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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탁실라 ③ - 탁실라의 승가람

눈으로 원형 확인한 절 같은 절, 탑 같은 탑과의 첫 만남

 
▲ 모라 모라두 승원(사진 맨위)과 승원의 한 쪽 측면에 안치된 불상. 불상은 거의 다 목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아마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된 불두는 이를 수집했을 것이다.

카슈미르 간다라 답사여행을 시작한 이래 절(승원) 같은 절, 탑(스투파) 같은 탑을 처음 본 것은 탁실라에서였다. 스리나가르 인근 파리하스포라나 하르완, 바라물라에도 불교승원과 스투파의 유적이 있었지만, 그곳이 절이고 탑이라 하니 그런 줄 알았지 불교건축 문외한의 눈으로 거기서 절과 탑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단만이 남은 파리하스포라의 스투파는 비록 크기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아반티포라 힌두사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거기서는 불적임을 바로 알 수 있는 불상이나 보살상과 같은 존상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골짜기에 자리한 모라 모라두
석축의 돔형 봉분을 얹은 대탑
모래·점토 등 개어 만든 불보살
기도실·명상실 팻말 붙은 방과
보살을 모신 감실도 확인 가능

모라 모라두서 1㎞ 거리 자울리안
산 정상부 있어 탁실라 산야 조망
중앙 큰 탑과 21기 작은 탑 빽빽

탁실라 승원은 쿠샨시대 전성기
5세기 백계 흉노 에프탈리트가
내려오면서 쇠락의 길 걷게 돼

탁실라 박물관 인근의 대표적 불교유적은 모라 모라두와 자울리안의 승가람과 다르마라지카 대탑이다. 이 밖에 그리스풍의 조로아스터 사원이었다는 잔디알과 샤카 파흐라바 시대의 도시였던 시르캅 등이 하루코스의 일정으로 추천되었다. 모두 1912∼34년에 걸쳐 당시 인도총독부의 고고학 국장이던 존 마샬에 의해 발굴된 것이라고 한다.

모라 모라두 승원은 박물관에서 북동쪽으로 5㎞ 지점의 산자락 초입, 다소 협소해 보이는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 쪽에 말끔하게 쌓아올린 사각형 석축기단 위에 약간 허물어지기는 하였지만 역시 석축의 돔형(覆鉢形) 봉분을 얹은 대탑(主塔)이 있었고, 그 뒤로 작은 탑(봉헌탑)이 있었는데, 모래 점토 등을 개어 만든(이를 ‘스투코’라 한다) 불상과 보살상, 원반형의 산개(傘蓋: 일산)가 두드러진 소형 불탑 등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왼편 위쪽에 승원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기에도 역시 불상을 모신 감실이 있었고 별도의 방(일종의 법당)도 있었다. 골짜기 초입에서 맞닥뜨린 10m 높이의 석축 스투파는 주변의 분위기를 압도하였지만 승원에 올라서자 탑 너머 저 멀리 탁실라의 평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 모라 모라두 승원 초입에 우뚝 솟은 스투파. 이 탑 뒤로 원반형의 산개(일산)가 두드러진 소형 불탑이 봉안되어 있었다.

▲ 탁실라 박물관에 전시된 이와 동일한 크기의 탑.

우리가 대개 승원이라 할 때 그것은 승가람 혹은 승가라마(saṃghārāma: 줄여서 ‘가람’) 즉 승가의 원림(園林, ārāma)에 지어진 주거용 건축물(vihāra: 精舍, 僧房)을 말하며, 여기에 스투파(기념묘소)나 이를 실내로 들여온 차이트야(caitya, 廟堂 즉 법당)가 부속되었다. 두 건축물은 원래 별개로 존재하였지만 어느 시기 합쳐졌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애당초 주거공간인 승방(요사)과 예배공간인 대웅전이나 탑전은 별개로 존재하였다. “법에 의지하라”는 불타유훈이 강조될 경우 출가수행자들에게 있어 불신(佛身)의 숭배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는 초기시대 불상을 만들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였다.(불상이 출현한 것은 기원후 1세기 무렵부터이다.) 승원에서 중요한 곳은 법에 대해 토론하는 강당이었다.

탁실라뿐만 아니라 간다라의 승원은 대개 개인 승방, 객실, 강당, 부엌, 욕실, 우물, 창고 등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 승방은 큰 홀에 사방 벽을 따라 대략 한 평 크기로 설치되었다. (마가다의 나란다 승원에는 필자 키 정도에 어울리는 돌침대도 설치되어 있었지만 탁실라에서는 이를 보지 못하였다.) 방에는 등잔용인지 불상 안치용인지 작은 감(龕)이 파져 있었다. 당시 출가비구들은 한 평 남짓 이 좁은 방에서 무엇을 했을까? ‘기도실’이나 ‘명상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도 있었다. 그래, 기도나 명상(참선)을 하였을 것이다. 더러는 경전을 읽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 부처님께 국태민안을 기원하였을까? 탁실라 박물관에서 만난 보살상은 다만 미륵보살과 관음보살뿐이었는데, 이들도 출가자의 의지처였을까? 명상을 하였다면 어떤 명상을 어떻게 하였을까? 4정려와 4무색정을 닦았을까? 혹 아니면 자(慈)·비(悲)·희(喜)·사(捨)의 4무량정이나 무념무상, 일체의 심리현상을 소멸시킨 무상정 혹은 멸진정을 닦았을까? 혹은 낮에 들었던 법문이나 토론하였던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專精思惟)한 것일까?

또한 경전을 읽었다면 어떤 경전을 읽었을까? 모라 모라두는 2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번성한 승원으로, 5세기 초 탁실라를 방문한 법현은 간다라에서는 대다수 소승을 배우고 있다 하였고, 7세기 후반 인도를 여행한 의정(義淨)은 북방은 오로지 설일체유부 뿐이라고 하였으며, 8세기 중엽 이곳 간다라에서 출가하고 카슈미르에서 구족계를 받은 오공(悟空)은 북천축국에서는 어디서나 다 살바다(薩婆多) 즉 설일체유부를 배웠다고 하였으니, 유부 전승의 경론을 읽었을까? 그런데 현장에 의하면 모라 모라두의 승원이 번성하던 무렵, 이곳 탁실라에서는 쿠마라라타(AD. 3C.)가 ‘유만론’(‘대장엄경론’) 등 다수의 논서를, 인근 페샤와르에서는 세친(AD. 4~5C.)이 ‘구사론’을 저술하였다. 그들도 이를 읽었을까?

쿠마라라타나 세친 역시 이 같은 한 평 남짓의 좁은 방에서 ‘유만론’과 ‘구사론’을 저술하였을까? ‘구사론’에는 4아함이나 ‘품류족론’ 내지 ‘발지론’ 등의 근본아비달마는 물론이고 상캬학파나 바이세시카 등 외도의 견해, 상좌 슈리라타의 견해를 비롯한 수많은 이설이 인용되는데, 다만 암기력에 의존하여 저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큰 규모의 승원에는 당연히 도서관이 있었을 것인데, (라싸의 포탈라궁에서 경전 보따리를 쌓아둔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간 적이 있는데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장서는 어떠한 것을 어떤 경로를 통해 구비하였을까? (예컨대 현장은 귀로에 탁샤쉬라에서 인더스 강을 건너다 다수의 경전을 잃어버려 오장나국(Uddyana)으로 사람을 보내 음광부의 삼장을 베껴오게 하였는데, 그곳은 필시 어떤 불교승원의 서고였을 것이다.)

불교학의 고향이라는 간다라 중심도시 탁실라의 불교승원에 왔지만, 떠오르는 상념에 응답할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모라 모라두 승원은 당시의 탁샤쉬라였던 시르숙에서 1.5㎞, 가이드북에는 탁발하기 알맞은 거리라고 하였는데, 어째서 승원마다 맷돌이 놓여있는 것일까? 그들이 직접 곡식을 탈곡 제분하여 취사하였던가?

모라 모라두 승원에서 큰 길로 나와 다시 북동쪽으로 1㎞ 좀 더 들어가 있는 자울리안 승원을 찾았다. 이 절은 모라 모라두와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탁실라의 산야가 조망되었다. 현재 발굴된 형태는, 중앙에 큰 탑과 21기의 작은 탑들이 빽빽이 들어선 상하 두 단의 탑원(塔院)이 있었고, 왼편으로 승방, 강당, 부엌, 창고 등을 갖춘 승원이 위치하였다. 구조나 주 탑의 재료(스투코)만 다를 뿐 모라 모라두 승원과 거의 동일하였다. 그런데 탁실라 박물관에서 발행한 안내 팸플릿에는 여기에 대학이 있었다고 한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방의 개수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일까? 보다 산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일까? 모라 모라두의 승방은 27실, 이곳의 승방은 28실, 2층이기 때문에 56실, 5세기 백계 훈족에 의해 불탔다지만 그 때도 현재의 구조였다면 그 정도의 출가승이 거주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데. 불교대학이라면 무엇이 강의되었을까? 나란다처럼 여기서도 역시 5명(明)-의방명(의학), 공교명(기술학), 인명(논리학), 성명(음운학), 그리고 내명(불교학)-이 학습되었을까? 내명 즉 내전은 설일체유부의 경론이었을까?

그런데 자울리안과 모라 모라두의 승려들은 서로 왕래하였을까? 두 절 중간에 좀 더 작은 규모의 핍팔라 승원이 있는데, 그들은 포살을 함께 행하였을까? 의정에 의하면 당시의 여러 부파(대표적으로 대중부·상좌부·설일체유부·정량부)는 삼장(三藏)뿐만 아니라 옷 입는 법, 밥을 받는 법 등의 율의도 달랐다. 만약 승원이 단지 예배만을 위한 주거공간이었다면 서로 다른 부파의 공존도 가능하였겠지만, 경전의 학습과 토론, 명상 등이 주요 일과였다면 주의 주장을 달리하는 부파의 공주(共住)는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근의 또 다른 탑사(塔寺)인 다르마라지카와의 관계는 어떠하였을까? 그곳은 분명 차이트야에서 출발한 승가람이기 때문에 비하라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지 않았을까? 다르마라자(dharma raja), 정법의 왕인 불타 혹은 정법수호의 왕인 아쇼카에서 그 명칭이 비롯되었을 다르마라지카 대탑은 박물관에서 동쪽으로 3㎞ 떨어진 언덕위에 위치한다. 간다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높이 15m, 직경 50m. 다른 승원의 탑과는 달리 원형 기단위에 세워져 있었고, 비록 허물어졌지만 탑돌이를 위한 통로(繞道)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 자울리안 승원 초입의 봉헌탑.

간다라에서 원형 기단은 불탑의 초기형식이라고 한다. 다르마라지카 대탑은 아쇼카 왕이 건립할 당시는 이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지만 여러 차례에 걸쳐 개조 확장된 것이다. 해서 이 또한 대탑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작은 봉헌탑과 예배당이 들어섰고, 북쪽으로 크고 작은 승방이 들어섰다. 풀이 덮인 유구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존 마샬에 의하면 한 층에 52개의 방이 있는 2층 구조의 대형 승방도 있었다.

탁실라의 불교승원은 쿠샨시대 전성기를 누리다 5세기 중앙아시아에서 백계 흉노인 에프탈리트가 내려오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장이 방문한 7세기 중엽 당시 탁실라에는 승가람은 많았지만 이미 황폐해졌고 승도 수 역시 적어졌을 뿐더러 어쩐 일인지 의정 등의 전언과 달리 모두 대승을 학습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 때 ‘대승’은 어떤 형태였을까? 대저 대승교도가 머무는 절과 소승교도가 머무는 절에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거기서의 일상의 차이는 또한 어떠하였을까? 의정은 대중부·상좌부·설일체유부·정량부로서 “보살께 예배하고 대승경을 읽으면 대승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승”이라 하였다. 대승과 소승이 함께 할지라도 5편으로 구성된 율장은 다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 같이 사제(四諦)를 닦았다고 한다. 그런데 설일체유부가 대승경을 읽었다면 어떤 경을 읽었을까? 이래저래 혼란스럽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물론 문외한의 눈에 비친 것이기는 하지만 모라 모라두와 자울리안, 다르마라지카, 혹은 마르단의 탁티바히 승원과 거기서 발굴된 불상이나 불타전기가 새겨진 부조물 등이 거의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는 곧 당시 승원을 조성하고 거기에 살았던 이들은 교리에 관계없이, 어떤 이념을 갖고 어떤 주장을 하던 모두 동일한 불타를 신봉하고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는 동일한 불교도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멈추어라, 멈추어라. 비구는 서로 싸우고 꾸짖고 비방해서도, 장단(長短)의 시비(是非)를 추구해서도 안 된다. 그대들은 모두 동일한 스승에게서 배운 이로서 물과 젖처럼 함께 화합하라.” 이는 교리적 다툼이나 승가분열에 관한 법문에서 항상 언급되는 관용구이다.

▲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의 전경.

▲ 탑돌이를 위해 설치된 요도.

의정은 그의 인도여행기(‘남해기귀전’)에서, 불타가 한필의 모직천이 18조각으로 째지고 한 자루의 금지팡이가 18조각으로 부서지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는 빔비사라 왕에게 행한 법문으로써 삼장의 전승을 달리하는 부파분열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불식하고 있다. “내가 열반에 든 후 백년 정도 지나면 아쇼카 왕이 출현하여 그 위엄이 남섬부주를 덮을 것인데, 그 때 비구들의 교리가 18가지로 분열할 것이지만 해탈문으로 나간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 꿈은 앞날의 조짐일 뿐이니, 너무 염려하지 말라.”

불교 공동체의 원동력은 어쩌면 교리가 아니라 불타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유식론’에서는 무아 설에 따르고, 열반을 추구하며, 불법승 삼보를 찬탄하고, 5온 등의 법을 표방하면 불설이라 하였다. 이 말은 곧 특수한 주의 주장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린다. ‘대비바사론’에서 이곳 간다라의 논사들은 율의(5戒)의 결감에 관계없이 삼귀의만으로 불교도(近事)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ohmin@.gnu.kr
 

[1347호 / 2016년 6월 1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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