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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정찬정 배첩장인

풀 쑤던 소년, 종이에 담긴 천년 얼과 지혜 지키며 어른이 되다

▲ 정찬정 배첩장인은 이제야 보람을 느낀단다. 고서화 등 지류문화재를 수리하고 복원하면 거기에 담긴 선조들 지혜와 얼이 수백년 보존된다는 자부심이다.

76년 서울 인사동서 배첩 입문
풀 쑤고 틀 나르며 가게서 숙식
차가방 운영하며 본격적인 작업
90년 문화재수리기능 자격 취득

2015년 장황문화재연구소 개설
보물 등 문화재 수리복원 전념
과학적 접근이 신뢰 얻고 있어
매번 보고서 남겨 후대에 전승

성장 멈춘 소년이 있었다.

공부가 싫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먹고 살길이 급했다. 8살 터울 형에게 졸라 서울 인사동 표구사에 발을 들였다. 못 배운 점이 늘 아쉬웠던 형은 공부를 권했다. 소년은 돈을 벌겠다고 맞섰다. 겨우 열일곱이었다.

1970년대, 서울 인사동은 시서화로 넘쳐났다. 고미술과 현대적 화랑이 어우러졌다. 시서화를 돋보이게 만드는 표구도 이 거리를 채워갔다. 쌀 한 가마니를 주고 일 배우던 시기는 아니었다. 대신 밥 먹여주고 재워주면 그만이었다. 사실 월급도 없다. 기술 하나 제대로 익혀 밥벌이하던 그때 그 시절, 10대들은 ‘표구 전성시대’에 발을 들였다. 소년도 그랬다. 1976년이었다.

“인사동에 표구사들이 많았어요. 일 끝나면 다른 표구사에 있던 또래 친구들과 거리를 활보했죠. 하하하. 풀이 덕지덕지 붙은 옷을 그대로 입고 창피함도 모르고 의기양양 무리를 이뤄 다녔습니다.”

소년은 또래들처럼 열심히 했다. 매일 물 갈아주며 풀을 쒔다. 식으면 덩어리를 체에 거르는 일이 반복됐다. 밥도 하고 심부름을 도맡았다. 인사동서 청계천 세운상가까지 표구된 작품을 어깨에 짊어지고 날랐다. 표구할 작품이 들어오면 목공소에 가서 틀을 가져오는 일도 소년 몫이었다. 겨울이면 손발이 시렸다. 세운상가서 병풍 팔던 상인이 사준 장갑은 그렇게 따듯했다. 지난했지만 관둘 수 없었다. ‘이 일 아니면 밥 먹고 살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만큼 간절했다. 해는 왜 그렇게 짧았을까. 3년을 했다. 일 배울 틈이 없었다. 알을 깨고 나왔다.

“풀 끓이고 밥 하던 일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표구사를 나왔어요. 당시는 작업대에서 자곤 했는데, 여름이면 옷도 다 벗고 누웠죠. 겨울이 문제였어요. 시멘트 바닥이었는데 연탄을 떼서 따듯하긴 했는데 가스가 새는 겁니다. 견습생이자 막내였기에 바닥에서 자고 다음날 일어났는데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아침 밥하러 옥상에 올라갔는데, 찬바람 쐬고 나니 정신을 잃었어요. 누군가 가져다준 드링크 한 병 마시고 다 토해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걷던 길에서 생긴 상처는 도전의 문을 열었다. 마침 형이 가게를 비워야 하는 시절인연도 소년을 도왔다. 형은 과천에 있는 현대미술관으로 옮기게 됐다. 서양화 수리복원하는 사람만 있었던 미술관이 한국화나 동양화 등 지류를 수리복원하는 사람을 찾고 있던 차였다. 어렸던 소년보다 형이 선택을 받았다. 1987년, 서울 인사동 차가방 운영을 도맡게 됐다.

사실 ‘표구’는 일본식 표현이다. 배첩(褙貼)은 시서화에 종이·비단을 발라 족자·액자·병풍 등을 만들어 미적 가치를 높임과 동시에 실용성과 보존성을 높여주는 전통적 서화처리법을 뜻하는 한국 전통 용어다. 조선초 ‘장황사’라는 표현이 있지만 ‘책이나 서화책을 꾸미는 일’이라는 뜻으로 배첩의 옛 이름이자 중국식 표현과 유사하다. 지금은 표구, 장황, 배첩이 혼용돼 사용된다. 

▲ 낡아서 곳곳에 빈틈 생긴 초상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정찬정 배첩장인.

배첩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쳐 꾸준히 발전했다. 조선시대에는 서화 융성과 왕실 및 문중이 조상의 초상을 모시는 유교적 문화 영향으로 배첩장이라는 전문가가 있을 정도로 성황이었다. 배첩장은 조선초부터 제도화된 도화서(圖畵署) 소속으로 궁중 서화처리를 전담하던 전문가다. 조선시대 기록에 배첩장이 등장한다. ‘인조실록’ 10권에 김길과 김덕남 이름이 처음 나온다. 사실상 첫 배첩장인 셈이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 제102호가 배첩장(褙貼匠)이다.

차가방 터줏대감이 되자 형에게 들어왔던 일이 자기 앞으로 왔다. 소년은 눈 돌릴 틈 없이 배첩했다. 배첩은 쉽게 말해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시서화 등 작품에 옷을 입혀 더 돋보이게 하거나 오랜 보존을 위해 노력했다. 가장이 된 소년에게 있어 배첩은 고서화 보존보다는 노동이었고, 가족들 생계를 책임지는 방편이었다.

“수요가 굉장했습니다. 견습생일 때부터 그랬습니다. 배첩하는 표구사들이 인사동 돈을 다 벌었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인건비가 저렴해서 수익이 많이 남았었죠.”

70년대 후반은 인사동 풍경을 급속히 바꿨다. 올림픽이 유치되고 아파트가 늘면서 집집마다 소파 뒤 그림 한 점 거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유행은 인사동 변두리까지 배첩하는 가게로 장식했다. 90년대를 거치면서 배첩은 대폭 줄어들었다. 인사동 표구사들이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시점도 이 무렵이었다. 대량으로 표구가 제작됐고, 전통은 설 자리를 잃어갔다. 날림으로 일하는 것도 눈에 띄게 늘었다.

“90년에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증을 땄어요. 1242호입니다. 이쪽 세계가 어두웠어요. 수요가 많아지니까 제대로 배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 일을 맡았고 폭리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문화재도 수리복원하고 나랏돈을 받았던 거죠.” 

차가방서 30년5개월 동안 배첩, 아니 일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소년은 50대가 됐다. 40년간 배첩을 하면서 느끼지 못했던 보람이 뒤늦게 잠들어 있던 성장판을 깨웠다. 생계를 위해 했던 배첩이 다르게 보였다. 종이에 담긴 글과 그림에서 천년 얼과 지혜가 풀 쑤던 소년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키고 싶었다.

2015년 10월 서울 신길동에 장황문화재연구소를 설립했다. 고서화, 괘불, 불화 등 지류문화재 수리복원에 남은 인생을 걸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마흔 번 오가는 동안 익어온 배첩을 의미 있게 풀어내려고 한다. 대표직함을 단 소년은 장황문화재연구소 팀원 4명과 국가지정문화재와 도지정문화재 수리복원과 보존처리를 했다. 문화재 전문위원들 자문 거쳐 전 과정을 사진 등 기록으로 남겼다.

보물 제761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언해(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諺解)’ 권2와 권5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부터 의뢰받아 수리복원했다. 충북 유형문화재인 우암 송시열 초상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 초상도 보존처리했다. 1년3개월이나 정성을 들였다. 의뢰를 한 기관들과 신뢰가 쌓이고 있었다. 소년의 가슴도 벅차오르고 있었다.

“군데군데 벌어지고 떨어진 부분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최대한 같은 재료를 찾아 오려서 메웁니다. 조직을 똑같이 직조합니다. 종이도 장인들이 만드는 한지를 주문해 사용하는 등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려고 노력해요. 흘러버린 시간을 되돌리는 고된 작업입니다. 그래도 문화재에 담긴 선조들 지혜와 얼이 후대로 전해진다는 사실과 제대로 복원했다는 자부심에 보람을 느낍니다.”

소년은 아빠가 됐다. 복원되고 보존처리된 지류문화재를 망설임 없이 “내 새끼”라고 부른다. 그만큼 작업에 피땀 쏟는다. 앞서 배첩한 선조들 지혜도 엿보며 감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모른다. 고서화든 현대 서화든 작품이나 작가는 기억한다. 배첩하거나 수리복원하고 보존처리한 장인들 기록은 찾아 보기가 어렵다.

 
▲ 지류문화재들을 복원하는 장황문화재연구소와 도구들.

그래도 소년은 묵묵히 길을 걷는다. 지난해부터 교수직함을 달고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서두르지 말라고 이른다. 풀솔 하나도 제대로 잡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자기 것이 된다고 가르친다. 주말이면 장황문화재연구소도 개방해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지도한다.

“예전에는 작품에 옷만 입힐 줄 알았고 이건 얼마나 나갈까 하는 생각이 컸습니다. 이제 선조들 얼이 반백년이든 천년이든 원상태로 보존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옛 사람들은 이렇게 경책한다.

“나무는 꽃에 집착하지 않아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비로소 바다에 든다.”

돈이라는 물욕 내려놨다. 집착 버리니 성장판 열렸다. 소년, 비로소 어른이 됐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정찬정 배첩장인이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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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엄경’ 등 문화재 수리보존에 혼신

장인 손길 닿은 작품

전통 한지 등 원 재료 찾아내
전문위원 자문 받아 정성 복원

▲ 충북 유형문화재 제332호 우암 송시열 초상(사진 위)과 제333호 수암 권상하 초상이 그의 손을 거쳐 복원됐다.

정찬정 배첩장인은 지류문화재 수리복원에 여생을 던졌다. 그래서 전통 한지 등 문화재 원 재료를 찾아내 문화재 전문위원 자문을 거쳐 과학적인 방법으로 복원에 임하는 등 정성을 쏟고 있다.

그가 대표로 있는 장황문화재연구소는 보물을 원상태로 되돌려 놨다.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언해(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諺解)’ 권 2와 권 5다. 보물 제761호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의뢰한 수리복원사업이었다. 본서는 1461년(세조 7)에 교서관에서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금속활자본이다. 전체 10권 중 제2권과 제5권 등 2책만 남은 영본(零本)이다. 이 경전은 ‘능엄경’으로 불리는데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경험해 얻을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문화재이기도 했지만 부처님 말씀이 담겼기에 그는 수리복원에 열과 성을 다했다.

 
▲ 보물 제761호인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2·5 역시 그가 대표인 장황문화재연구소가 수리복원했다.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떼어내 구겨진 곳은 펴고 떨어져 나간 부분은 채워 넣으면서 2015년 10월16일부터 지난 2월15일까지 꼬박 4개월이나 소요해 복원했다.

스승과 제자의 초상이 나란히 그를 찾기도 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332호 우암 송시열 초상(사진 1)과 제333호 수암 권상하 초상이 그의 손을 거쳐 갈라진 부분과 비어 있는 부분이 매끄럽게 채워졌다.

▲ 백두대간 사계를 담은 150m에 이르는 문봉선 작가의 ‘강산여화’를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설치한 이도 정찬정 배첩장인이다. DDP제공

그의 솜씨는 전시에서도 빛을 발한다. 백두대간 사계를 담은 150m에 이르는 문봉선 작가의 ‘강산여화’를 서울 을지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설치했다. 그는 꼬박 20시간을 씨름하며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 흐름을 원형 그대로 살려놨다.

 


[1345호 / 2016년 6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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