라고 부르는 열무국물김치다. 스님은 싱건지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담그는 것도 잘했다고 했다. 싱건지는 한 여름 부드러운 열무에 물을 넣어 간을 해 삼삼하게 담근다. 특히 싱건지를 담글 때 열무를 너무 많이 만지면 나중에 풋내가 나서 못 먹는다고 스님은 귀띔했다.

기억에 남는 별식으로는 만두와 부각을 꼽았다. 만두는 스님들이 직접 밀을 갈아 빚은 만두피에 두부와 김치 그리고 숙주나물, 표고버섯, 홍당무 등을 넣어 만들었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직접 만든 두부와 김치, 표고버섯 덕분에 담백하고 풍성한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만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기에 설날에나 먹을 수 있는 특식 중의 특식이었다.

부각 역시 제사 등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는 별미였다. 다양한 부각 가운데 최고는 단연 ‘생강나무잎 부각’과 ‘가죽잎 부각’이다. 생강나무잎 부각 만드는 법은 먼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다음 잎이 시들기 전에 재빨리 찹쌀 풀을 바른다. 햇빛이 강하지 않은 그늘진 응달에 말려두었다가 먹을 때 기름에 튀겨낸다. 가죽잎 부각은 깨끗하고 연한 잎을 골라 깨끗이 씻어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후 볕이 좋은 날 하루 종일 바싹 말렸다가 먹을 때 기름에 튀긴다.

녹차 ‘금로다’는 금산사가 자랑하는 또 하나의 별미다. 금산사 뒷산에는 야생녹차가 즐비한데 이를 따서 정성껏 만든 것이 금로수제차, ‘금로다’다. 금로다가 귀한 이유는 8000여평 녹차 밭에서 봄철 내내 어린 새순과 중간잎을 따 모아도 채 3kg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녹차가 있었기에 차를 마실 수 있었고, 녹차가루를 넣어 시루떡과 백설기를 해 먹기도 했다.

도영 스님은 지난해 완주 송광사에 사찰음식체험관 사운당(四雲堂)을 건립했다. 사운당은 ‘사해의 청풍납자와 단월들이 운집하여 대승(大乘)의 법요(法要)를 구한다’는 의미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사찰음식을 공양하고 후에 큰 서원인 사홍서원을 이루는 곳이 되기를 바라는 스님의 발원이 담겼다.

“사찰에서 음식을 공양하는 목적은 너와 나, 그리고 일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속세에서처럼 쾌락을 위해 혹은 몸을 강하게 하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수행을 제대로 하기 위한 수단이자 약으로서 최소한의 양식만 섭취해야 합니다.”

스님은 일체 음식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어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건지겠다는 서원으로 섭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와 함께 사찰음식에 깃든 ‘수행의 정신’ ‘자비의 정신’을 배우고 되새겨 모든 불자들이 큰 서원의 마음을 갖기를 기원한다. 

정리=김현태 기자 meopi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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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 스님은

금산사에서 월주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9년 금산사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70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금산사 주지, 종회의원, 포교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완주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다.

[1334호 / 2016년 3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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