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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삼화령과 생의사 석미륵

기자명 주수완

경주 삼화령 미륵삼존불은 삼국유사 속 ‘생의사 석미륵’

▲ 경주 남산 장창곡 출토 석조삼존불상. 좌로부터 우협시보살 100㎝, 본존의좌불 162㎝, 좌협시보살 90.8㎝, 신라 7세기 초,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의 대표 유물 중 하나인 삼화령 미륵삼존불은 특히 협시보살이 귀엽고 예쁘기로 유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해외전시에 협시보살상 중 한분만 별도로 모셔다 단골로 출품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신라, 나아가 우리나라 불심의 얼굴을 대표하는 상이라 할만하다. 이들 보살상이 귀여워 보이는 이유는 흔히 동형(童形) 비례, 즉 어린 아이와 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어린 아이들의 비례가 인체에 비해 머리가 큰 것에 빗대어 설명한 것이다.

본존불은 경주 남산 장창곡의
고분석실처럼 생긴 곳서 출토
보살상은 산 아래 마을서 발견

불·보살 모두 박물관 옮겨 전시
삼국유사 속 ‘생의사 석미륵’편
석불상이라는 견해가 지배적

남산 삼화령은 장창곡 아니라
정상 금오봉 남쪽 봉우리 반론
삼화령의 위치 놓고 의견 분분

그러나 어찌 머리가 커보인다고 다 귀여울 수 있을까? 이는 단지 머리만 큰 것이 아니라 상체와 하체의 비례도 섬세하게 조정하고 인체도 통통한 듯 여린 듯 생동감이 있으며, 얼굴의 표정도 그에 걸맞게 순진무구한 미소를 띠게 만든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유명한 삼존불이 삼화령 미륵삼존불로 불리는 것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애초 이들 불상이 삼화령 미륵삼존불로 불리게 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원래 이들 불상은 한 곳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었다. 조연인 협시보살보다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주연인 본존불은 경주 남산의 장창곡에서 1925년 발견되었는데, 남산이 남북으로 길게 누워있다고 볼 때 장창곡은 정상인 금오봉으로부터 북쪽 기슭에 위치한다. 발견된 주변으로는 신라 무덤들도 분포하고 있는데 이 불상도 마치 고분석실처럼 보이는 곳에서 출토되었다.

한편 보살상은 본존불이 발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서 산 아래로 내려와 있는 탑동 마을의 한 민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위치나 석재, 그리고 조각수법을 보면 원래는 장창곡에서 발견된 본존불상의 협시로서 삼존불로 구성된 것이 틀림없는 듯하고 장창곡에서 옮겨왔다는 증언도 있었다.

본존불이 발견된 장창곡의 원래 터에는 지금은 돌기둥 같은 것이 몇 개 서있을 뿐인데, 발견 당시의 사진을 보면 마치 석굴을 의도한 듯한 석실 안에 봉안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돌기둥 같은 큰 돌들을 마치 스톤헨지처럼 둘러 세우고, 그 틈을 납작한 돌들로 메워서 벽을 만든 구조로 보인다. 본존불은 벽 안쪽 깊숙이 안치되어 있는데, 그 앞으로 협시보살 두 구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이 구조를 고분으로 보고 석불상을 매장한 개념으로 본 반면, 해방 후 우리 연구자들은 석조감실의 구조로 보고자 했다.

▲ ‘慶州南山の佛蹟’에 실린 1925년 장창곡 석실에서 발견될 당시의 본존불의좌상.

장창곡과 탑동에서 발견된 이들 불·보살상들은 이후 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되었는데, 때문에 장창곡의 석실 유적은 관리가 되지 않고 훼손되어 거의 원래의 모습을 잃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석굴암 이전 인공석굴 형태의 구조물로서 원형이 될 수도 있었을 귀중한 사료가 사라진 셈이다. 여하간 이렇게 장창곡에서 옮겨와 전시되던 불상들이 삼화령이라는 또 다른 경주 남산의 지명을 딴 불상으로 불리게 된 것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설화 때문이었다. 1969년 고(故) 황수영 박사의 견해에 의하면 장창곡에서 발견된 불상은 바로 ‘삼국유사’의 ‘생의사 석미륵’에 등장하는 석불상이라는 것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선덕여왕 당시에 도중사(道中寺)의 생의(生義)라는 스님이 꿈에 어떤 스님을 따라 남산을 올라가 보니 그 스님이 자신이 묻혀있는 곳을 알려주고는 산 남쪽 어귀(南洞)로 내려와 당부하길 자신을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생의는 깨어난 후 꿈속에서 스님이 알려준 곳에 가 땅을 파보았는데 그 안에서 돌로 만든 미륵상이 나왔다. 그래서 이를 꿈속의 계시에 따라 삼화령 고개에 모셨으며 선덕왕 13년 갑진년(644)에 절을 지어 생의사라 이름 짓고 거기서 살았다는 내용이다. 아마도 이때 세운 절이 바로 본존불이 발견된 장창곡의 석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장창곡의 원래 이름은 삼화령이었고, 생의가 발견한 불상이 미륵불이었으므로 삼화령 미륵불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삼화령 미륵불은 ‘삼국유사’ 기이 제2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기사에 다시 등장한다. 즉 765년 3월3일, 경덕왕이 월성 귀정문에 올라 신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위의를 갖춘 승려를 모셔와 줄 것을 지시하자 신하들이 나름대로 깔끔한 승려 한분을 모셔왔는데 경덕왕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다시금 거리로 나가 다소 수더분하면서도 뒤에 삼태기를 맨 승려 한분을 모셔왔는데 경덕왕이 흡족하여 정중히 대화를 나누었다. 이 승려가 바로 충담사(忠談師)였으며 매년 3월3일과 9월9일마다 삼화령의 미륵부처님을 찾아 차를 공양하는데 그날 3월3일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리고 경덕왕에게도 차를 대접하니 그 맛이 매우 그윽했다고 한다. 이에 이미 그의 ‘찬기파랑가’를 익히 알고 있던 경덕왕이 특별히 요청하므로 ‘안민가’를 지어 바치자, 왕이 감동하여 왕사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고 떠나왔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두 내용을 통해 선덕왕 재위 시절인 7세기 전반에 석미륵이 봉안된 생의사가 삼화령에 세워졌으며, 이 절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대인 8세기 전반까지도 미륵불상이 봉안된 절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장창곡 불상을 바로 이 ‘삼국유사’ 속 삼화령 생의사 석미륵으로 보는 것은 우선 남산이라고 하는 공간적 배경이 같고, 장창곡에서 발견된 불상은 조각양식과 기법으로 보아 생의사 석미륵이 봉안된 644년 전후의 불상으로 보이므로 시간적 배경도 유사하며, 특히 발견된 불상이 ‘석미륵’이었는데, 본존불의 도상이 의자에 앉은 형식이어서 미륵으로 볼 수 있으므로 설화 속 불상과 존명이 같기 때문이었다.

▲ 경주 남산에서 원래 삼화령으로 불리던 곳에 있는 석조불상대좌.

우리나라에서는 의자에 앉아계신 불상을 대체로 미륵불로 보고 있다. 아울러 경주 남산에 많은 불상이 있지만 삼국시대의 불상은 드물며, 특히 마애불이 아닌, 환조 형태의 불상은 극히 드물어 장창곡 불상이 바로 생의사 석미륵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우선 당시까지 알려진 남산 삼화령은 장창곡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전부터 알려진 삼화령은 장창곡과는 달리 정상인 금오봉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한 봉우리이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로도 불렸는데, 수리(頂)는 곧 봉우리이며 남산의 금오봉, 고위봉, 그리고 삼화령이 서로 삼각형을 이루는 지세라고 한다. 그 남쪽 삼화령에는 넓고 높은 자연 암반 위에 커다란 연화대좌를 조각해놓은 것이 남아있는데, 바로 이 자리가 원래 충담사가 차를 다려 바쳤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던 자리라는 것이다. 현재도 이곳에서 불자들이 헌다 의식을 거행하고는 한다.

때문에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삼화령의 위치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남쪽의 삼화령을 주장하는 사람은 ‘삼국유사’에서 꿈속에 나타난 승려가 생의 스님에게 “남산 남쪽에 이르러…” 당부했다는 내용을 근거로 삼화령은 남산 남쪽에 있어야 한다고 하고, 더불어 꿈속 승려가 “고개 위에 안치해 달라”고 주문한 것을 들어 봉우리 같은 정상부가 삼화령 불상이 안치되기에 적합하다고도 한다. 반면 북쪽의 장창곡을 삼화령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그 주변에 오래된 무덤들이 있는 것을 들어 그 중에 세 명의 화랑의 무덤이 예로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곳을 ‘삼화령’으로 불렀다며 지명의 유래를 풀기도 했다.

아직 논쟁은 진행중이다. 그래서 삼화령 불상도 발견지의 지명을 따서 장창곡 삼존석불로 더 많이 불리는 추세다. ‘삼화령’이라고 구전되는 봉우리가 분명히 존재하니 혼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 “산 남쪽에 이르러…”라고 한 부분은 일단 불상이 묻혀있는 곳을 알려준 다음 산을 내려와 한 이야기로 생각되므로 그 문장에서 ‘남쪽’이라고 했다고 해서 반드시 불상을 안치한 삼화령이 남산 남쪽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도적인 해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장창곡이 삼화령이 아닐지라도 그곳에서 발견된 불상의 원위치는 현재의 장창곡이 아니라 지금의 삼화령 불대좌, 혹은 그 근처 어디에 봉안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신라시대에 삼화령이 지칭하는 고개와 현재의 삼화령이 지칭하는 고개가 달라졌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여하간 다양한 주장 속에서 미술사학자들이 장창곡 석불상을 생의사 석미륵으로 보고자 하는 끈을 놓지 않는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만약 이 불상이 정말로 생의사 석미륵이 맞다면, 이미 삼국시대에 의자에 앉은 불상을 미륵불로 보았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되며, 더불어 정확히 644년은 아닐지라도 그 때를 전후한 비교적 정확한 연대를 가진 불상을 한국조각사에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유혹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라는 컨텐츠도 확보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정황이 삼화령 불상을 생의사 석미륵으로 보는데 일조하고 있는 듯하다. 오직 단 하나! 바로 그 또 하나의 ‘삼화령’만 없다면 말이다. 아, 정녕 이렇듯 완벽하기란 어려운 것이란 말인가.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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