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 최기영 대목장

천년 가는 이음새에 나무·인간·자연, 목수의 혼 불어넣다

▲ “천년 가는 집 짓는, 나는 목수”라고 자신을 표현한 최기영 대목장은 55년 동안 전통건물 한옥의 자연미를 찾는 길을 걷고 있다.

첫 탑 기둥 세우던 날, 백제는 망했다.

그날 밤, 장인 아비지(阿非知) 꿈에는 고국 백제가 망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의심스러웠던 아비지는 일손을 놨다. 그러자 홀연 땅이 진동하고 볕이 사라졌다. 한 노승과 장사가 금당(金堂) 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자취를 감췄다. 백제의 운이 다함을 깨달은 아비지는 탑을 완성했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대조 할아버지 국보 1호 건립
가난한 형편서 태어나 17살 때
61년 사찰 짓는 목수 기문 입문
김덕희·김중희 도편수 스승 삼아
달빛에 종이 비추며 목수일 배워

탄허·청화 스님 스승 삼아 존경
목수로서 분수 깨닫고 외길고집

무심한 듯 천년이 흘렀고, 그 목탑을 품에 안은 목수가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20대조 할아버지도 목수였다. 죽정(竹亭) 최유경(1343~1413)은 조선초 1393년 축성도감에 임명돼 한양성을 축조하면서 숭례문(국보 1호)을 세웠다. 전주성 축조 때는 풍남문(보물 308호)을 건립했다. 역사적 인물의 후손은 600여년 세월이 지나서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이 됐다. 최기영(72) 대목장(大木匠)이다.

 
▲ 마음 정화시키는 세계 제일 명품 한옥을 짓는 지혜를 전수하고자 노력 중인 최기영 대목장은 그 아름다움 설명에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2008년 2월 어느 날 밤, 그의 영혼이 무너져 내렸다. 숭례문은 화마에 휩싸인 채 하염없이 검은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숭례문을 바라보는 심정도 검게 물들어갔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대목장인 그의 눈앞에서 선조가 지은 국보가 버젓이 잿더미로 변하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죄를 어찌 다 씻는단 말인가. 죽어서 최유경 할아버지를 어떻게 뵌단 말인가….’

숙명 같은 목수의 인생이 탄식에 섞여 흘러나왔다. 피는 물보다 진했다. 뒤늦게 알았다. 5살 때 사별했던 아버지도 목수였다. 가정형편은 생계조차 막막한 빈궁한 지경이었다. 나라 안은 광복의 기쁨으로 넘쳐났지만 집에는 근심만 가득했다. 목수일로 근근이 식구들 입에 풀칠하던 아버지는 집을 나간 뒤 객사했다는 소문으로 행방을 알렸다. 한국전쟁으로 나라 안은 피바람이 불었다. 이 막막한 세상에 홀로 남게 됐다. 어머니는 재가했고 이복동생들이 생겼다. 수덕국민학교를 다녔지만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공부가 아니었다. 산에 가서 나무 하고 들에 가서 소나 돼지에게 먹일 꼴을 벴다. 남의 집에 가서 일하고 품삯을 받기도 했고, 논이나 개울에서 미꾸라지 등을 잡아 팔기도 했다. 어른이든 아이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만 겨우 목구멍에 밥 한 술 넘길 수 있었다.

가난은 소년을 일찍 철들게 했다. 의부가 배워야 산다며 보낸 서당에서 4년간 한학을 공부하다 먹고 살 궁리를 했다. 서당 훈장 큰아들이 목수였고, 통사정을 했다. 돈을 벌고 싶으니 목수일을 가르쳐달라고…. 마지못해 데리고 다니겠다는 약속을 했다.

“인사드리거라. 스승님이시다.”

당대 최고 도편수 김덕희 선생 앞에 섰다. 새끼목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수덕사 대웅전 해체복원을 한 뒤 그곳에 머물던 스승을 만났다. 그때가 1961년이었다. 전통한옥 건축에서 대목 영역은 크게 두 갈래로 이어져왔다. 궁궐과 사찰이다. 이 두 영역에는 도제식 교육으로 비법을 전수해온 기문(技門, 혈연 아닌 기술을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만들어진 가문)이 있다. 궁궐은 대한제국시대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을 복원한 최원식 도편수로부터 조원재·이광규·신응수 대목장으로 이어지는 기문이고, 사찰은 조선 제일 목수로 불렸던 김덕희 도편수로부터 김중희·최기영 기문으로 이어졌다.

김덕희 도편수는 어릴 때부터 동생이자 제자인 김중희 도편수와 함께 일했다. 제자는 그저 시키는 대로 잔심부름이나 하고 힘쓰는 일에 동원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배불리 밥 먹여주고 따듯한 방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고 감사했다. 소나무 껍질을 밀가루 죽에 넣어서 같이 끓여먹던 시절이었다. 일당이니 월급이니 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목숨을 걸었다.

▲ ‘목수고집’
최기영 지음 / 예경
목수는 대목과 소목으로 나뉜다. 대목은 궁궐, 사찰, 민가 등 집 짓는 일을 하는 목수이며 소목은 장롱, 책장, 소반 등 가구를 만드는 목수다. 예부터 철저히 도제식으로 전수돼 왔다. 일가를 이룬 스승 밑에서 배워야 했다. 그만이 알고 있는 비법을 전수받으려면 종살이하듯 지독한 도제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쉴 틈 없이 일하는 와중에 곁눈질로 혹은 어깨너머로 주워들으며 스승의 비법을 익혀야 했다. 나무를 들어 옮기고, 도끼질과 자귀질을 하고, 대패질로 나무를 다듬고, 끌질과 망치질을 통해 기둥과 보 등 구조물의 윤곽들이 하나둘 드러날 때마다 허투루 보지 않았다. 마치 사진 찍듯 눈으로 찍어 머리에 차곡차곡 입력시켰다. 용어나 수치도 그대로 암기했다. 비싼 연장을 써보기 위해 선배들 연장을 수리하며 빌려 썼다. 두 가지 덕을 봤다. 연장 사용과 연장의 특성을 익혀 날을 갈고 수리하는 법을 터득했다. 언제까지 빌려 쓸 수 없어 대장간에 가서 직접 만들어 썼다.

스승 일행을 따라 전국을 떠돌았다. 강원 평창 월정사와 상원사, 원주 치악산 상원사, 서울 관음사와 창경궁, 덕수궁으로 다녔다. 스승이 한지에 도면 그리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에 가슴이 뛰었다. 익힌 것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밤중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창경궁과 덕수궁 담장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손전등으로 처마와 기둥 등을 비추며 생김새 하나하나 대패질 하나하나를 기억과 대조해 암기했다. 손전등이 없으면 종이를 가지고 가서 달빛에 종이를 비추며 어른거리는 건축물의 윤곽을 눈으로 새겼다.

“그냥 배우면 평생 평범한 목수가 될 뿐이여. 두 사람이 목수일 배울 때 왜 한 사람은 도편수가 되겠어. 다른 사람이 잘 때 생각하고 도면이라도 그려보고 구조를 맞춰보고 자면서 꿈에서라도 연구하는 사람이 도편수가 되는 거여. 대목장은 기둥 크기나 공간의 높낮이, 너비를 다 고려해 집에서 살아갈 사람의 삶까지 설계하는 목수여. 난 초등학교만 나왔어. 천만번 이상 생각하고 되새기고 실험해보면서 자연미를 담은 한옥의 구조학을 깨쳤어.”

목수로서 처음 참여한 공사는 수덕사 일주문이었다. 불연(佛緣)이었다. 월정사 공사를 할 때 당시 주지였던 탄허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금과옥조 같은 설법을 들으며 혼자 은사로 모시고 출가를 결심하기도 했다. 목수로서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반드시 지켜야할 분수의 도리를 일깨워 준 분이 청화 스님이다. 스님은 평생 베개와 침구가 없었다. 항상 앉아서 주무셨기에 좌복 하나면 충분했다. 일일일식하면서 말없이 가르침을 주신 분이다. 뵙고 싶은 마음에 먼 길 마다않고 찾아갈 때마다 손수 차를 주시면서 피와 살이 되는 귀한 법문을 들려주셨다. 시주하듯 청화 스님이 기거하던 명선암과 참선공간 원각선원을 지었다.

“부처님 공덕으로 큰스님께 좋은 말씀 들으면서 분수도 알고 갈 길도 정하고 판단했어. 사람마다 명분에 맞는 빛깔이 있는데 그걸 오해하고 과욕 부리면 움직이는 물건에 불과해. 그렇게 대목장까지 왔으니 부처님 공덕이지.”

1968년 스승으로부터 독립했다. 7년 만이었다. 스승이 보여준 길을 스스로 찾아가 자신의 경지를 만들어내는 게 장인이라 믿었다. 남의 연장 망가뜨려가며 일 배우고, 검정 고무신으로 땅바닥에 그려가면서 초화지(草花枝) 문양을 익힌 것은 스스로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이음새 하나가 천년을 간다는 한결같은 믿음으로 목수로 살았다. 소나무는 천년을 산다. 그 후 목수 손을 빌어 다시 천년을 산다. 그래서 수명이 2천년이다. 당대 사람들이 한옥의 멋과 맛을 제대로 알고 느끼며, 후대 사람들이 도도한 역사성을 되짚어볼 수 있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애써왔다. 정읍 내장사 명부전과 피양전,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갑사 대웅전, 장수 논개사당 본전과 숭앙문, 강진 다산초당 동암과 서암, 무위사 극락보전과 사천왕문, 순천 송광사 육감정, 경기 광주 남한산성 수어장대와 국청사, 서대문 관음사 대웅전, 양평 용문사 대웅전과 요사채, 영월 법흥사 무설전, 영주 부석사 설법전, 강화 보문사 대웅전과 관음전, 서울 봉은사 설법전, 여수 향일암 일주문 등 수백채에 달하는 건축물들을 고쳐서 되살리거나 새로 지었다. 국보 15호 경북 안동 봉정사 극락전 해체보수, 탄허 스님과 대행 스님으로 이어진 인연으로 짓게 된 음성과 부산의 한마음선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목조건물 187동을 신축했으며 능사 5층 목탑도 세웠다.

“사방 8미터에 불과한 땅에 올려놨는데, 안 넘어가. 내가 지었지만 참 신기해. 자부심 느껴.”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 사는 곳에는 집이 있다. 이 단순한 명제는 전통건축의 근간을 이룬다. 모든 한옥의 지붕이 사람 인(人) 자로부터 시작되는 이유다. 그래서 한옥은 흙과 돌과 나무 그리고 바람이 지은 집이라 불린다.

“한옥(韓屋)의 옥자는 보배[鈺]여. 명품인거여. 온갖 자연에서 나는 재료로 만드는 집이고 여기서 사는 물건도 자연에서 난 사람이잖어. 살 부비고 사니 얼마나 자연스러우냐 이 말이여. 이 맛과 멋을 알리기 위해 제자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야 해. 삼국시대 건축의 짜임새를 보여줄 수 있는 구조학 하나 해놓고 죽는 게 소원이야.”

‘목수 최기영’은 나무 쓰임새를 알고 분수에 맞게 결구해 집을 만든다. 목수(木手)다. 체구는 작지만 ‘거목(巨木)’으로 섰다. 그는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을 꿈꾼다. 이미 인생이라는 터에 9층 목탑을 쌓아 올렸는지도 모른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현존 최고 목조건축부터 백제문화 복원까지

안동 봉정사·능사 5층 목탑 등
내로라하는 전통건축 공사참여

▲ 부여 백제문화단지 능사 5층 목탑.

최기영 대목장이 진두지휘 하지 않은 국내 전통건축 현장은 사실상 없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해체보수부터 백제문화단지 복원까지 그가 나무를 고르고 대패질 했다.

안동을 대표하는 사찰 봉정사에는 국보 제15호인 극락전이 있다. 1972년 해체복원되면서 상량문이 발견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밀어내고 최고(最古) 목조건축물이 됐다.

그는 2001년 9월부터 2003년 8월까지 진행된 대대적인 해체복원공사에 참여했다. 과도한 하중을 견디지 못해 처마 부분이 처지는 현상이 발생해서다. 역사의 무게와 상징성 탓에 부담이었지만 그는 훌륭하게 마무리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썼던 문제점을 발견하고 가장 좋은 소나무인 황장목으로 바꿨다.

▲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 안동 봉정사 극락전.

▲ 곡성 태안사 명선암.

목수로서 지혜와 역량을 쏟아 부은 부여 백제문화단지 내 능사 5층 목탑은 걸작이다. 백제 특유 하앙식 기법으로 국내 최초로 37.5미터 높이의 능사 5층 목탑을 건립했다. 철근 하나 못 하나 쓰지 않고 나무와 나무의 결구로만 쌓아올린 탑이다.

▲ 경주 월정교 야경.

청빈과 무소유 실천자이자 현대 염불선 주창자로 불리는 청화(1924~2003) 스님이 기거하던 곡성 태안사 명선암과 원각선원(圓覺禪院)도 그가 시주하듯 나무 이음새를 맞췄다. 조선초 건축물 가운데 빼어난 걸작으로 꼽히는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보수도,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일화가 서린 경주 월정교 복원도 ‘목수 최기영’ 솜씨다.

   


[1337호 / 2016년 3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