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호류지(法隆寺)의 재건·비재건 논쟁
6. 호류지(法隆寺)의 재건·비재건 논쟁
  • 주수완
  • 승인 2016.03.22 10: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 호류지 금동석가삼존상은 어떻게 화재에서 살아남았을까?

▲ 일본 나라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 623년. 전체높이 134.3㎝. 백제 공안부(工鞍部) 출신의 도리불사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 나라(奈良)의 고찰 중에서 호류지(法隆寺)는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사찰이다. 아무래도 백제장인으로 전해지는 도리불사(止利佛師)의 불상과 고구려 화가 담징(曇徵)이 그렸다는 벽화, 그리고 ‘구다라관음’이라 불리는 백제관음상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 지난 회에 다룬 아스카데라의 거대한 장육불상을 제작한 구라츠쿠리노도리, 즉 도리불사가 제작한 금동석가삼존상은 일본 학계에서도 복잡한 의문이 뒤엉킨 대표적인 문제작 중 하나이다.

670년 화재로 전소된 사찰에
623년 조성 석가삼존상 존재
호류지 옆 제3절터 와카쿠사가
원 호류지고 현 호류지는 별원
불상은 별원 봉안돼 무사 주장

1930년대 발굴에서 두 가람이
다른 시대 건축물로 판명되며
호류지 불탄 후 재건설에 무게
불상 다른 곳서 옮겨온 것 추정


우선 도리불사가 백제인이라는 추정부터 살펴보면, 근거가 되는 사료는 일본판 ‘삼국유사’라고 할 수 있는 ‘부상략기(扶桑略記)’인데, 이에 의하면 도리불사의 아버지는 ‘백제 공안부(工鞍部) 다수나(多須奈)’라고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다시 그의 할아버지 사마달등(司馬達等)은 ‘대당한인(大唐漢人)’으로 언급되고 있어서 주목된다. 다른 사료에서는 나아가 사마달등이 남조 양나라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기도 한데, 그렇다면 양나라 가족이 2대째에는 백제에 건너와 활동하다 3대째에는 다시금 일본으로 건너가 활약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집안이 중국 남조인 양나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도리 집안이 ‘사마’씨 성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있어서 진(晉)의 창업자인 사마씨의 성씨를 한족, 즉 남조를 대표하는 양나라 출신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도리 집안이 중국 양나라 또는 남조 출신이라고 한다면 도리의 불상 스타일도 남조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야 하지만, 일본에 남아있는 도리의 작품이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불상들은 모두 북조 양식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도리의 할아버지가 남조 출신이었든 아니든 미술사적으로는 도리의 제작스타일에서 남조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한편 ‘일본서기’ 아스카데라 장육상 기록에서 도리를 ‘안작조(鞍作鳥)’로 지칭하고 있는 것과 ‘부상략기’에서 ‘공안부(工鞍部)’로 지칭하고 있는 것에서 말안장을 뜻하는 ‘안(鞍)’이 들어가 있는 것은 원래 이 집안이 말안장을 만드는 공인집단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근래의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Hermes)’가 말안장을 잘 만들던 공방에서 시작한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 백제 무령왕릉 출토 은제 왕비 팔찌. 520년경. 사진의 안쪽에 ‘다리작(多利作)’이란 명문이 보인다. 바깥지름 8㎝.

흥미롭게도 도리는 한반도에서도 흔적을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바로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은으로 만든 왕비의 팔찌 안쪽에 ‘다리작(多利作)’, 즉 ‘다리가 만들었다’고 새겨진 명문이 그것이다. ‘다리’와 ‘도리’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강한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것은 마치 샤넬이나 아르마니처럼 가문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와 유사한 백제의 명품 브랜드 이름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마도리 집안은 더 오래전, 최소한 아스카데라를 만들기 반세기전부터는 백제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던 장인집단으로 볼 수 있다.(그런데 근래 이 부분을 ‘다리작대부인’으로 붙여 읽어 대부인의 이름으로 해석한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다)

여하간 도리는 아스카대불을 성공적으로 주조하고, 이어 봉안까지 책임지고 마친 공로를 인정받아 호류지 금당 석가삼존상 제작을 맡게 되었다. 삼존상의 광배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이 상은 622년에 쇼토쿠 태자의 모친이 사망하고 이어 쇼토쿠 태자 및 왕후마저 병이 들자 그 치유를 기원하며 발원한 상이었다. 명문의 마지막은 “사마안수도리불사작(司馬鞍首止利佛師作)”이라고 제작자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명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호류지는 670년의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고 한다. 석가삼존상이 완성된 것은 623년이었는데, 만약 이 상이 원래부터 호류지에 봉안된 상이었다면 아마도 670년 화재 때 함께 녹아버렸을 것이다. 따라서 이 상은 670년 이후에 제작된 상이거나 아니면 623년 제작되어 다른 곳에 봉안되다가 화재 이후 재건된 호류지에 옮겨온 상이 된다. 그래서 주목된 것이 지금은 호류지의 동원가람이라고 불리는 유메도노(夢殿)가 위치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던 쇼토쿠 태자의 이카루카궁(斑鳩宮)이다. 이곳이 바로 원래의 봉안처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이카루카궁도 실은 쇼토쿠 태자 사후 643년에 그의 일족이 정치적 갈등으로 기습을 받아 몰살되면서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에 그곳에 봉안되었더라면 호류지 화재 이전에 이미 훼손되었을 것이다.

▲ 아스카데라 대불과 닮은 듯 다른 석가삼존상 세부. 일본 아스카 양식을 대표하며, 백제 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아스카대불과 동일한 조각가가 만들었음에도 양식적으로는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아스카대불은 보다 강건하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반면에 호류지상은 정적이고 단아하며 부드러운 인상을 준다. 아스카대불이 고구려 느낌이라면, 호류지 삼존상은 확실히 백제적이다. 과연 한 사람의 작품일까? 만약 아니라면 어느 것이 진짜 도리의 작품일까?

여기에 대해서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어떤 연구자는 호류지와 동원가람 사이에서 새로이 발견된 제3의 절터 와카쿠사(若草) 가람이 원래의 호류지였으며, 현재의 호류지는 이 와카쿠사 가람에 속한 서쪽 별원으로 보았다. ‘일본서기’의 670년 화재 기록은 바로 원래의 호류지인 와카쿠사 가람에 일어난 화재의 기록이며, 도리불사의 석가삼존상은 서쪽 별원인 현재의 호류지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재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은 비단 금당의 석가삼존상 뿐 아니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호류지의 아스카시대 건축을 모두 670년 화재 이후로 보기에는 너무나 옛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화재 이전의 건축과 유물로 보고자 했던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 1868~1935) 등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런데 1930년대에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 와카쿠사 가람터를 발굴한 결과 호류지와 와카쿠사 가람은 서로 건축 축선이 전혀 다른, 다시 말해 서로 다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임이 밝혀졌다. 이는 두 건물이 동시에 있다가 와카쿠사 가람만 불탄 것이 아니라, 와카쿠사 가람이 불탄 후에 호류지가 재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주는 발굴이었다. 때문에 현 호류지의 금당 석가삼존상은 화재 이후 새로 만든 것이거나, 혹은 전혀 다른 장소에 있다가 옮겨온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또한 도리불사가 아스카데라 대불과 호류지 석가삼존상 모두를 만들었다는 기록에 대해서는 일단 호류지상은 광배 명문에 분명히 도리불사가 만들었다고 새겨진 것이고, 아스카 대불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므로, 실제 작품에 명문을 남긴 호류지 쪽이 진짜 도리불사의 작품으로 보는 쪽으로 견해가 기울었다. 아스카데라 기록은 ‘일본서기’ 편찬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도리불사의 명성을 통해 그 가치를 높이려고 덧붙인 이야기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934년부터 진행된 호류지 주요 건축의 해체수리 결과를 종합하여 1950년대에 출간된 저술에서 호류지 금당과 오중탑은 겉보기에는 유사한 양식으로 보이지만, 실은 수십 년의 격차를 두고 금당이 먼저 건축되었다는 새로운 견해가 제시된 것이다. 특히 금당은 건축 내부의 부재도 마치 바깥쪽의 부재처럼 풍화되어 있는데, 이것은 금당 건축이 단번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뼈대만 세워진 채 상당기간 공사가 중단되어 비바람을 맞은 증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오중탑은 670년 화재 이후에 세워진 것이겠지만, 금당만큼은 와카쿠사 가람과 거의 동시대에 이미 세워져 있었거나 혹은 세워지는 중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 호류지 평면도 및 지하의 건축유구 평면도. 왼쪽에 현재의 호류지 서원(西院), 오른쪽에 유메도노(夢殿)가 위치한 동원(東院)이 보이며, 진한 사각형 안에 있는 것이 와카쿠사 가람과 이카루카 궁의 흔적이다.

이렇게 복잡한 호류지의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도리불사가 제작한 석가삼존상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만약 호류지 석가삼존상이 아스카 대불처럼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대형불상이었다면 645년이나 670년의 화재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으로 봤겠지만, 그만큼 큰 상은 아니어서 화재시 이를 밖으로 꺼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혹은 아무리 이동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긴급한 화재 시에 이들 불상을 분해하여 이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보고, 불상이 여러 자리를 이동하며 봉안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처음 쇼토쿠 태자를 위해 제작되었을 때는 와카쿠사 가람에 봉안되었다가 643년 이카루카 궁이 불타고 이후 쇼토쿠 태자를 위해 궁 자리에 사찰이 재건될 때 이를 옮겨와 봉안하였기 때문에 670년 와카쿠사 가람이 화재로 소실될 때 살아남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후 새롭게 호류지가 재건될 때 이카루카에 있던 상을 다시 호류지 금당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높다. 혹시 아스카데라 대불처럼 화재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은 없을까? 어떤 경우는 거짓말처럼 행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 시대의 작품으로 남아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살아남아 있다는 자체가 보통의 행운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그야말로 지금 우리가 도리불사의 석가삼존상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적 같은 일이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36호 / 2016년 3월 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