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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종정이란 고깔모자를 쓰다

기자명 김택근

▲ 신군부 세력은 10·27법난을 일으켜 승려들의 비리를 조작하거나 부풀려서 세상에 내놓았고 언론은 이를 여과 없이 받아 퍼뜨렸다. 갑자기 사찰은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사진은 10·27법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1998년 10월27일 동국대에서 열린 불교도 실천대회 모습. 법보신문 자료사진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 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외치며 나름 사회적 지탄을 받는 무리를 골라 정조준했다. 이때 ‘만만한’ 과녁이 불교였다.”

1980년 10월27일 새벽,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사찰에 난입했다. 스님과 불교계 인사 153명을 연행했다. ‘10·27법난’의 시작이었다. 명분은 불교계 정화였다. 10월 마지막 날에는 군인 3만 2000여명을 풀어 전국 사찰과 암자 5731곳을 뒤졌다. 군홧발로 법당을 짓밟았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까지 수색을 당했다. 조계종의 상징이며 불교계 성지인 봉암사에도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전두환 대통령을 지지하라는 신군부의 강요를 거절했던” 조계종 총무원장 월주 스님은 서빙고 지하실에 끌려가 27일간 감금당했고 결국 총무원장직을 내놓아야 했다.

전대미문의 폭거였다. 신군부 군인들은 빨갱이와 깡패, 그리고 불순분자를 가려내겠다며 승려 1776명을 붙잡아 갔다. 승복을 벗기고 죄수복으로 갈아입혔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몽둥이로 내리쳤다. 누구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고, 누구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또 누구는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내보여야 했고, 또 누구는 감금당한 채 강제로 참선 교육을 받아야 했다.

공포심에, 수치심에 눈물을 흘렸지만 부처님은 멀리 계셨다. 부처님을 지켜드리지 못했으니 어찌 가피를 바라겠는가. 석불도 목불도 철불도 인간이 그 앞에서 절을 올릴 때만 부처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 세력은 정의를 내세워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려 했다. ‘정의로운 사회 건설’을 외치며 나름 사회적 지탄을 받는 무리를 골라 정조준했다. 이때 ‘만만한’ 과녁이 불교였다. ‘정화’라는 깃발을 내걸고 비구와 대처승이 그토록 치열하게, 또 지루하게 싸웠건만 다시 정화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부정한 자들이 총칼을 들고.

신군부 정권이 불교계를 만만하게 여긴 것은 이 땅에 불교가 제대로 서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화운동은 1970년 1월 대처승들의 태고종 창종으로 일단락 됐지만 이후 조계종단은 밖이 아닌 안에서 서로 싸웠다. 끊임없이 패를 나눠 종권다툼을 벌였다. 또 승려들이 잇단 비리에 연루되어 사회문제로 비화되었다. 중앙종회에서는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급기야 김대심 등 20여명의 승려들이 총무원을 점거하고 종권을 탈취하려는 해괴한 일도 발생했다. 욕심이 다른 욕심을 나무랐다. 신도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종단의 앞날을 걱정했다.

종정, 총무원장, 종회 구성원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려 싸웠다. 또 문중 간에 감투를 놓고 으르렁거렸다. ‘절 벼슬은 닭 벼슬만도 못하다’ 했지만 말뿐이었다. 그렇다보니 다시 외부세력을 끌어들여야 했다. 당연히 권력의 손을 탔다. 불교계 내부의 인적 손실도 컸다. 명망이 높은 큰스님들까지 분규에 휘말려 이름에 오물이 묻었다. 총무원장이 구속되고, 종정 추대를 취소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사찰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그 와중에 폭력이 난무했다. 자비를 앞세운 종교가 실제로는 힘을 규합해 폭력으로 상대를 제압했다. 불교를 바로세우겠다는 명분으로 폭력을 끌어들였고, 결국 그 폭력이 종단을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었다. 인과응보였다. 일찍이 성철이 예견했던 대로였다.

“묵은 도둑 몰아내고 새도둑을 들였다.”
“똥덩어리를 놓고 똥개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구심점을 잃은 종단은 표류했고, 현안을 자율적으로 해결할 능력도 상실해버렸다. 너도나도 억울하다며 법에 호소했고, 줄지어 법원에 나가 재판을 받았다. 종단은 끝내 개운사파와 조계사파로 나뉘었다. 법원이 손을 들어주면 그것이 곧 종권이었다. 종권을 손에 쥐려 세속법에 의지해야 했으니 이 어찌 비루하지 않은가.

두 개로 쪼개진 조계종단은 급기야 1979년 부처님오신날 법회를 별도로 가졌다. 1980년 3월 겨우 종회의원 선출에 합의하고, 4월17일 전국 24개 교구에서 제6대 중앙종회 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여 69명의 종회의원을 선출했다. 하지만 새로 출범한 종회는 종정 선출을 둘러싸고 다시 내홍에 휩싸였다. 그리고 5월에는 개운사 측이 총무원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꼴을 지켜봐야하는 신도와 국민들은 참담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읽고 신군부가 거침없이 절로 들어간 것이다. 불교가 이처럼 철저하게 유린당했던 것은 불교가 스스로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불교는 권력의 눈치를 보고 나아가 권력에 기대었다. 권력이 던져주는 당근에 길들여져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민주화를 외치며 민중의 고통에 동참할 때 상대적으로 불교의 움직임은 매우 미약했다. 스님들의 추문만 들려왔다. 불교계 분열은 정권이 부추긴 탓도 있었다. 그래야 권력이 제 맘대로 끌고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일반인들에게 관제종교로 치부되었다. 내부다툼으로 기력이 쇠진한 불교는 전혀 응집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불교의 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승단이 여법하게 운용될 때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났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내분으로 지쳐갔고, 결국 정치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아마 신군부 정권이 천주교와 개신교는 건드리기에 겁이 났을 것이다. 독재에 저항하며 키워온 내공이 만만찮았고, 투사들이 즐비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체제순응적인 불교만 저들의 과녁이 되었다.

법난의 후유증은 더 무서웠다. 신군부 세력은 승려들의 비리를 조작하거나 부풀려서 세상에 내놓았다. 언론은 이를 여과 없이 받아 퍼뜨렸다. ‘낮엔 주지, 밤엔 요정’ ‘목탁 재벌’ 같은 제목이 등장했다. 갑자기 사찰은 비리의 온상이 되어버렸다. 사찰마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었다. 승복을 입고 거리를 나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불자들이 떠나가고, 사찰은 점점 섬이 되어갔다. 가야산에도 군인들이 올라왔다. 소총 끝에 칼이 꽂혀 있었다. 청정도량 해인사는 그야말로 공포분위기에 휩싸였다. 주지스님은 영문도 모른 채 산을 넘어 피해야 했다. 법당을 군인들이 에워쌌다. 군인들은 백련암까지 올라왔다. 권총을 찬 군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성철이가 누구야! 같이 가야겠으니 빨리 나오라고 해!”

참으로 무례했다. 성철은 산책을 나가고 없었다. 제자 원택이 둘러댔다.

“성철 스님은 아침산책을 나가시는데 산에 오르면 보통 한 두 시간은 걸립니다. 근데 뭔가 잘못 알고 온 것 같소. 이런 산속 암자에 사는 스님이 무슨 죄를 짓겠소?”
“상부 명령이요. 연행해가면 되는 거지 다른 것은 모릅니다.”

원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군인을 구슬렸다.

“그러면 그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이쪽 상황을 큰절에 있는 상관에게 알리면 어떻겠소. 다시 명령을 받아보는 것이 낫지 않겠소?”

그러자 군인들도 지루하고 피곤했던지 어딘가로 전화를 한 후 이내 내려갔다. 원택이 서둘러 큰절로 내려가 보니 소임을 맡은 스님들이 도망치고 숨고 또 잡혀가고 해서 아무도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조계종단 구성원들은 모두 한 곳을 바라봤다. 그 시선들은 간절하고도 절박했다. 가야산 해인총림, 그 속의 방장인 성철을 쳐다봤다. 백련암에는 가야산 호랑이 성철이 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도 그 앞에서는 누구나 작아졌다. 법난을 당한 한국불교는 성철이 필요했다. 그러나 산문을 나서지 않는 성철을 누가 설득할 것인가. 도반 자운이 나섰다.

“제발 종정 안 한다는 말만 말아주시오.”

도반은 간청했다. 성철은 자운의 인자함에는 늘 약했다. 끝내 자운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내 이름을 가져다 써서 불교가 나아진다면 기꺼이 응하겠소.”

1981년 1월10일 정화중흥회의 체제의 원로회의는 성철을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렇게 종정이 되었다. 세수 70세였다. 열흘 후인 1월20일 제6대 종정 취임식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종정이 없는 종정 취임식이 열리고, 취임 법어만 원로원장 영암 스님이 대신 읽었다. 종정을 상징하는 주장자와 불자(拂子)는 총무원장 성수 스님이 백련암으로 가져가 봉정했다. 그러자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성철 스님이 종정직을 거부했다.”
“취임 법어도 가짜라더라.”

결국 종단은 성철이 종정의 불자를 받는 사진을 공개해야 했다. 성철의 종정 취임은 결과적으로 엄청난 인연의 파장을 불러왔다. 성철은 은둔의 고승에서 일약 국민의 선승으로 솟아올랐다. 배우가 하루아침에 국민스타로 떠오른 것과 비견할 수 있었다. 일대 사건이었다.
백련암을 찾은 종단 간부들에게 종정 성철이 일렀다.

“출가자에게는 출가의 본분이 있습니다. 자기 내부에 있는 진실한 자기를 만나야 합니다. 지금부터 제발 싸우지 마시오. 싸움하다가 타율적 정화를 당한 것 아니오. 제발 온갖 인연의 속박에서 벗어나시오.”

산 속의 종정 성철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지만, 내 사는 것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

그 후 가야산 호랑이는 산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산속 호령은 멀리 뻗어나가 비가 되고 바람이 되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0호 / 2016년 4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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