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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람이 음식에 먹히면 안됩니다”

기자명 김택근

▲ 가야산 백련암 경내를 걷고 있는 성철 스님 모습.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피울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 친구요, 꾸밈없는 천진함은 진불(眞佛)의 소식과 같다."

성철은 가야산 백련암에만 머물렀다. 명성이 가야산만큼 우뚝해서 이름이 세간으로 흘러내렸다. 성철을 친견하려 사람들은 백련암으로 올라왔다. 그중에는 인생의 답을 찾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성철의 제자들은 성철의 법문을 듣고 감화를 받아 삭발한 경우가 많았다. 또 삼천 배를 하고 친견 했을 때의 ‘특별한 느낌’ 때문에 다시 찾아온 이들도 있다. 성철은 그들에게 무심히 물었다.

“왜 왔나?”

집 떠나온 젊은이들의 말대답이 다소 다르긴 했지만 그 뜻은 하나였다.

“깨달음에 이르고 싶습니다.”
“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면 성철은 한동안 젊은이를 응시했다. 그 눈길 속에는 기대와 우려가 섞여 있었다. 아마도 근기와 결기까지를 헤아려보았을 것이다. 처음 성철을 본 사람은 모두 안광에 압도당했다. 그 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속으로 되뇌었다.

‘과연 도인이구나.’

그러나 도인의 길은 멀고 험했다. 고달픈 행자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산문을 빠져나간 이들이 많았다. 성철은 배운 사람을 선호하여 ‘대학생 제자’가 많다는 얘기가 떠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소위 ‘대학 물’을 먹은 제자는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성철은 학벌이나 과거나 출신 등을 묻지 않았다. 영민하고 부처님 말씀을 잘 새기는 젊은이를 좋아했을 뿐이다.

처음에는 삼천 배, 일만 배를 시키며 하심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행자가 되면 우선 능엄주를 외우게 했다.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는 주문이다. 보통 3주일에서 한 달이 지나면 외울 수 있었지만 불과 2주 만에 외워버리는 행자도 있었다. 그러나 몇 달이 걸려도 외우지 못하면 스스로 산을 내려가야 했다. 또 한문 경전을 읽으려면 문리(文理)를 터득해야 한다며 유교 경전인 사서(四書)도 외우게 했다. 행자들은 대학-중용-논어-맹자 순으로 사서를 읽었다.

또 일본어를 익히도록 했다. 당시는 한글 경전이 드물어 일본 경전으로 공부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행자들은 자습서로 문법을 익히고, 일본소설을 본 후 불교성전을 읽었다. 책은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성철이 주는 책만을 읽어야 했다. 보통 출가한 지 반년이 지나면 첫 책을 주는데 부처님 일대기를 비롯하여 ‘법구경’ ‘아함경’ ‘열반경’ ‘법화경’ 등 40여권의 경전과 해설서를 읽게 했다. 책들은 거의 일어판이었고, 이들 불서를 읽는 데는 2~3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화두를 받았다. 그런 후에야 제자들은 선방에 들 수 있었다.

백련암의 하루는 성철의 염불소리로 열렸다.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 성철이 백팔 배를 드릴 때쯤에서야 새벽 목탁(도량석)이 울렸다. 새벽 3시 무명을 쫓아내고 여명을 부르는 목탁소리가 경내 모든 것들을 깨웠다. 큰절 해인사에서부터 작은 암자에 이르기까지 가야산 속의 승려들은 모두 일어났다. 경내에 들어와 부처님 품안에 잠들어 있던 생명붙이가 다시 산 속 제자리로 돌아갔다.

촛불과 향을 피우며 새벽 예불이 시작됐다. 예불은 오분향례, 능엄주 독송, 발원문 낭독의 순으로 진행했다. 오분향례는 새벽 산사를 향기로 장엄했다.

“계율의 향기, 삼매의 향기, 지혜의 향기, 해탈의 향기, 해탈 지견의 향기 광명의 구름 되어 법계에 두루두루 모든 곳 한량없이 계시는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 거룩한 스님들께 공양하옵니다. 헌향진언 옴 바아라 도비야 훔(…)”

예불은 새벽 4시쯤 끝났다. 예불 후에는 각자가 흩어져 정진을 했다. 행자들은 삼백 배나 오백 배를 하고 스님들은 경을 읽거나 참선에 들었다.

5시가 되면 누구는 공양간으로, 누구는 채공간으로 갔다.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하루를 열었다.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마련했다. 대중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은 참으로 성스러운 일이었다. 음식은 정성이었고 하나하나가 수행이요 정진이었다. 나물을 무칠 때는 나물만을, 국을 끓일 때는 국만을 생각해야 했다. 나물 맛이, 국 맛이 곧 공부의 깊이였다.

성철의 공양은 별도의 장소에서 따로 만들었다. 성철의 공양상이 들어간 후에 큰방에서 대중들이 공양을 했다. 성철의 밥상은 늘 단순 초라했다. 무염식에 쑥갓 대여섯 줄기, 가늘게 썬 당근 몇 조각, 검은 콩 자반 한 숟가락이 전부였다. 밥그릇은 어린아이 것처럼 작았다. 아침에는 밥 대신 흰죽 반 그릇을 들었다. 성철은 소금기 없는 음식을 오래오래 씹어 맛있게 삼켰다. 제자들이 보기에 100번도 더 씹는 듯했다. 평생 간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런 성철을 보고 건강을 걱정했다.

“그렇게 드시고도 괜찮습니까?”
“음식에 먹히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적게 먹고, 세상에서 맛있다는 것은 안 먹습니다.”

공양을 마치면 일제히 청소를 했다. 성철이 머무는 염화실 청소는 휴지 한 장을 뽑아서 반으로 갈라 휴지통 위에 놓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성철은 언제나 휴지를 반장씩만 쓰기 때문이었다.

성철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었다. 어떤 때는 반쪽짜리 화장지도 네 조각, 여섯 조각으로 나눠썼다. 이쑤시개도 버리지 않고 놔뒀다가 깎고 또 깎아서 다시 썼다. 새벽에 향불을 지필 때는 사각 성냥 통을 사용했다. 성냥 알이 떨어지면 알만 다시 사오라고 했다. 성냥 통도 반질반질하게 닳아서 불이 붙지 않을 때까지 썼다. 양말이 떨어지면 손수 꿰매 신었다. 바느질 솜씨가 누구보다 좋았다. 고희를 넘기고도 옷가지나 내복을 기워 입었다.

신도들은 대개 오후에 찾아왔다. 성철을 친견하려면 삼천 배를 해야 했다. 어른들은 삼천 배를 하고 아이들은 성철과 함께 놀았다. 성철은 아이들만 보면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삼천 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예외였다. 껴안아주고 볼을 꼬집으며 함께 놀았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런데 꽃보다 더 아름다운 건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놀러와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피울 때가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아이들은 내 친구요, 꾸밈없는 천진함은 진불(眞佛)의 소식과 같다. 사람이 깨달아 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마음이 되면, 산이 물 위로 간다는 소식이 환하게 드러나니 그것이 바로 깨침의 경지이다.”

섬돌 끝 등의자에 앉아 있다가 아이들이 밀어버려 오른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그래도 성철은 웃었다.

오후 5시에 저녁공양을, 7시에는 저녁 예불을 드렸다. 예불이 끝나면 각자 책을 읽거나 참선을 했다. 그리고 몇이서는 염화실에 들러 성철의 어깨를 주물렀다. 백련암의 밤은 평화 그 자체였다. 시간이 느슨하게 어둠 속으로 풀어졌다.

밤 9시 삼경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절 식구들이 잠이 들면 비로소 가야산 봉우리들이 백련암 작은 뜰로 내려와 앉았다.

성철은 천제굴, 성전암의 ‘10년 상좌’들에게는 천제, 만수, 성일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그리고 그 후 제자들에게 법명으로 원(圓)자를 주었다. 성철이 삼천 배를 한 사람들에게 원상(圓相)을 그려준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원상(동그라미)은 깨달음을 상징했다. 처음도 끝도 없음이니, 불생불멸, 부증불감을 나타낸 것이었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선방을 지키며 다른 데 눈을 돌리지 말라 일렀다. 말사 주지는 물론이요 큰절(해인사)의 삼직도 맡지 말고 묵묵히 수행에만 전념하라고 했다. 제자들은 거의가 스승의 뜻을 따라 문중에서 세운 절 외에는 어떤 소임도 맡지 않았다.

천제, 만수, 성열, 원기, 원명, 원정, 원융, 원택, 원타, 원해, 원행, 원안, 원천, 원담, 원영, 원소, 원여, 원규, 원당, 원일, 원암, 원서, 원인, 원유, 원종, 원명, 원순….

제자들이 본 성철의 면모는 어땠을까.

“한국불교의 기준을 세우셨다.” (천제)
“생이지지(生而知之)하신 분이다. 귀에서 나는 소리[耳鳴]는 자신밖에 듣지 못하듯 공부도 그러하니, 양
심에 따라 공부하라 이르셨다.” (만수)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철저한 수행자였다. 자신과 남에게 약속한 것은 끝까지 지키고 실천하셨다.” (원규)
“출가한 후로 성철 큰스님 같이 선교율(禪敎律)에 대해서 이론과 실천과 수행력을 완벽하게 겸비한 스님을 아직 본 적이 없다.” (원소)
“해인사 퇴설당에 계시다가도 갑자기 백련암 장경각에 있는 경전이나 어록을 가져오라 했다.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찾나 난감해 하고 있으면 ‘그 책은 몇 번째 책장, 몇 번째 칸, 몇 번째 줄에 있다’고 일러주셨다. 장경각에 들어가 찾아보면 정말 말씀하신 자리에 어김없이 꽂혀있었다.” (원당)
“스님은 양심을 가르치셨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 한 마디에 모든 가르침이 녹아 있다.” (원순)
“스님이란 공부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들은 후 다른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다.” (원영)
“천둥번개와 같은 선의 가르침을 주셨다.” (원유)
“스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출가해 스님이 된 것에 무한한 자부심을 심어주셨다.” (원타)
“스님께서는 우리더러 꿈에서 깨라 하셨다. 이왕 사람 모습 받았으니 죽기 살기로 공부해 본래면목을 찾으라 당부하셨다.” (원해)
“평생 돈오돈수를 설파했는데도 이를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원택)
“선의 대중화를 간절히 원하셨다. 불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견성즉불은 ‘자기를 바로봅시다’로, 보현행원은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 산다’로 말씀하셨다.” (원여)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았던 어른이시다. 새벽 예불부터 취침까지 하루 일과를 절대 어기지 않았다.” (원행)
“중은 계(戒)가 생명이라 하셨다. 그런데 요새 계는 바다로 갔는지 똑바로 행하라는 계가 옆으로만 가는 게가 되어버렸다고 일갈하셨다.” (원암)
“후학들에게 깨치는 방법을 가르치려 무던히 힘쓰셨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은 큰스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원담)
“말로서가 아니라 수행정진이라는 행으로 후학들을 가르쳐야 함을 깨우쳐 주셨다.” (인홍)
“스님의 법문은 차원이 달랐다. 우리는 3차원에 살고 큰스님께서는 4차원에 사시는 것 같았다.” (혜춘)
“중노릇이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주고 심어주신 분이다.” (묘엄)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38호 / 2016년 4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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