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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오른쪽 어깨 드러낸 불상들의 유래

기자명 주수완

편단우견 불상, 인도 남부서 해양실크로드로 신라 전래 추정

▲ 인도 쿠샨시대의 마투라 불상. 기원후 2세기 전반에 제작된 이른 시기의 불상이지만 이미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보이고 있다.

불상이 가사를 걸치는 방법에는 크게 통견식과 편단우견식의 두 형식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통견은 양쪽 어깨가 모두 가사로 덮여 있기에 나온 말이고, 편단우견이란 가사를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오른쪽 어깨는 노출시킨다는 의미이다. 편단우견의 대표적인 불상은 석굴암 본존불상인데, 특히 항마촉지인을 결한 불상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황룡사지·영주 숙수사지 비롯해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부조까지
경주 중심 신라 영토였던 곳서
편단우견 불상 집중적으로 발견

삼국 중 신라는 바닷길을 통해
인도 아쇼카왕 세우려던 장육상
조성 계획 이어 받아 황룡사에
완성했다는 설화 간직할 만큼
실제 해상교역도 활발했을 것
다만 확신하기엔 변수도 존재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이유에 대해서 학자들은 인도가 더운 나라였기 때문에 인체를 노출시키는 일이 일상적이었다고도 말한다. 혹은 그것은 단지 상징적인 표현이며, 실제 그렇게 노출시키지는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영화 ‘300’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날카로운 창검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 갑옷도 없이 벗은 몸으로 돌아다니는데, 이는 고대 예술품 속에 나오는 전사의 이상화된 모습을 반영한 것일 뿐이며, 실제 전장의 스파르타 전사들은 중무장한 군인들이었던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다른 한편으로는 어깨를 드러내는 행위는 하나의 인사법이었고, 예를 표하는 방법이었다는 설명이다. 즉, 옷의 일부를 벗어 신체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숨기는 것이 없으며, 나아가 상대방에게 복종하겠다는 의미의 예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상호간에 신뢰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하간 바로 이렇게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불상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 특히 불자들에게는 익숙하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경망스러운 복장이었던 것 같다. 인도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마투라의 불상부터 이미 편단우견을 하고 있었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불상들은 거의 모두 통견을 하고 있다. 드물게 북위시대 만들어진 운강석굴에서 편단우견의 대형 불상들을 볼 수 있는데, 그나마도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원래는 어깨뿐 아니라 오른쪽 가슴도 드러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운강석굴의 편단우견 불상들은 그야말로 어깨와 쇄골만 드러내고 가슴은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으며, 노출된 어깨 위에도 가사 자락을 덮어 몸을 최대한 감추고 있다. 이마저도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스타일이었다.

▲ 경주 황룡사지 출토 편단우견 금동불입상.

그런데 특이하게 신라 경주를 중심으로 삼국시대 신라의 영토였던 지역에서 완연한 편단우견의 불상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바 있다. 경주 황룡사지를 비롯해 영주 숙수사지에서 나온 금동불입상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주 단석산 신선사에서는 마애부조로 표현된 불상들 대부분이 편단우견의 착의법을 하고 있어 특정 시기에 이 도상이 매우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단석산 신선사에는 국보 제83호 반가사유상과 동일한 형태의 반가상 부조도 있어서 편단우견 불입상 유형의 편년에 있어 대략적인 기준이 된다.

▲ 영주 숙수사지 출토 금동불입상.

특히 편단우견이 가장 많이 적용되는 불상의 도상은 원래 석가모니께서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실 때의 장면인 항마성도 장면에서 촉지인을 결하신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항마촉지인 도상이 들어온 것은 의외로 늦어서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로 생각되고, 대신 신라의 편단우견 불상은 전부 입상이라는 특징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약합(藥盒)으로 생각되는 자그마한 단지를 들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거기다 삼국시대 불입상이 대부분 뻣뻣한 직립의 자세를 하고 있는 반면, 유독 편단우견의 불입상들은 삼곡자세, 즉 한쪽 다리에만 무게를 실어 서있기 때문에 자세가 삐딱한, 그래서 더 인간적인 모습이 느껴지는 자세로 서있는 경우가 많다.

▲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 중의 편단우견 불입상.

편단우견이 특정시기에, 그것도 거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으로 갑자기 등장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학자들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가설의 대체적인 윤곽은 대동소이하다. 우선, 이들 불상들은 처음 발견되었을 때 손에 단지를 들고 있다는 이유로 약사여래입상으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앞서 서산마애불의 도상 문제를 다룰 때 언급한 바와 같이 약사여래는 우리나라에서 삼국시대에는 유행하지 않았던 것 같고, 통일신라로 넘어가야 등장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이들 편단우견 불상 그룹을 모두 약사불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 남인도 아마라바티 출토 석불입상.

또한 이러한 형식의 불상들이 인도에서도 아무데서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인도 남부 지역의 사타바하나 왕조의 수도였던 아마라바티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었음이 밝혀졌다. 다만 아마라바티 지역의 불상들은 신라 편단우견 불상들처럼 약함 같이 생긴 단지를 들고 있지는 않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면 저 멀리 인도 남부지역의 불상들이 어떻게 신라에까지 전파되었던 것일까? 이런 유형의 불상들은 전통적으로 불교가 전해졌다고 하는 루트인 실크로드-중국 구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불상형식이었기 때문에 그 전파경로가 의문일 수밖에 없다.

▲ 베트남 출토의 아마라바티 양식 금동불입상.

이 문제는 미술사학자들의 시각이 동남아시아 불상으로까지 넓어지면서 의외로 스리랑카, 베트남,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이러한 유형의 불상들이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즉, 전통적인 실크로드 루트가 아니라 해양실크로드, 다시 말해 바닷길로 신라에 전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들이 발견된 셈이다. 이 해양 전파 루트는 일찍이 알렉산더 소퍼(Alexander Soper, 1904~1993)에 의해 강조된 바 있었다. 그는 중국불교미술사의 발전상이 주로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불교문물을 먼저 접했던 남북조시대의 북조 왕조들을 통해 연구되고 있던 때에 사실상 그들의 발전에 한족(漢族) 문화의 영향이 지대했었다는 것을 주장했던 학자였다. 그렇다면 남조의 한족들은 어떤 경로로 인도로부터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을까. 그것이 바로 해양실크로드의 바닷길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삼국 중에서도 특히 신라는 바닷길을 통해 인도의 아쇼카왕이 세우려고 했던 거대한 장육상의 조성계획을 이어받아 황룡사에서 이를 완성했다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실제 해양교역도 활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제, 고구려에 막혀 대륙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신라에게 바닷길은 유일한 소통의 창구였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과정에서 해양실크로드의 끝단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쉽게 풀릴 것 같은 문제였지만, 문제는 점점 복잡해졌다. 첫째로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로 전해지는데 결정적인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할 중국 남부지역, 특히 해양교역에서 중점적인 역할을 했던 복건성 천주, 광동성 광주, 혹은 절강성이나 당시 남조의 수도였던 남경 등지에서는 이러한 유형의 불상이 한 점도 발견된 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을 건너 뛰어 신라가 동남아시아 나라들과 직접 교류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직 그런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둘째로는 이들 동남아시아 나라들에서도 단지를 들고 있는 편단우견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과연 신라 편단우견 불입상의 직접적인 원류라고 할 수 있을지 아직 단언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만약 동남아의 도상을 받아들여 단지를 든 불상으로 신라인들이 재창조했다면 도대체 어떤 부처님을 염두에 두고 이런 변형을 만들어냈던 것일까?

▲ 전북 정읍 보화리 출토의 백제 쌍불입상. 모두 편단우견이다.

여기에 몇 가지 변수들이 있다. 문제를 더 꼬이게 만드는 요인일지, 아니면 문제를 풀 단서일지는 아직 모른다. 첫째는 백제 지역에서도 유일한 편단우견 불입상이 발견된 것이다. 전북 정읍 보화리에서는 두 구의 불입상이 나란히 발견되었는데 모두 편단우견이다. 원래부터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도 의문이다. 원래 한 쌍이면 태안마애불처럼 두 구가 같은 크기여야 할 터인데, 크기가 다르다. 작은 크기의 불상이 한 구 더 있어서 삼존불 구성이었을 수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더불어 신라의 예처럼 단지를 들고 있지도 않다. 이 백제의 편단우견 불상이 동남아와 신라를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까?

▲ 산동성 청주 용화사지 출토의 석불입상.

또 다른 변수는 중국 산동성 청주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들인데, 용화사지와 같은 절터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차곡차곡 매장된 채 발굴되었다. 이들 중에 동남아시아에서 유행했던 편단우견 불입상 형식의 불상들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된다. 만약 동남아시아의 영향이라면 중국 남부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발견되었더라면 이야기가 딱 맞아떨어졌겠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이들 불상은 더 북쪽으로 거슬러 북제의 영역이던 산동성 청주에서 발견되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5세기 초 인도 순례를 마치고 인도네시아를 거쳐 바닷길로 귀국하던 동진(東晋)의 고승 법현(法顯, 337~422)은 원래 광동성 광주를 목표로 출발했지만 표류하다가 결국 산동성 청주에 상륙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때 법현이 가져왔던 동남아시아 불상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이 지역에서 동남아시아 양식의 불상을 유행케 했던 것일까?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다소 경망스럽게 보일 수 있었을 이 편단우견의 불상들은 그러나 조각가들의 입장에서는 비로소 인체를 표현할 수 있는 핑계를 댈 수 있었던 하나의 돌파구 같은 조각이었을지 모른다. 이후 동아시아의 불상들은 점차 옷을 얇게 조각하고 대신 옷 아래 불상의 몸을 드러내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부처님이 점차 인간을 닮아가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44호 / 2016년 5월 1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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