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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청암사승가대학 강사 상덕 스님

일하고 가르치며 걸은 강사의 길…정법 전하는 묵직한 힘

▲ “학인들이 사찰의 아름다움과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고 기다려주는 것도 강사의 몫”이라는 상덕 스님은 청암사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학인들이 발견하고 소중히 지켜주길 바라고 있다.

푸른 바위도 잠들었을 깊은 밤, 오늘도 스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들려오는 부처님 음성, 그리고 수없이 다가오는 그 가르침의 환희에 새벽녘이 되도록 스님은 경을 덮지 못한다. 수마가 범접할 틈은 바늘귀만큼도 없다.

모친 원력에 15살 출가 인연
경전 구하기도 힘들던 시절
공부 기회 갖는 것만도 행운
법보강원·중앙승가대 수학
화운사 강사 거쳐 청암사로

땔감도 없이 겨울 맞아도
“출가자답게 살면 길 열린다”

사찰 풍습 어려워하는 학인들에
전통사찰문화 소중함 일깨워
보존·전승시키는 것도 강사 몫

“아무 소임도 없이 강사만 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해요. 강사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단순한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하거든요.”

그런 강사가 되진 못했다. 학인들을 가르치며 도량불사를 해야 했고, 절 살림을 살아야 했다. 재무 소임도 맡았고, 주지 소임도 살았다. 낮 시간을 그렇게 소임살이로 보내고 나면 경을 펴는 시간은 늘 한밤중이었다. 샛별을 마중하는 날도 다반사였다. 그래도 청암사승가대학 강사 의진상덕(義眞常德) 스님은 스스로를 ‘행복한 강사’라 부른다. 경을 볼 때마다 새롭고, 새로 발견한 것을 학인들에게 가르쳐 줄 때마다 신이 난단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려서부터 ‘총기 있다’ 소리 꽤나 들었을까 싶지만 스님의 옛 이야기 속 반전이 듣는 이의 허를 찌른다.

상덕 스님의 고향은 대전이다. 신심이 돈독했던 속가 모친은 슬하의 남매를 출가시키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다. 어린 남매에게 “마을에서의 삶은 그다지 이득이 없다”는 말로 출가를 권했다. 비록 몸은 세간에 살았지만 그 마음 속 무명초는 잘라 버린 지 오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평생 모친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데 절이 어디라고 가고 싶겠나. 딸 출가시킬 것이라는 소문에 비구니스님들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지만 반갑지 않았다. 스님과 동행하는 모친을 따라 갈 일이 생기면 가까이 가기 싫어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하지만 모친은 차근차근 딸의 출가를 준비했다. “내 상좌로 보내면 동국대에 보내주겠다”며 탐을 낸 스님도 있었다. 하지만 모친은 매번 고개를 저었다. 이유도 다양했다. “저 스님은 늦게 출가해 아직 수행이 덜 됐다.” “저 스님은 대중사찰서 수행한 적이 없어서 안 된다.” “저 스님은 신도가 없는걸 보니 덕이 부족하다” 등등. 딸의 은사를 고르고 고른 모친은 “대중생활해야 여법한 스님이 된다”며 개심사를 낙점했다. 열다섯 살 아이는 모친을 따라 개심사로 향했다.

▲ 눈 많이 내린 1990년대 말 어느 날. 청암사를 찾아온 졸업생과 학인들에 둘러싸인 상덕 스님(가운데) 모습이 천진한 아이 같다.

▲출가하던 날의 기억이 궁금하다.
“그날도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따라나섰다. 개심사에 도착해 노스님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가타부타 말씀도 없이 펑퍼짐한 광목바지를 한 벌 주시며 갈아입으라 했다. 그때 나는 ‘쓰봉’이라고 부르던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스님이 주신 광목바지를 입어보니, 세상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하나도 걸림 없는 것이, 그 맛에 절에 남기로 했다.”

▲집 생각은 안 났나.
“모친이 보고 싶을 때도 있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었다. 늘 머리도 감기고 빗겨줬는데 절에 오니 해줄 사람이 없었다. 나보다 두어 달 먼저 들어온 행자님이 산문 밖까지 데리고 나가 머리를 감고 빗겨주었다. 그러니 사중 스님들 보기에는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개심사 온 지 열흘 만에 삭발을 한 데에는 너무 손이 많이 간 탓도 있었을 것이다.”

머리도 감을 줄 몰랐는데 다른 일이야 말해 무엇하랴. 삭발하고 행자가 됐지만 할 줄 아는 것은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공양간 심부름하는 하채공 소임조차 영 미덥지가 않으니 아무도 이 거추장스런 행자를 떠맡으려 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후일 알게 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은사 성근 스님의 얼굴을 처음 본 것도 삭발 후 1년이 지나서다. 노스님인 보인 스님이 당신의 맏상좌를 은사로 정해주었지만 정작 삭발하는 날도 은사는 선방에 있었다. 노스님이 손상좌의 머리를 깎아주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은사를 만났다.

▲처음 본 은사스님의 인상은 어땠나.
“저녁 공양 후 양치를 하러 개심사 해탈문 밖 수각으로 가는데 한 비구니스님이 북태산 만한 바랑을 짊어지고 산문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처음 보는 스님이라 그저 꾸벅 인사만 하고는 속으로 ‘그 스님 참 못생기셨다’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런데 잠시 후에 사숙스님이 ‘은사스님 오셨으니 빨리 와 인사드리라’며 부르셨다. 오늘 산문에 들어온 스님이라고는 아까 마주친 그 스님밖에 없으니 십중팔구였다. 그 스님이 은사면 어쩌나 싶어 발길을 떨어지질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좀 데면데면했다. 그 후로도 은사스님은 계속 선방으로 다니셨다.”

▲은사스님은 어떤 분이신가.
“오롯한 수좌다. 세납이 여든넷인데 지금도 견성암서 수행하며 양말까지 손수 빤다. 일체 개인 신도도 만들지 않고 평생 남의 손을 빌리지 않으니 남들이 보기에는 융통성 없는 스님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출가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는 일체 해본 적이 없는 분이다.”

▲은사스님도 없는 행자생활이 힘들지 않았나.
“행자생활을 2년 했는데 그때는 행자라도 큰방에서 발우도 펴고 함께 공부했다. ‘초발심자경문’ ‘치문’ 등을 행자 때 다 배웠다. 그래서 행자생활이 힘든 것이 아니라 공부가 힘들었다. 한문을 모르니 갑갑했다. 또 어른스님들이 ‘공부 열심히 안하면 지옥 간다’하는데 만약에 내가 좋은 스님이 못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었다. 이 가르침이 혹여 진실이 아니면 어쩌나 싶은 생각도 고민이었다. 성능 스님이 강주였는데 삼천대천세계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수미산을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지동설을 들어 반박했다. 그러면 스님은 ‘절대 그렇지 않다’며 경전의 말씀을 또 이야기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계속 믿지 못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니 하루는 스님이 텃밭에 물웅덩이를 가리키며 ‘저 물속에 사는 벌레가 저 물밖에 개심사가 있고 대한민국이 있고 지구가 있다는 것을 알겠느냐’하시며 ‘우리도 그와 같아서 부처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때 의심이 딱 사라졌다.”

하지만 사교를 마칠 즈음 개심사 강원이 문을 닫았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사강원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졸업 때까지 형편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강원을 마치고도 공부를 다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때마침 조계종 총무원에 ‘대한불교조계종중앙교육원’이 개설됐다. 스님들에게 한문경전 외에 현대적 교육을 제공하기 위한 종단의 시도였다. 동학사강원에서 만난 지형 스님의 권유로 중앙교육원 3개월 과정을 마치고 다시 가산지관 스님 지도로 재강을 시작했다.

▲한문 때문에 힘들었는데, 경전공부를 계속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친의 공덕으로 스님이 됐지만 출가를 후회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화를 한 번도 못 봐 영화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어도 다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내 자신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공부할 만한 곳도 많지 않았다. 그러니 지관 스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만나기 힘든 기회였다.”

▲강사가 될 생각은 없었나.
“그런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때는 책이 귀했다. 내 책을 갖고 공부 해본 적이 없다. 여러 사람이 책 한권을 놓고 같이 보는 광경이 흔했다. ‘능엄경’을 다 배우고 나면 좋은 게 아니라 다음 책인 ‘기신론’ 구할 일이 더 걱정이었다. 그래서 말하길 ‘말세가 되면 경전이 모두 용궁으로 들어가 없다고 하더니 말세가 됐는가. 왜 이리 경전 구하기가 힘든가’하고 걱정하기도 했다. 당시 ‘화엄경’ 80권 한 질이 3만원이었는데 아무도 그 돈이 없어 책을 못 샀다. 그렇게 힘들었으니 강사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공부할 기회가 생긴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다.”

▲서울서 지내려면 쉽지 않아을 텐데.
“노스님께서 늘 뒷바라지 못해주는 것을 미안해 하셨다. 하지만 노스님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 못 도와주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불만은 없었다. 노스님 반연 중에 보명일이라는 보살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자운, 영암, 운허 스님 등 공부하는 스님들 후원을 많이 했다. 그 보살님과 노스님 인연이 깊어 서울서 공부하는 동안 도움을 받았다. 그런 것이 다 어른스님들의 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재강하는 동안 몇 달씩 강원이 휴강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면 언제 다시 개강할지도 모르니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 부전 소임이라도 구해야 하는데 서울에 비구니스님들이 머물 만한 사찰이 많지 않았다. 부전을 살아도 그저 먹고 자는 정도만 가능했다. 부전을 살며 새벽 3시부터 다음날 1시까지 불공을 한 적도 있다. 세 끼 공양시간만 빼고는 계속 앉아 목탁을 쳤는데 어찌나 다리가 아픈지 나중에는 부엌에서 떡 찌는 스님이 너무 부러워보였다.”

▲지관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
“겉으로는 엄하고 눈길 한 번 안주시지만 속으로는 자비심이 많은 분이셨다. 제자들을 무척 귀하게 생각하셨다. 하지만 한 번도 말씀은 않으셨다. 다면 곁에서 배우다보면 스님의 속정과 격려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강사의 길로 이끌어주신 전강교수이자 학문의 스승이시다. 지금도 가끔씩 지관 스님 생각이 나면 스님이 해주셨던 것처럼 커피에 잣을 한 주먹씩 넣어 먹기도 한다.”

법보강원을 졸업한 후에도 상덕 스님은 성북동 성라암에 개설된 비구니대학과 개운사에 문을 연 중앙승가대학을 거치며 배움을 이어갔다. 고된 서울살이도 경전 읽고 배우는 즐거움을 막지 못했다. 어느 정도 공부가 마무리됐다고 느껴질 즈음 마치 정해진 계획이었던 것처럼 화운사승가대학 강사가 됐고 강단은 청암사로 이어졌다. 동학사서 맺어진 지형 스님과의 인연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지형 스님과 함께 청암사 산문에 들어선 상덕 스님은 30여년의 세월 동안 함께 청암사 도량을 가꾸고 강원을 세웠다. 피를 나눈 혈육이라도 평생을 함께 하기가 쉽지 않은데 고향도 다르고 출가본사도 다른 두 스님의 인연은 교계에서도 보기 드문 선연으로 손꼽힌다.

▲동학사서 만난 지형 스님과는 어떻게 친분이 맺어졌나.
“그때는 모두 동학사강원 학인이었다. 나를 비롯해 스무 살 남짓한 학인들이 전부 소임을 맡아 살고 있었다. 그중 총무 소임을 살았던 스님이 뭔가 실수를 해 대중공사가 열렸다. 어른 스님들도 안 계신 채 젊은 학인들이 소임을 살고 있었지만 딱 부러지게 대중공사를 하면서 잘못을 지적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그때 지형 스님이 교무였는데,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한마디 했다. ‘잘못은 했지만 총무 소임을 산 노고를 생각해서 벌을 주지는 말아야 한다’며 대중을 이해시켰다. 그 모습이 반듯하고 분명해보였다. ‘참 바른 판단력을 갖춘 스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때부터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가 됐다.”

▲청암사에서 역할 분담은 어떻게 했나.
“아무 대책도 없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듯이 이곳으로 왔는데 와서 보니 할 일이 태산이었다. 지형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고 난 재무소임을 맡았지만 재정이라 할 것도 없었다.  드나드는 길도 어찌나 협소하고 좁은지 학인 스님들이 ‘읍내 출입하려면 위패 써놓고 나가야겠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 길이 워낙 좁고 굽이져 차가 모퉁이를 돌 때면 바퀴 하나가 길 밖으로 나갈 정도여서 나온 말이다. 그 지경이니 오가는 사람도 없고 인연 있는 신도도 별로 없었으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지만 그야말로 무대책이 대책이었다. 그래도 살아지더라.”

공양간 그릇은 하나같이 이가 빠져 한 사람 상을 차리기에도 부족했다. 당장 겨울날 땔감도 없었다. 직접 장 보러 나갈 시간이 없어 학인스님들을 보내면 돌아온 장바구니는 늘 허전했다. 사중 형편을 뻔히 아는 학인들은 과일 하나도 맘껏 사질 못했다. 배 하나씩 돌리게 사오라면 반쪽씩 돌릴 만큼만 사오곤 했다. 한 번은 간만에 들어온 공양금을 들고 장을 보러간 학인들이 난데없이 그릇을 사왔다. “성한 그릇이 하나도 없어 손님은 고사하고 주지 스님 앞에 상을 내기도 민망했다”며 “공양 좀 덜 하더라도 그릇이 필요하겠기에 사왔다”는 말에 상덕 스님은 말문이 막혔다. 함께 애쓰고 염려한 대중의 마음에 불보살의 가피가 서렸을까. 사중에 돈이라고는 100만원도 없이 겨울을 맞는 일도 허다했지만 매번 어떻게든 융통이 됐다.

▲언제부터 살림에 숨통이 텄는가.
“글쎄, 지금도 청암사 재정이 편치는 않다. 하지만 한 10여년 청암사서 살아보니 신심을 갖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걱정해봐야 나올 구석도 없지만 살아갈 만큼은 꼭 길이 생겼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걱정하지 않았다. 스님으로서 나쁜 짓 안 하고 도량서 열심히 살면 반드시 길이 열린다. 그것이 부처님 덕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절 살림이 남아돌아간다는 것은 지금도 이해가 안 된다. 청암사는 함부로 살면 쫓겨나는 곳이라 여기고 산다.”

▲어려운 시절에도 어린이 법회를 시작한 이유는.
“청암사에 온 지 몇 해 안 돼 이 지역에 교회가 들어섰다. 한창 불사 중이라 형편은 어려웠지만 어린이 포교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점에 대중들 생각이 모였다. 산골짜기 마을까지 차를 보내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예전에는 ‘적정다원’이라고 학인스님들이 다원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아이들 간식을 마련해 토요일마다 어린이법회를 운영했다. 그 전에는 학인스님들이 바자회를 해서 모은 돈으로 책을 사 경찰서, 시청, 면사무소 등에 한 달에 한 번씩 불서를 보냈다. 나중에는 중학생 법회도 만들어 영어·한문도 가르쳤다. 중학생 장학금은 지금도 계속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졸업생이 3명뿐이고, 내년에 2명이 졸업하면 더 이상 학생이 없단다. 어린이법회는 3년 전에 중단했다. 1년에 한 번씩 여름 캠프만 하고 있다. 마을에 아이들이 없다. 증산면 전체에 어린이가 딱 7명뿐이고 지난해에는 증산면에 신생아가 딱 1명이었다고 한다.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산중 사찰은 앞으로 찾아올 사람이 없게 생겼다.”

▲지역주민들과는 많이 가까워졌나.
“처음 청암사에 올 때는 김천 지역서 증산면이 제일 불심이 약하다며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겠냐고 스님들이 염려할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학인스님들 졸업식 때 마을주민들이 찾아와서 축하해 줄 정도로 가까워졌다. 학교 운동회 때는 우리 스님들이 다 나가서 학생들과 같이 달리기도 하고 굴렁쇠도 돌린다. 김천시에서 축제를 할 때면 학인스님들이 증산면 대표로 출전하기 때문에 증산면 대표단이 제일 많다. 틈틈이 지역의 독거 어르신들도 찾아가다보니 이제는 지역주민들도 스스럼없이 청암사를 찾는다. 주민들로부터 ‘전국노래자랑에 김천 대표로 청암사 스님들이 출연해주면 안되겠냐’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비록 부탁을 들어주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주민들과 가까워졌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이 세 번이나 지났다. 청암사로 들어오는 길은 여전히 좁지만 그래도 오지라는 이름은 벗었다. 비가 새던 전각들은 반듯하게 수리됐고, 강당이며 요사도 자리를 잡았다. 하루 종일 순서를 정해가며 사용해야 했던 비좁은 세면장과 부족했던 해우소도 옛말이 됐다. 이가 빠진 그릇 때문에 민망하거나 겨울 날 땔감 걱정에 한숨 짓는 일도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새로 입학하는 학인스님들은 자꾸 살이 빠지고 기운이 없었다. 예전처럼 울력을 하는 것도 아닌데 도량 안에서 발을 다치는 일도 많았다. 왜 그럴까. 상덕 스님은 궁금했다. 아니 걱정이 됐다. 찬찬히 학인들을 관찰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갓 입학한 스님들은 승가대학서 먹는 사찰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간장 맛도 모르고 된장 맛도 모르고 입에 맞는 것이라고는 그저 출가 전에 먹어봤던 김 뿐이더라”는 상덕 스님은 섭생이 바뀌니 체질도 따라 바뀌는 과정에서 학인들이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 발은 왜 많이 다칠까. 아스팔트, 포장된 길만 밟고 살다보니 신발 밑에 모래 몇알만 들어가도 미끄러지고 조그만 돌부리에도 걸려 넘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80년대 학인들과 요즘 학인들과의 차이가 있나.
“70~80년대까지만 해도 속세나 사찰의 생활 방식, 인식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출가해 사찰에 와도 크게 불편한 것이 없었고 비교적 빨리 적응했다. 그런데 요즘은 변화가 심하고 괴리가 크다. 학인들이 걸레를 손으로 못 짜기에 물어봤더니 빨래는 탈수기로 짜지 손으로 짜 본적이 없다는 거다. 또 일단 집안에 들어오면 옆방 가는 것을 비롯해 식사, 화장실 등 모든 생활이 집안에서 해결됐는데 사찰에서는 늘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야 하니 처음 출가해서는 생활의 모든 것이 너무 불편하다는 거였다. 충격이었다. 아니, 위기감이 느껴졌다. 사찰의 구조, 승가의 생활 방식이 모두 불편하다면 그것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겠는가. 매우 심각한 현실 문제였다. 사찰구조, 전통방식을 다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는 하나도 문제가 아니었던 것들이 모두 문제가 된 것이다. 부처님 법이 어렵다 쉽다를 떠나서 당장 생활공간에 적응하는 것이 더 어렵다니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꿔야 했다. 청암사도 가능한 현대적으로 바꾸고 있다. 전통사찰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편리하게 바꾸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점이 많다. 바깥과는 워낙 다르기 때문이다.”

▲학인스님들이 적응하는 데는 얼마나 걸리나.
“보통 3년쯤 되면 적응하는 것 같다. 그 정도 되면 사찰과 전각의 아름다움, 전통의 귀중함도 알아보고 불편한 것도 이해를 하게 된다. 하지만 당장 불편하게 느껴질 때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곳이 승가대학이다. 사찰전통문화를 스님들이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는가. 스님들에게 전통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역할이 주어진 시대다. 학인들에게 전통문화의 중요성, 우리의 역할을 알려주고 그들의 시선, 습관이 바뀔 수 있도록 이끌고 기다려 주는 것도 강사의 몫이다. 요즘엔 청암사에서도 한 철에 한 번씩은 피자, 콩까스, 짜장면 같은 것을 먹는다. 그러면 학인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서 요즘에는 꼭 잊지 않고 챙긴다. 처음에는 나도 그것이 이해가 안가서 참 애를 먹었는데 학인들 마음을 생각해보니 이제는 이상하지도 않고 싫지도 않다.”

▲학인들 성향이 다 다를 텐데 조화를 이루기가 힘들겠다.
“학인들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다.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단점이 있고 공부가 느려도 그 사람만 갖고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하나도 나무랄 사람이 없고 버릴 사람도 없다. 다만 학인은 마음의 동요가 있을 수 있는 시기다. 그러니 항상 학인의 마음 상태를 살핀다. 얼굴 보고 행동만 봐도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느껴진다. 그럴 때 적절히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경을 가르치는 것보다 사실은 더 어렵다.”

▲수업이 끝나도 24시간 학인들을 살피는 생활인 것 같다.
“그래서 강사는 학자이기 전에 교육자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예불이나 대중공양에 빠지질 않았는데 요즘엔 나이 탓인지 한 번씩 힘에 겨울 때가 있다. 그래서 발우를 함께 못 펴거나 예불을 함께 못할 때가 있는데 며칠 그러면 예불 소리가 벌써 달라진다. 어른이 있고 없고에 따라 마음이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학인들 탓이 아니다. 승가대학은 학인들에게 흐트러진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굳이 승가대학에서 대중생활을 하는 의미가 없다. 학인들의 보람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학인들과 함께 생활해 주는 것이 의무이다.”

대중이 함께 생활하니 개인 시간을 갖기는 힘들다. 그러니 여행도 학인들과 함께 한 졸업여행이 고작이다.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도 일만 마치면 그날로 돌아오기 일쑤다. 이제는 그것이 습관이 됐다. 한때는 ‘왜 승가대학을 열어 이런 고생을 하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강사가 된 보람은 뭔가.
“자유는 부족하지만 늘 부처님 경전을 접하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알차게 습득하고 이해해서 학인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고민이자 보람이다. 그렇게 해서 학인들이 잘 들어주고 좋았다고 하면 ‘내가 복이 있어 부처님 말씀 전하는구나’ 싶다. 또 언제나 초발심이 성성하게 살아있는 스님들과 소통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다.”

▲강사의 길을 가게 되는 스님에게 당부할 말은.
“교직자는 소임이 없어야 한다. 단순하게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오직 지금 하는 일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면 나중에 소임을 맡아도 잘 해낼 수 있다. 교직자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생활은 답답하다. 융통성이 없으니 무슨 일을 같이 하려면 옆 사람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스님들이 강의도 잘하고 출가자로서 풍기는 모습 또한 배울 것이 많다. 강사가 되고자 한다면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오직 부처님 말씀 배우는 것만 열심히 하겠다는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경전을 보는 즐거움은 어디에 있나.
“경을 읽다 보면 어떤 때는 환희심이 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거짓말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또 어떨 때는 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행자가 들어오면 ‘초발심자경문’ 읽게 한다. 외우려 애쓰지 말고 계속 읽으라고 한다. 무조건 읽다보면 외워지기도 하겠지만 계속 읽다 보면 전에는 못 봤던 것이 보이기도 하고 마음에 깊이 느껴지며 ‘이거였구나’ 싶을 때가 있다. 그런데 다음에 또 읽으면 별다른 감흥이 없이 밍밍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반복되면서 내공이 쌓인다. 모르더라도 계속 소리 내며 읽으라고 하는 이유다. 수십 년 다니던 사찰이라도 내내 보이지 않던 것이 어느 날 보이고, 어느 날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왜 못 봤을까, 왜 못 느꼈을까 싶은 곳이 사찰이다. 경도 역시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지금도 그런 경험을 하나.
“물론이다. 그래서 경을 보고 또 봐도 다르다. 분명 작년에 가르쳤는데, 올해 또 보면 다르다. 그러니 또 보기 잘했다 싶다. ‘서장’ ‘선가귀감’ 같은 것도 매년 가르쳤지만 작년, 재작년에 못 느꼈던 것이 불현듯 다가오면 올해는 새로운 설명을 하게 된다. 그때는 왜 이런 생각이 않났을까 싶을 정도로 새롭다. 내년에는 또 어떤 느낌일지 기대된다. 그러니 글을 안 볼 수가 없다. 매년 가르치는 것을 뭐하러 또 보는가 싶겠지만 지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깨우침과 하나 되어 전달될 때 나 스스로에게도 공부가 된다. 요즘에는 율장을 보면서 옛날에 느끼지 못한 것이 가슴 깊게 닿을 때가 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싶은 것이 부처님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라는 말을 숨길 수가 없다. 대단하신 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렇게 경을 보는 것이 좋으니 다른 길을 고민해 본적이 없다.”

▲교와 선의 관계는 무엇인가.
“진정으로 사교입선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내가 허구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경을 보거나 염불을 하거나 다른 수행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을 하든 사교입선과 같은 경지까지 갈 수 있다면 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지향점으로 가는 여러 갈래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마다 다 성향이 다른데 어느 하나만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온전히 내 것만 된다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평생 선방 수좌로 정진해 온 은사스님은 맏상좌가 수좌 되길 바랐다. 한 번도 아쉬운 내색 하지 않으시지만 그런 은사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그뿐이랴. 좋은 스승 찾아 출가인연 맺어주기 위해 애쓴 모친 또한 상덕 스님에게는 또 한 명의 스승이나 다를 바 없다. 게으름이, 흐트러짐이 들어설 수 없는 이유다. 은사스님의 아쉬움과 모친의 원력을 딛고 들어선 강사의 길이 이제 스님에게는 오롯이 수행의 길이 되었으니 이 또한 사교입선이 아닐까.

▲학인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은.
“스님다운 스님이 되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은 많이 배웠다, 배우지 못했다는 상관없다. 행동이나 생각이 스님다울 때 포교도 할 수 있다. 또한 승가대학에 있을 때 전통문화를 습득해야 한다. 청암사서 사찰음식, 다도, 태극권 등을 지도하고 자격증을 따도록 하는 것도 이런 전통문화에 대한 강조다. 스님에게 수행만 요구하던 시대는 지났다. 수행 외에도 다양한 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와 계승이 스님의 몫이 되고 있다. 그러니 무엇이든 잘해야 한다.”

▲청암사 내에서도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관해 고민하는 부분이 있나.
“청암사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청암사를 찾아온 이들이 전각만 바라보다 가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지금까지는 수행하고 도량 잘 관리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찰을 찾아오는 이들이 작은 감동이라도 얻어 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 전각 구경하고 공기 좋다는 생각만 갖고 돌아가서는 사찰이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없다. 쌀 저장소로 쓰던 고방을 최근 다실로 고친 것도 그런 차원의 시도일 수 있다. 돈을 많이 들이거나 화려하게 꾸미지 않더라도  이야깃거리가 있고 누구나 편한 마음을 얻어가는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건 분명 강사의 고민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이니 상덕 스님의 이런 고민도 이젠 어색하지 않다. 다만 ‘청암사의 다음 강사는 이런 고민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상덕 스님의 소박한 바람이다. 여전히 강사에게 소임을 맡기기도 하지만 사중 일 때문에 마음 쓰지 않도록 살피는 것도 상덕 스님의 몫이다. “같이 생활하기 좀 답답해 보이더라”도 우직하게 경전 보고 학인 가르치는, 그 길밖에 모르는 강사를 만난다면 그 옆에서 ‘답답함’은 기꺼이 자신의 몫으로 끌어안을 준비가 돼 있다. “밤늦도록 혼자 책을 보거나 글을 정리할 때면 눈이 시리고 아프지만 잡념 없이 경전에만 집중할 수 있어 더 좋다”며 소박하게 웃는 상덕 스님은 그래서 더 묵직하다. “내 방에 늦도록 불 켜져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학인스님들이 공부하느라 애쓴다고 생각해주는 것이 더 고맙다”며 천진불처럼 한 번 더 웃는 모습에선 왠지 모를 뭉클함이 올라온다. 이런 출가자의 묵직함이, 소박함이, 잔잔한 미소가 천년의 도량과 2500여년의 정법을 이어온 힘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긍정적이고 밝은 미소의 원천은 신심과 배려”

내가 본 상덕 스님

 

비구니선문회장 대웅 스님: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자신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성품이었다. 그런 공심이 있었기에 청암사승가대학의 오늘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절 살림을 이끌어가면서도 한 번도 후회하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신심이 있었기에 가능하다. 워낙 긍정적인 성격이고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지만 어쩌다 엄하게 지도할 때의 딱 부러지는 모습은 본 사람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는 언제 보아도 본받고 싶은 장점이다. 별 생각 없이 ‘이거 참 좋아 보이네요’ 소리를 했다가는 그 자리에서 덥석 집어주며 ‘스님하세요’할 정도니 사심이나 욕심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늘 승가대학과 사중 일이 우선이라 지금까지 여행 한 번 같이 가보지 못한 점이 아쉽다.

개암사 주지 재안 스님: 3년여 전에 한국문화연수원에서 템플스테이 사찰연수에 참여하며 처음 스님을 만났다. 늘 친근하고 자상하게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그때나 지금이 한결 같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비구 스님과 비구니 스님의 대화가 자칫 의례적이 될 수도 있는데 그런 벽이 전혀 없었다. 어떤 이야기든 자연스럽고 진실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마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가 하면 애니메이션 제작이나 랩 찬불가 제작 등을 추진할 때의 열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젊은이들이 오히려 본받아야할 점이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수행자로서 저렇게 나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영선 청암사 신도: 30여년 전 아이를 임신했을 때 처음 스님을 만났다. 청암사로 오신 후 갓난아기를 안고 청암사를 찾아왔는데 아궁이에 불을 지핀 방을 쓰라고 주셨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님이 쓰던 방을 비워주고 상덕 스님과 지형 스님은 구들장이 망가져 불도 때지 못하는 방에서 주무셨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당신이 지닌 것을 다 내어준다. 이제 연세도 많고 건강도 살펴야 할 나이인데 영양제나 비타민제 하나 챙겨 드시는 것을 못 본다. 대중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몸이 불편해도 그런 내색 안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손수 바느질해 바지를 만들어 입을 정도로 검소한 모습을 보면 평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청암사 도량은 스님들의 청춘과 바꾼 결과다.

 [1344호 / 2016년 5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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