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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탁실라-① 세계인의 도시

인도·바빌론·시리아·중국 등지서 학문 배우려 몰려들던 곳

▲ 쿠샨시대의 탁실라가 발굴된 시르캅의 중앙대로.

불타께서 마가다국으로 유행하다 라자그라하에 이르러 박가바라는 도공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도공의 집에는 이미 푹쿠사티(Pukkusāti, 弗迦羅娑利)라는 비구가 먼저 와 머물고 있었다.

카니쉬카 왕이 간다라 수도를
푸루샤푸르로 옮기고 가람과
대탑조성·성전결집 적극 후원

간다라 미술은 카니쉬카에서
후비쉬카 이르는 시기 최고조

힌두문화·헬레니즘 문화 융합된
간다라 미술이 발전했던 지역
발굴된 불상들에서 잘 나타나

오늘날엔 겨우 인구 15만 정도
라왈핀디 7개 구 중 하나일 뿐

세존께서 말하였다.

“비구여! 만약 그대가 불편하지 않다면 나도 이 공방에서 하루 밤 묵고자 하오.”

이에 푹쿠사티 비구가 말했다.

“현자여! 공방은 넓고 이미 풀 자리도 깔려있습니다. 묵고자 한다면 좋을 대로 하십시오.”

세존께서 풀 자리 위에 니사단(깔개)을 펼치시고 거기에 정좌하여 밤이 새도록 선정에 들었다. 푹쿠사티 비구도 역시 선정에 든 채 밤을 지새웠다. 이에 세존께서 물었다.

“비구여! 그대의 스승은 누구요? 그대는 누구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소?”
“현자여! 나의 스승은 석가족의 후예인 사문 고타마입니다.”

세존께서 다시 물었다.

“비구여! 일찍이 그 분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분을 보면 알아 볼 수 있겠습니까?”
“현자여! 나는 그 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래·응공·정등각·명행족·선서·세간해·무상사·조어장부·천인사·불세존이라고도 이름 하는 그 분에 의지하여 출가하였습니다.”

이에 세존께서 이 비구를 위해 법을 설하였는데, 그 내용은 ‘중아함’162 ‘분별육계경(分別六界經)’(MN. 140 Dhātuvibhaṅga)에 전하고 있다.

▲ 시르캅 대로변의 쌍두취탑(기단에 두 머리의 독수리가 새겨진 탑) 유적. 그리스 양식과 인도 양식이 혼합된 시르캅의 대표적 건축물로 인도미술사 책이면 으레 등장한다. 한 몸에 두 머리를 갖는 새는 불전에서 앵무나 가릉빈가와 함께 가장 자주 언급되는 명명조(命命鳥, jīvaṃjīvaka)인데, 이 새가 왜 탑의 기단에 새겨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소리 때문인가, 두 머리에 의한 불사(不死) 때문인가? 경량부에서는 이 새를 하나의 근(根)에 근거하여 현행의 거칠고 심층의 미세한 두 식(識)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자기 주장의 예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유식사상의 선구가 된 불교사상사의 획기적인 사유이다.

푹쿠사티 비구는 출가 전 탁샤쉬라(Takṣaśilā, p.Takkasilā)의 왕이었다. 불타 당시 인도 땅에는 16대국이 있었는데, 탁샤쉬라는 그 중 한 나라인 간다라의 수도였다. 푹쿠사티 왕은 탁샤쉬라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그라하(왕사성)를 오가는 대상(카라반)들을 통해 빔비사라 왕과 친교를 맺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불타께서 세간에 출현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유받고 불타처럼 왕위도 왕궁도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불타를 친견하기 위해 라자그라하에 갔다가 세존과 해후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불타는 그 때 슈라바스티(사위성)에 있었는데, 그날 새벽 세간을 관찰하다 자신에 의지해 왕국도 버리고 출가한 푹쿠사티가 사문과(沙門果)도 얻지 못한 채 다음날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을 알고 그를 위해 32가지 대인상을 감추고서 라자그라하 도공의 집에 이르렀던 것이다.(푹쿠사티 비구는 불타로부터 법문을 듣고 그날 구족계를 받기위해 가사와 발우를 구하러 나갔다가 미친 소에 받쳐 목숨을 마쳤다. 그렇지만 그는 바로 무번천(無煩天, 즉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 불환과를 얻고 다음 생에 반열반하였다.)

푹쿠사티 왕의 드라마틱한 전설은 역사적 사실일까? 대개는 후대의 가탁 위작이라 말한다. 그러나 전설의 단초는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불타의 모국 카필라바스투가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위협받고 끝내 코살라에게 멸망당하였듯이 간다라 역시 세계사를 바꾼 열강의 침입을 받았다. 그곳은 페르시아나 중앙아시아로부터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오는 통로였다. 때문에 항상 번영과 쇠락이 공존하였고, 그곳의 불교 역시 그러하였다.

간다라는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가 침입한 이래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가 들어오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의 변방이었다. 기원전 327년 힌두쿠시를 넘어 당시 간다라의 수도였던 푸쉬카라바티(오늘날 차르삿다)를 점령한 알렉산더는 다음해 인더스 강을 건너 탁샤쉬라에 무혈 입성하였다. 도리어 당시 탁샤쉬라의 왕 암비는 5000여 병력과 함께 그에게 가담하였다. 알렉산더의 인도경영은 잠시였지만(BC. 327∼324) 그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후 마우리야 제국의 아쇼카 왕이 젊은 날 한 때 간다라의 총독을 지냈고, 관정(BC. 268) 후 탁샤쉬라 인근 만세라와 샤바즈가리의 큰 바위에 14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법의 칙령(法勅)을 새기기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아들 쿠날라로 하여금 이 땅을 다스리게 하였지만, 노년에 권력을 상실하였고(차회 참조) 그의 제국도 빠르게 몰락하였다. 기원전 3세기 무렵 힌두쿠시 너머 박트리아의 땅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그리스인 태수 디오도토스(BC. 250∼235)가 독립하여 그리스 왕국을 세웠고, 4대 데메트리오스(BC. 189년 즉위)에 이르러 간다라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이란 계통의 유목민인  샤카(Śaka) 파르티아 인들이 그들의 옛 땅인 박트리아를 차지하였고, 일부는 탁샤쉬라를 거쳐 인도 서부지방에 이르렀다. 또 다른 시기 월지족의 한 부족인 쿠샨이 등장하였고, 세 번째 왕인 카니쉬카(Kaniṣika, AD. 128∼153)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에서 갠지스 강 중류 파탈리푸트라(화씨성)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간다라의 수도를 푸쉬카라바티에서 푸루샤푸르(오늘날 페샤와르)로 옮기고 카니쉬카 가람과 대탑을 조성하였으며, 협(脇) 존자가 발의한 성전결집의 후원자가 되었다.(제3회 참조) 기원후 1세기 말 파르티아 지배하에 싹트기 시작한 이른바 간다라 미술은 카니쉬카에서 후비쉬카에 이르는 시기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간다라 미술은 이렇듯 힌두문화와 외래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된 것이었는데, 그 두드러진 모습은 불상에서 나타났다. 이목구비는 물론 머리카락과 옷자락 등을 입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표현한 불상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이후 불상은 불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간다라의 불상형식은 단숨에 대륙을 가로질러 극동의 반도 끝자락인 경주에 이르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의 나라에 이르고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그 무렵 인도는 전국적으로 몇 개의 통상로가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것은 다시 박트리아(아프가니스탄 일대)를 거쳐 서아시아와 헬레니즘 세계로 이어졌는데, 그 기점이 바로 탁샤쉬라였다. 4세기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프르 2세에 의해 정복될 때 탁샤쉬라는 이미 천년이 넘는 고도였다. 알렉산더를 수행한 그리스 역사가는 탁샤쉬라(탁실라)를 부와 번영이 넘쳐나는 안정된 도시로 묘사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 가지 베다와 18가지 학문이 교수되던 대학이라는 것을 보았는데, 일찍이 그리스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인도 각지는 물론 바빌론 시리아 중국 등으로부터 이곳의 학문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다. 불교의 다수 장로들도 이곳 출신이었다. 예컨대 ‘테라가타’ 제177∼178송을 읊은 바라드바자(Bhāradvāja) 비구는 출가 전 바라문일 때 이곳에서 배웠으며, 제203∼204송의 작자 아반티의 담마팔라(Dhammapāla)도, 제360∼364송을 지은 말라인 야사닷타(Yasadatta) 비구도, 제866∼867송을 지은 앙굴리말라(Aṅgulimāla) 비구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고 전한다.

▲ 옛날 탁실라에서 불탑과 가람을 조성한 재가 신자들. 얼굴모양이나 머리스타일이 다채롭다. 이들은 인도 각지에서, 그리스나 페르시아에서,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온 이들이었을 것이다.(탁실라 박물관. 3∼4세기. 자울리안 승원 터, 다르마라지카 대탑에서 출토)

탁샤쉬라의 흥망과 성쇠는 당연히 불교와 함께 하였다. 정법의 멸진은, 경·율·론 3장의 교법(敎法)을 설하는 자와 37보리분법의 증법(證法)을 행하는 자 사이의 갈등과 같은 내부적 요인도 없지 않았지만, 그 단초는 서북방에서 내려온 무법의 다슈(Dasyu, 達絮: 악마)와 무렛차(Mleccha, 蔑戾車: 야만인)였다. ‘잡아함’(제640경)이나 아쇼카아바다나에 의하면 샤카(스키타이), 야바나(그리스), 파흐라바(파르티아) 등의 왕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불탑과 가람을 파괴하고 비구중(衆)을 학살하였으며 경전을 불태웠다. 그렇지만 시일이 경과하면서 그들은 다시 불법에 귀의하였고 가람과 불탑을 조성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샤카의 크샤트라파(세습총독)의 기진으로 이루어진 마투라의 사자주두상이다.

간다라의 고대도시 탁샤쉬라는 오늘날 여전히 외래 도래인들의 호칭이었던 탁실라(Taxil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라왈핀디에서 서북쪽 30㎞, 페샤와르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인구 15만 정도의 라왈핀디의 일곱 개 구(區)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곳에 가는 버스는 메트로 버스 라왈핀디 쪽 시발역인 사다르 역에서 왼편 상가를 따라 10여분 내려가니 있었다. 말이 버스 스탠드이지 길가 공터에 승합차 몇 대가 서 있었고 승객이 차는 대로 출발하였다. 15인승 승합버스였지만 20명은 기본이었고(어린이 제외), 요금 40루피(500원 정도)였다. 우리만 타면 바로 출발하는 차가 있어 올라탔다. 남은 자리는 물론 제일 뒷줄 오른편 창 쪽 두 자리였다. 이미 타고 있던 승객들이 당연한 듯 아무런 불평 없이 어깨를 제처 길을 터주었다. 이 장엄하고도 유구한 고대도시의 방문이 어찌 쉬울 리 있겠는가. 봉고차 맨 뒷좌석 한쪽 귀퉁이에, 한 단 높게 개조한 의자 덕에 허리도 펴지 못하고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땟자국으로 반질거리는 커튼 자락을 움켜잡고(잡을 데라곤 그것 밖에 없기에) 한 시간을 가야했다.

버스는 우리를 탁실라 초입에서 내려주었다. 여기서 다시 탁실라 고대유적지, 말하자면 탁샤쉬라의 중심센터 역할을 하는 비르마운드의 박물관을 가기 위해서는 로컬버스로 바꿔 타야 한다고 했다. 화려한 외장(?)의 트럭 타입의 버스는 페샤와르까지 가는 완행버스였다.

탁샤쉴라는 1913년에서 1934년 사이 당시 인도 고고국장이던 존 마샬에 의해 탁실라 동쪽 구릉 지대의 여러 마을에서 발굴되었다. 해서 페르시아나 쿠샨시대의 고대 도시도, 그 인근의 불교승원도 모두 원래의 이름을 잃은 채 오늘날의 지명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대규모의 유적지인 만큼 안내도에는 수많은 유적지의 지명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비르 마운드(Bhir Mound), 시르캅(Sirkap), 시르숙(Sirsukh), 모라 모라두(Mohra Moradu), 자울리안(Jaulian), 잔디알(Jandial)…. 당일에 가볼 수 있는 탁실라의 필수 관광코스라지만 하나 같이 낯선 이름들이었다. 아쇼카 왕이 세웠다는 대탑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만이 귀에 익은 것이었다. 인도 바라나시 인근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도 비록 기단만이 남은 것일지라도 같은 이름의 탑을 본 적 있기 때문이다.

비르 마운드에서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마우리야에 걸친 시대의 도시가, 시르캅과 시르숙에서는 각기 샤카 파흐라바와 쿠샨 시대의 도시가 발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물관 인근지역인 비르 마운드는 이미 나무로 덮여버렸고, 시르숙은 마을이 있어 완전히 발굴되지 않았단다. 시르캅만이 그리스풍의 도시 모습-바둑판 형식의 설계와 이에 따른 석벽-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이곳 역시 녹음에 덮여 시가지를 조망하기 어려웠다. 파키스탄 북부 스와트 강변의 바리코트 인근에도 그리스풍의 도시(주거지) 터가 발굴되고 있었지만, 이곳은 대로변에 소형 스투파나 작은 신전이 세워져 있어 샤카 시대의 도시풍경이 선뜻 상상되지 않았다. 그리스 양식과 인도 양식이 혼합된 시르캅의 대표적 건축물로 인도미술사 책이면 으레 등장하는, 기단에 두 머리의 독수리가 새겨진 ‘쌍두취탑(雙頭鷲塔)’이 중앙 대로변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많이 마모되었고 탑으로서는 작은 규모라 눈에 들지도 않았다.

필시 이 대로를 인도 각지에서 온, 그리스나 페르시아, 중앙아시아나 중국에서 온 각기 다른 얼굴과 다른 차림의 젊은이들이 지나 다녔을 것인데, 탁실라 박물관에 그들의 다양한 모습의 테라코타 두상이 2000년을 건너 뛰어 전시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활보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왁자지껄, 한 무리의 파키스탄 관광객만이 지나갈 뿐이었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43호 / 2016년 5월 1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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