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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운문사승가대학장 일진 스님

비구니강맥 이은 첫 전강제자 ‘여성불교운동’의 씨앗 심다

▲ “출가하지 않았다면 군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일진 스님이지만 그 엄격함과 단정함 속에서 누리는 자유와 기쁨은 부처님 가르침과 하나된 삶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자유다.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설거지하던 행자도 큰방에 들었다. 경책하는 주지 스님의 쩌렁한 목소리에 큰방 분위기는 칼날 같았다. 다들 숨 죽였다. 하지만 말석에 앉은 19살 행자의 눈빛은 빛났다. ‘내가 강사라면 이럴 때 학인들에게 뭐라 가르칠까.’ 

“명성 스님 만큼만 되라” 당부한
은사스님 뜻에 1970년 운문사로

‘불교와 여성’ 주제 글 기고로
여성 차별 문제 수면 위로 올려

전강 후 대만·일본 유학 강행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택한 탁마

“1세대 비구니강백 헌신·노력
오늘날 비구니승가 위상 토대"

엄격한 청규도 태산 같은 대중도 버겁지 않았다. 그 속에 늘 자신이 가야할 길이 있었다. 그러니 즐겁고 자유로웠다. 그 행자가 바로 운문사승가대학장 원운일진(圓云一眞) 스님이다. 남들은 살이 쭉 빠진다는 엄격한 행자 시절, 볼살이 통통히 올랐다. 지금도 학인들로부터 종종 “발자국에도 계율이 담겼다”는 소릴 듣는다. 그 말 싫지 않지만 “일탈도 많이 한다”며 소녀처럼 웃는다. 그가 말하는 일탈이란 무엇일까.

충남 서산이 고향인 일진 스님은 1970년 용인 화운사서 재석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살, 겨울의 찬 기운이 여전히 성성한 3월이었다. 꿈이 없었을까. 아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확실한 꿈이 있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산중에 사는 스님이 되고 싶다.” 초등학교 5학년 도덕 시간, 서늘한 눈매의 소녀는 또박또박 자신의 꿈을 말했다. 성장하며 섬 마을 선생님을 동경하기도 했다. 정치외교학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다 한때 생각이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탤런트 이순재씨가 동창인데 한 번 만나보라”며 연예인의 길을 추천하기도 했다. 아마 반듯한 이목구비가 선생님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보였음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출가했다. 초등학교시절부터 품어온 꿈이 마음속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일 터다.

▲고등학교 졸업 후면 한창 꿈 많을 시기다. 출가 외에 다른 계획은 없었나.
“초등학생 때 말한 장래희망이 아마도 뿌리가 된 것 같다. 중학생 때도 ‘내가 만약 스님이 되면 영어가 필요할까, 한문이 필요할까’ 궁금해 선배들에게 묻기도 했다. ‘한문이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선배들 말에 한문을 열심히 공부했다.”

▲ 출가 후 행자생활은 어땠는가.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좋았다. 쑥 뜯어 송편 빚는 것도 좋았고 밥 잘했다는 말만 들어도 행복했다. 상채공 스님이 조리를 하면 그 음식 담기에 적절한 그릇을 찾아 드렸다. 그럴 때 스님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했다. 그런 것들이 즐거웠다.”

▲그래서 행자시절 살쪘다는 말이 나온 것인가.
“사실이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좀 마른 체형이었다. 모친은 ‘퉁퉁한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가 소원이었는데 행자가 되고 나서야 살이 쪘다. 절집에서는 ‘경살 찐다’고 했다. 신심 내서 경을 외우면 ‘경살 찐다’고 하셨는데 살찌는 게 큰 복이던 시절 스님들의 덕담 가운데 하나였다. 그 말씀을 많이 들었다. 틀에 잡힌 반듯함과 규칙적인 생활,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속가 모친은 고향 서산서 지척이던 개심사 신도였다. 집안에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오빠뿐, 자매만 여섯이었다. 그나마 오빠가 군대를 간 후 아버지는 사랑채에만 머무셨다. 개심사 비구니 스님들도 마음 편히 왕래했다. 집안 대소사는 모두 모친 진두지휘로 처리됐다. 큰살림 척척해내던 모친의 성격은 일진 스님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하지만 막내 일진 스님을 노산으로 낳은 후 살림과 어린 동생들 치다꺼리는 일찍 시집간 첫째 언니를 대신해 16살 위 둘째 언니 몫이 되었다. 가뜩이나 작고 약하게 태어난 막내 동생을 보며 ‘살 수 있을까’ 걱정하던 둘째 언니는 스무살에 출가했다. ‘연세 많은 모친의 서운함보다 이제 겨우 4살 된 동생이 눈에 밟혔다’는 그 둘째 언니가 용인 화운사 혜준 스님이다. 일진 스님이 화운사서 출가한 것도 당시 화운사 주지 지명 스님의 맏상좌가 혜준 스님이었던 이유다. 혜준 스님은 일진 스님의 머리를 손수 깎아 주었다. 승속을 넘나드는 지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다섯째 언니도 출가했다. 서울 양지암 성업 스님이다. 지금이야 자주 서울을 오가니 한 번씩 만나지만 젊어서는 오히려 얼굴 볼 기회도 드물었다. 하지만 한 부모 아래 태어난 지중한 인연에 함께 불법에 귀의했으니 아무리 출가자라 해도 그 각별한 인정이야 숨길 수 없다. 일진 스님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이치라 생각한다.

▲ 화운사에도 강원이 있었다. 그런데 운문사로 옮긴 이유는 무엇인가.
“화운사 행자시절 치문 과정을 배웠다. 비구니강백 묘순 스님이 당시 화운사강원 강사로 계셨다. 하지만 행자를 마칠 즈음 묘순 스님이 서울로 올라가셨다. 은사께서 이곳저곳 꼼꼼히 알아보시고는 명성 스님이 가시기로 예정돼 있던 운문사강원을 택하셨다. ‘운문사로 가서 명성 스님만큼만 되라’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운문사로 떠나는 날 버스터미널서 은사스님이 내 손을 끌어다 명성 스님 손에 쥐어 주며 ‘우리 상좌 강사 만들어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때 명성 스님은 ‘강사는 본인이 되는 겁니다’고 대답하셨다. 그 당부와 가르침을 품고 명성 스님과 함께 운문사로 내려왔다.”

▲ 일진 스님의 화운사 행자시절 ‘일진’이라는 법명을 직접 지어 주신 대은 강백 스님.

▲상좌를 강원 보내는 경우도 드물었던 시절이다. 재석 스님이 ‘강사 만들어 달라’ 당부까지 한 이유는.
“그때는 은사스님 뜻을 따랐을 뿐이지만 지금 와 그 뜻을 헤아려보면 몇 가지 짚이는 게 있다. 무엇보다 은사스님에게는 공부의 기회가 없었다. 동진 출가해 공양주를 3년이나 살며 절 일을 거들었다. 그러니 상좌 생기면 공부 시키겠다는 원력을 세우셨던 것 같다. 은사스님 방문 앞에 보따리가 하나 있었는데 1,2학년 때 강원서 배우는 교재들이었다. 그 위에 어설프지만 꾹꾹 눌러쓴 힘 있는 글씨로 ‘상좌 줄 책’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책을 내가 가장 먼저 받았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
3학년 과정인 사교를 마치고 화엄경 차례가 되자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보고 뜻을 새길 줄 아는 것만도 좋았는데 이 경전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불교 역사도, 범어, 팔리어로 된 경전도 궁금했다. 더 넓은 공부가 필요했다.

“제가 학교를 좀 가야겠습니다.” 전화기 너머 재석 스님은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잠시 생각 좀 해보자”는 은사스님의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은 일진 스님은 이번엔 명성 스님을 찾아갔다. 명성 스님도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학교 가겠다’는 말이 어른스님들 귀에는 ‘환속 하겠다’로 들리던 시절이었다. 입 밖에 내기도 힘들던 그 말을 꺼내 놓았다. 그날 밤 잠 못 드는 이 한 둘이 아니었을 터다. 재석 스님은 다음날 “올라와라” 한 마디로 일진 스님을 불렀다. ‘모범학부형’ 소리 들을 정도로 앞장서 뛰어다니며 상좌의 동국대 승가학과 입학을 준비했다.

▲ 은사 재석 스님은 어떤 분인가.
“복을 지으신 분, 닦으신 분이다. 공양주를 3년이나 살며 가마솥 씻은 물 한 방울 안 버리고 다 드실 정도로 알뜰하고 검소하셨다. 스스로를 위해서는 약 한 알 안 챙겼다. 세납이 명성 스님과 비슷한데 일찍 입적하셨다. 당신 몸을 너무 아끼지 않았기 때문 일 수도 있다. 상좌 다섯을 다 대학 보내셨다. 알뜰히 살며 모은 돈으로 서울서 공부하는 학인들도 후원하셨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 다 기울이던 옛 스님들의 모습을 은사스님을 통해 보았다.”

▲ 일진 스님의 은사 재석 스님. 일진 스님은 “근검한 생활로 후학을 양성하는데 헌신한 은사스님을 떠올릴 때마다 오늘날 우리는 인재를 키우는 일에 얼마나 애쓰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며 은사스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대학은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그토록 궁금하던 불교, 부처님의 말씀을 뿌리부터 확인해 나갈 수 있었다. 승가의 역할, 특히 여성수행자의 위상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기회도 이 시기였다. 토론 수업을 할 때면 ‘여성수행자와 사랑의 감정’ 같은 것을 주제로 택하기도 했다. 감추고 외면할 문제가 아니라 직관하고 판단해야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1977년 ‘석림’지에 ‘불교에 있어서 여성은 열등한가’라는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3학년 때다. 당시 학생 대표로 송사를 써야 했는데 비구스님들의 의견을 담기 위해 당시 함께 학교를 다니던 홍사성(당시 그는 출가자였다)씨를 만나 조언을 받았다. 그 즈음 기도하러 갔을 때 비구스님들로부터 들은 ‘여자가 백년을 해봐라. 깨달을 수 있나’라는 소리가 가슴에 박혀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해 그와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눈 것이 계기가 돼 기고를 제안 받았다. 그 글이 ‘석림’지에 게재되고 몇 년 후에는 ‘법륜’지에도 실리게 된 것 같다.”

▲당시 그 글이 큰 화제가 됐다.
“그렇다. 특히 해인사 지대방서 많이 언급됐다고 들었다. 지대방서 의견이 둘로 갈렸는데, 한 쪽은 ‘누가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였고, 다른 쪽은 ‘일진이가 누구인데 이런 글을 썼는가’였단다. 일진이 누구인지 궁금해 운문사를 찾아오는 이들도 있었다. 두고두고 이 글과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당시 여성불교의 개념에 관해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 있었나.
“거의 없었다. 원시불교 분야서 김동화 박사의 연구를 좀 살펴볼 수 있었고, 나머지는 기독교 관련 자료가 소수 있을 뿐이었다. 당시는 ‘여성불교’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후 팔경법이 직접 거론되고 ‘여성불교’라는 개념과 움직임이 활기를 띠면서 오히려 더 민감한 사안이 된 것 같다.”

▲운문사 내에서 어른 스님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당시에는 운문사에서도 별다른 거론이 없었다.”

▲이 글로 인해 힘든 일은 없었는가.
“지금 생각해보면 대중과 함께 살았기에 대중이 나를 보호해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글의 논조는 단호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비구와 비구니라는 교단의 두 날개가 함께 가야한다, 특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기에 초기에는 큰 반발은 없었던 것 같다.”

▲이글을 썼을 때의 여건을 지금과 비교하면 변화했다고 느끼는가.
“아니다. 이글을 쓸 당시의 심정은 순수한 열정이었다. 그런데 좀 더 신중하게 들여다보면 여성만 더 불이익을 당한 것은 아니다. 사회에는 언제나 이중 구조가 존재한다. 여자는 이래야 되고 남자는 저래야 된다는 인식이 고착화돼 있을 뿐이다. 여성에게 요구되는 모습이 있는 것처럼 남성에게 강요되는 모습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 본성에는 차이가 없다. 세상이나 종단의 현실, 지금 처해있는 위치와 구조가 그런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변화의 시기를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물론 불교계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 속에는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그때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면 지금은 곳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인다. 실천을 통해 사회적 인식, 위상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불러오는 빠른 길이다. 많은 이들이 제도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면 그 또한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

동국대 졸업 직후 일본 문무성 초청으로 유학의 길도 열렸다. 하지만 은사스님과 명성 스님의 뜻에 따라 운문사로 돌아왔다. 일진 스님은 “그때 어른스님들의 결정을 따른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다시 운문사로 돌아와 강원 대교과정을 마무리했다. 중강을 맡아 강단에도 섰다. “즐거웠던 시절”이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명성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았다. ‘강사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던 은사스님의 소원을 마침내 이뤄드린 것이다. 일진 스님은 흥륜 스님(1943~2015)과 함께 명성 스님의 첫 전강제자가 되었다. 비구니 강백으로부터 전강 받은 첫 비구니 강사. 한국불교사에 드디어 비구니 전강 시대가 열렸다.

▲ 비구니 강백에게 전강 받은 첫 비구니 제자임을 알고 있었나.
“물론이다. 그전부터 비구니스님들이 비구스님들에게 동냥글공부 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비구 스님들 공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배워야했다고. 그렇게 운허, 탄허, 관응 노스님 같은 당대의 대강백들로부터 경을 배우셨다. 어렵게 배운 가르침을 물려주신 것이니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 20대의 일진 스님. 촬영 차 운문사에 왔던 일본인 사진작가의 카메라에 담겼다.

▲ 전강 후 대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안주하면 나에게도, 대중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출가 후 계속 운문사와 대중들 속에서만 생활했었다. 크게 고생을 한 적도 없었다. 마흔을 바라보던 나이에 택한 유학은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기도 했다. 처절하게 외로움도 느끼고 고생도 하며 스스로를 가늠해 보고 싶었다. 석사 과정을 대만서 공부했다. 하지만 대만서도 장학금을 받게 돼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대만에 도착해보니 나이만 ‘불혹(不惑)’이지 나 자신은 그야말로 ‘미혹(迷惑)’한 상태임을 알았다. 말부터 다시 배워야 했고 길도 몰랐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과정이 스스로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아마 대학 졸업 직후였던 20대에 유학을 왔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경험이다.”

▲유학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인가.
“유학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많이 보이게 됐다. 대만의 승가가 사회 전반으로부터 존경받는 이유는 철저한 지계와 수행의 결과였다. 사회적 환원의 노력도 일조했다. 그 첫 걸음이 철저한 채식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부터 존경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큰 울림이었다. 그에 비하면 일본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은 우리 생각보다 높지 않았다. 일본 여성학자들과 비구니 스님들을 만나보면 자존감이나 자부심도 그리 높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비구니들이 모여 함께 공부하고 전통을 이어가는 운문사가 세계여성불교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운문사야말로 세계인이 주목하는 도량으로서 책임감, 최후의 보루라는 자존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자율적으로 법과 계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도량이 없다.”

“명성 스님만큼만 되라”는 은사스님의 당부에 ‘당연히 강사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이 길을 의심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은사스님의 바람 때문만은 아니다. 행자 시절부터 ‘내가 강사라면…’이라는 생각을 했으니 말이다. 오랜 숙연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강사 되기 위해 이생에 온 것처럼 출가하고 싶었고, 대중이 좋았다. 상좌 가르치기가 숙원인 은사스님을 만났고 그런 은사스님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뜻을 따랐다. 명성 스님과의 인연은 또 어떤가. 마치 삼세의 모든 인드라망이 한 사람의 강사, 비구니 강맥 전승이라는 새 역사를 위해 준비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교단 내 강사의 위상이 높던 시절은 아니다.
“참선하는 사람을 최고로 쳤다. 그에 비하면 강사는 밑으로 봤다. 부처님 마음이 선이라면 마음을 표현한 것이 교인데 이를 둘로 보는 것은 부처님 뜻이 아니다. 그게 싫어서라도 학인들에게 자랑스러운 강사가 되고 싶었다. 강사가 행복하지 않으면 학인들도 행복할 수 없다. 그러려면 경의 가르침과 내 삶의 모습이 달라서는 안 된다. 그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나. 경이 곧 수행이고 그것이 곧 삶이 될 때 비로소 행복할 수 있다.”

▲선방 정진도 했다.
“1999년 소임이 없던 때라 선방에 방부를 들였다. 화두 드는 것이나 경을 보고 공부하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두가 잘 들렸다고는 감히 말 못하더라도 그 자리에 앉을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운문사에도 일이 산적해 있었다. 해제 후 바로 돌아왔는데 10년이 지나고서야 다시 방부들일 기회가 생겼다.”

▲교학과 참선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이 돼야 하는가.
“강의하는 사람은 늘 자세를 바르게 한다. 경상 앞에 앉을 때도 바르게 앉아야 한다. 그 마음가짐 또한 바르게 깨어있어야 한다. 선방에 앉는 것이나 경상 앞에 앉는 것이 다를 바가 없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하는 것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뤄진다면 경을 접하는 마음이 화두 드는 마음과 다를 바 없다.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다[形直影端. 형직영단]’고 했다.”

경상을 마주하면 태산 같이 무겁게 앉고 경을 펴면 바위처럼 단단히 뜻을 모은다. 발끝은 항상 단정히 모여 있고 걸음을 옮길 때 두리번거리는 법도 없다. 그림자조차 흐트러짐 없는, 그 속에서 더 없이 행복한 스승. 학인들은 그 모습에서 수행자의 삶, 출가의 길을 배운다.

▲스스로 보는 자신은 어떤 강사인가.
“교과서적인 강사라고 할까. 평생 대중과 같이 살았지만 지금도 지대방문화를 잘 모른다. 운문사에 발 들인 후 줄곧 명성 스님을 시봉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대부분 시간을 명성 스님과 보내다보니 막상 학인이나 도반들과는 아기자기하게 시간 보낼 기회가 없었다. 특히 도반들과 가깝게 교류할 기회가 없었던 점은 지금도 미안하고 아쉽다.”

▲ 후학으로서 1세대 비구니강백의 역할과 의미를 돌아본다면.
“비구스님들에게 경을 배워야 했던 비구니강백 1세대의 어려움은 비구, 비구니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분들은 교육 체계, 장소, 지원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을 개척했다.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 교단정화, 한국전쟁 등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안팎으로 흔들림 없이 걸어왔다. 그 분들이 비구니교육의 체계를 세웠다. 그 터전 위에서 비구니가 탄생하고 성장해 교단의 한 축이 되었다. 교육의 중심이 되어 헌신한 비구니강백들이 없었다면 지금 비구니스님들의 위상은 어떨까. 그분들의 뜻과 노력을 잘 이어가고 있는지 살피게 된다. 지금도 강의 시간에 학인들에게 ‘이건 전달 교육이다’라는 서언을 붙여 명성 스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런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함이다.”

▲ 강사 되길 희망하는 스님들에게 당부할 말은.
“강사 또한 수행자다. 수행자의 길을 가는데 역할을 하나 더 담당하는 것뿐이다.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소신과 자부심을 갖고 스스로 행복한 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 강사든, 포교사든, 선수행이든 다를 바 없다. 또한 끝까지 잘 갈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강사가 지녀야할 자질은 무엇인가.
“자질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돌아보자면 학인들에게 어떤 강사로 비춰질까 궁금하다. 어떤 후배 강사가 나를 학인들에게 소개하면서 ‘인욕을 잘하는 스님’이라고 하기에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비교해봤다. 또 한 번은 ‘법문을 잘한다’고 해서 또 생각해 본적도 있다. ‘언행이 일치된다’고 하면 내 언행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말하고 가르치는 것이 내 행동, 일상과 달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일탈’의 사전 의미 ‘정해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이다. 그러니 출가 수행자의 길에서 벗어난 적 없는 일진 스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부처님 가르침도, 계율도, 운문사도 떠나본 적 없으니 일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과 수행자의 길이 오롯이 삶의 전부가 된 이에게 처음부터 발목을 붙잡는 경계, 멈춰서야할 벽이 없었음이 아닐까. 그에게 일탈은 단지 새로운 도전의 다른 표현이었다. 부처님 가르침에 더 깊이 다가가기 위해, 무사한 일상에 안주하지 않기 위해 산문을 넘어 세상으로 향했다. 비구니 향한 부당한 차별에 고개 숙이지 않고 당당한 목소리로 세상에 파장을 울렸고 이제 그것을 증명해보이고 있다. 2014년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승만경’을 풀이한 책 ‘승만경을 읽는 즐거운’을 펴낸 일진 스님은 모든 중생이 똑같이 품고 있는 여래의 씨앗에는 결초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별이 없음을 펼쳐보였다. 이 또한 여성불교의 새로운 역사가 되고 있다.

‘마음에 담고 있는 경구나 좌우명을 알려달라’는 부탁에 일진 스님이 내보인 단어 ‘신심(新心)’이다. 항상 새로운 마음. “수행자는 늘 새롭게 피는 꽃이어야 하고,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처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일진 스님은 오늘도 삭발수계하던 그날처럼 웃는다. 너무 웃는 바람에 노스님으로부터 눈총 받았다는 그날의 그 작은 일탈처럼, 스님은 오늘 또 일탈을 꿈꾼다. 여성, 그 충만한 성불의 씨앗이 활짝 꽃피길 바라는 스님은 오늘도 자유롭고 반듯한 걸음을 옮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출가의 기쁨 평생 간직한 듯…반듯하고 맑은 스님”

내가 본 일진 스님

□ 홍사성 ‘불교평론’ 주간=교단의 전통과 아름다운 풍습을 지켜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불평등, 특히 여성수행자에 대한 왜곡된 인습을 바꾸고 개선시키는 일에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동국대 재학 시절 ‘석림’지에 기고한 ‘불교에 있어서 여성은 열등한가’라는 글은 40여년 전인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정도가 아니라 불온한 생각이었다. 제목부터가 그랬다. 이런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데 있어 두려워하고나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점진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역사의 진보, 문화의 향상 같은 것들은 무엇 하나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여성불교, 비구니위상 역시 마찬가지다. 그때의 이런 노력들이 이어지며 쌓여가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늘 따뜻하고 맑은 향기를 지닌 그런 비구니스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세속의 사람에게는 큰 위안이 된다.

□ 박원자 작가=마치 태어날 때부터 스님이었던 것 같다. 겉모습도 아름답지만 승복을 입었을 때 세상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다. ‘나의 행자 시절’ 취재 과정에서 처음 만났는데 인터뷰를 하면서도 출가의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때 만난 그 모습이 몇 십 년 지나도 그대로다. 출가 당시의 기쁨을 온전히 느꼈고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그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 같다. 올해가 조계종 교육원이 선언한 ‘출가의 해’라는데 일진 스님을 모델로 삼으면, 출가에 대한 자긍심을 알리고 출가자를 늘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님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는 그 인간적인 면모가 흐트러짐 없는 반듯함과 어울려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 운문사승가대학 4학년 현공 스님=대장부다. 여리고 단아해 보이지만 말과 행동은 누구 못지않게 힘이 있다. 부드러운 말 속에 힘이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학장스님이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칭찬할 것은 칭찬해준다.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도 부지런하다. 그러면서도 항상 어른을 모신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렇게 해라’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배웠다’라는 표현 속에는 어른스님들의 전달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무감이 배어난다. 그것은 일부러 겸손하기 위함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말씀이기에 그 속에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가 깔려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투자 역시 아낌이 없다. 운력할 때 쓰는 토시 하나부터 모든 것을 학인들에게 똑같이 공양하고 누구 하나 치우침 없이 공평하게 대한다. 학인들의 생활을 깨알같이 이해하고 관심 갖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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