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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옳은 편도 들지 말라”

기자명 김택근

▲ 산중의 ‘살아있는 전설’로 통했던 성철은 결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해야 될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이념의 산실이라고 봅니다. 정치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

산중의 ‘살아있는 전설’은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정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지만 가야산에 박혀 있었다. 그리고 일체의 현실을 살피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1980년대는 살아있는 이들에게 아픔이었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보듬는 시국발언을 고대했지만 성철은 이를 외면했다. 그러자 현실은 각박하고 시국은 수상하여 내일을 알 수 없는데 뜬구름만 잡고 있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고, 불교를 탄압했던 극악무도한 세력에게 죽비를 내려칠 것이라는 기대는 번번이 허물어졌다. 부처님오신날에도, 새해에도 말씀을 받으러 간 사람들은 실망했다. 때가 되면 성철의 입만 쳐다봤지만 시국 발언은 없었다. 당시 시의적절하게 권력을 꾸짖던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과 비교하며 성철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성철은 이에 일체의 반응을 하지 않았다. 종정 신년법어나 초파일법어에도 사회적 메시지는 없었다.

“눈앞에는 평화와 자유, 환희와 영광이 있을 뿐입니다. 들판에 가득 찬 황금물결은 우리 생활의 곳집이요, 공장을 뒤흔드는 기계 소리는 우리 앞날의 희망입니다.” (1982년 신년법어)
“모순과 갈등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으며, 평화와 자유로 수놓은 행복의 물결이 항상 넘쳐흐르는 탕탕무애한 광명이 가득 차 있습니다.” (1983년 신년법어)

어느 법어에도 현실의 아픔은 들어있지 않았다. 듣기에 따라서는 독재정권을 미화한다는 오해를 살만도 했다. 물론 성철의 법어가 진리를 향해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 곳곳에 살기가 스며들고, 젊은이들의 절규가 거리에 넘쳐나는데 종정 성철의 법어는 한없이 한가했다. 종단 내부에서도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성철에게는 역대 최고 지도자들과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권력과 거리 두기’였다. 불의한 정권을 향해 호통을 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싸지도 않았다. 성철의 행적을 추적해 보건데 그것은 신념이었다. 시국과 관련한 말씀을 얻으려는 사람들에게 체면치레로라도 한마디 할 수 있으련만 성철은 일체 말이 없었다.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는 순간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 아니었다. 권력과 타협하는 순간 권력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권력의 눈치를 봐야하고 종내는 권력에 엎드릴 수밖에 없으니 종교의 타락이었다. 선승 성철은 이를 잘 알고 있었고 실제로 ‘정치’를 멀리했다.

1977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식에 참석했던 대통령이 귀경길에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도 성철은 대통령 박정희를 만나지 않았다. 관리들과 정보부 요원들, 그리고 나중에는 큰절 해인사 스님들까지 백련암에 올라와 방장인 성철의 영접을 간청했다.

“대통령이 오신다니 큰스님이 큰절까지 내려오셔서 맞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할 뿐이었다.

“산에 사는 중일 뿐, 일부러 대통령 만날 일은 없을 듯하네.”

성철은 끝내 큰절로 내려가지 않았다.

또 세력이 집권한 후 국정자문위원으로 위촉하려 했을 때도 이를 거절했다.

“그런 재주도 없고 생각 또한 없어서 할 수 없다.”

성철은 종교가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로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법정 스님과의 대화에서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1982년 새해 법정이 종정인 성철에게 물었다.

“한국불교 교단은 정치권력 앞에 너무 나약하게 처신해왔습니다. 스님께서는 종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정치권력과 종교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종교와 정치는 완전히 분리해야 합니다. 분리해야 될 뿐 아니라 종교는 정치이념의 산실이라고 봅니다. 정치이념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종교는 정치의 정신적인 근본 공급처, 정신적인 원동력이 되어, 모든 정치 이념이 종교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종교가 정치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이것은 서로 전도된 것이어서 국가적으로 큰 위험이 오게 되며 결국에는 파멸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법정은 현실을 꾸짖어달라고 우회적으로 촉구했고, 그걸 모를 성철도 아니었다. 이를 완곡히 거부한 셈이었다. 성철은 법정을 아꼈다. ‘펜대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아마도 원론적인 얘기를 꺼내 ‘시국에 침묵하는 의미를 당신만은 알아주시오’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성철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옳은 편도 들지 말라.”

그러면서도 덧붙였다.

“나는 아무 편도 들지 않겠다. 아무편도 안 드는 게 한쪽을 편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성철은 종단과 승려들에게는 엄했다. 성철은 알고 있었다. 모든 문제는 불교 안에 있다는 것을. 불교는 그동안 권력과 야합했고, 권력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무 곳에서나 목탁을 두드렸다. 실로 그 처지가 비루했다. 조선시대는 도성 안 출입도 하지 못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왜색 옷을 걸치고 난장판을 기웃거렸으며, 해방 후에도 권력에 ‘존재’를 구걸해야 했다. 성철 스님은 불교가 홀로 서지 않고서는 권력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깨어있으라고 죽비를 밖이 아닌 안으로 내리친 것이다.

어쩌면 산중에 물러나 있으면서도 세상에 가장 깊숙이 나아가고 있었다. 불교의 진면목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것이었으니 제자리를 지켜 현실과 불교계를 깨웠던 것이다.

“근현대 스님들 가운데, 성철 스님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이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철저히 은둔한 듯 보였어도, 그의 삶과 가르침은 어느 누구보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역설적 삶이다. 성철 스님은 철저하게 은둔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역설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김성철, ‘간디와 성철을 읽고’)

성철은 또한 종단의 세속적 인기몰이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1984년 4월 총무원 간부들이 성철의 서울행을 간절히 요청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장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계는 부활절을 맞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졌고, 언론은 참석인원을 헤아려 세인의 이목을 끌었다. 100만 인파가 모이는 집회를 보며 불교계도 뭔가 하자는 분위기였다.

“우리도 부처님오신날에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갖자.”

대규모 집회 구상은 조계종 총무원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졌다. 그렇게 하려면 성철이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들이 보기에 성철은 흥행에 꼭 필요한 ‘은둔의 대스타’였다. 그러나 종정 성철은 이를 간단히 일축해 버렸다.

“산승이 산에 있어야지. 내가 서울 가서 사람이 많이 모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산을 지키고 여기 그냥 앉아 있는 게 교단에 보탬이 되는 줄은 왜 모르는가.”

결국 불교의 여의도 집회는 열리지 못했다. 설사 수백만 불도들이 모였다고 해도 무엇을 할 것인가. 떡 벌어진 법회를 해서 타 종교와 세(勢)대결을 하자는 것이니 참으로 좁은 소견이며 결코 부처님께 아뢸 일이 아니었다. 그런 행위 자체가 ‘정치적’이었다. 이런 일련의 모든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제자 원택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종정 취임 초기에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대중 앞에 언제쯤 서시겠냐는 뜻을 묻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무렵 정휴 스님이 그렇게 여쭈었더니 큰스님은 ‘금강경에서 여래를 형상이나 소리로써 찾지 말라고 했습니다. 비록 육신은 이 가야산에 있으나 내 원력은 중생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셨습니다. 시국 발언, 여의도 초파일 집회 권유 등을 한사코 내치시면서 산중 수행승으로 머무르셨던 건 결국 한국불교의 질곡을 타개하기 위한 성철 스님 특유의 돌파구였던 셈입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았으면 불교를 감히 누가 침탈하겠는가. 법난보다 법난을 불러온 실체를 살펴봐야 했다. 모든 것은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음이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볼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했다.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염원이 뜨거울 때 성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간악한 무리들에게 간담이 서늘해질 추상같은 호통을 내릴 만도 했지만 침묵했다. 10.27 법난에 대해서도 밖으로는 어떤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신군부의 행태에 주장자를 들지 않았다. 다만 안으로 죽비를 들었다. 승려의 본래 모습이 무엇이냐고 무섭게 다그쳤다. 문제는 밖이 아니라 안이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백련암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말에 속지 마시오. 나는 그저 종정이라는 고깔모자를 썼을 뿐이오. 나를 보지 말고 당신의 본래면목을 보시오.”

‘내 말도 믿지 말라’는 선지식에게 민주화 투쟁에 말을 보태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또 다른 욕심이었다. 당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어를 내렸다면 대중은 더 자극성이 강한 또 다른 법어를 원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선승 성철은 어찌됐을까. 한번쯤 ‘우리는 인기인을 얻는 대신 큰 어른을 잃었을 것’이란 작가 박완서의 말도 음미해봄직하다. 성철은 순수한 불교정신을 이렇게 설했다.

“세속을 불교화해야지, 불교가 세속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승려는 세상이 아무리 서(西)로 가더라도 바른 길이 동(東)이라면 동으로 가도록 계속 빛을 발해야 합니다. 수행하는 사람들이 세속화되면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 같이 익사하는 꼴이 되는 겁니다. 자신을 물에 빠뜨리지 않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불교계가 많이 변했다. 시위대가 피난처로 곧잘 사찰을 찾는다. 혹자는 10·27 법난으로 정권과 날을 세운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불교가 당당해졌다는 말이다. 안으로 내공이 쌓여 마음이 가난해지고, 결국 그래서 남을 위해 살려는 작은 서원들이 뭉쳐있음이다. 일반 국민들이 불교를 떠올릴 때 그래도 산속에서 기도하는 선승을 연상하는 것은 누구의 공덕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성철의 원력을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42호 / 2016년 5월 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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