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2. 불상의 크기 기록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

기자명 주수완

불상 크기 정확히 재가며 조성한 프로세스 존재했을까?

▲ 경주 구황동 폐사지(황복사지) 삼층석탑 출토 순금제 불입상. 높이 14.4㎝.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박물관에 가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불상을 수없이 접할 수 있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극히 작은 불상으로부터 수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에 이르기까지 불상은 실로 매우 다양한 크기로 만들어졌다. 이 상들의 크기는 만들어질 당시에 어떻게 정해졌을까? 물론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경우라면 예술가 마음이겠고, 주문생산인 경우라면 주문자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크게도, 혹은 작게도 만들어졌을 것이다.

황복사지 탑서 발견한 불상 중
입상은 14.4㎝, 좌상은 12.2㎝
전통적 단위 척 30㎝-치 3㎝를
기준할 때 발원문의 6치와 달라
주나라 1척 20㎝~1치 2㎝ 근접
이 수치 근거로 통일신라 불상이
주나라 척 사용했을 가능성 제기

장육상은 1장6척을 이르는 말로
부처님 키 16척이라는데서 유래
기록은 시대 통념 따랐을 것 추정

그러나 종교미술이라는 상황에서는 상을 봉안하는 특정 조건에 따라 그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경우도 많았다. 주문자, 혹은 발원자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불상을 봉안할 건물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그 건물의 크기에 맞춰 불상을 제작할 수밖에 없고, 만약 탑 안에 봉안하고자 한다면 그 탑의 사리공 크기에 맞는 불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비록 현재는 제자리를 떠난 불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크기의 성격에 따라 이러한 불상들이 원래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 경주 구황동 폐사지 삼층석탑 출토 순금제 불좌상. 높이 12.2㎝.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예를 들어 경주 구황동 폐사지, 혹은 황복사지로 불리는 절터의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불상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40년대에 탑을 해체 수리할 때 2층 탑신 사리공에서 순금으로 만든 입상과 좌상, 두 구의 불상이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불입상이 692년, 불좌상은 706년에 각각 석탑에 납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제 사리함 뚜껑에는 706년 당시 사리를 납입하면서 작성한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에 의하면 706년에 사리와 함께 6치(寸) 크기의 아미타불상을 봉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불좌상을 지칭하는 문구로 보이는데, 문제는 불좌상의 실제 크기와 이 6치라는 크기가 잘 들어맞지 않는데서 시작한다.

동양에서 전통적으로 길이를 재는 단위인 척(尺)은 현재는 30.30303㎝, 약 30.3㎝로 환산되고 있다. 이는 당나라에서 사용하던 1척, 즉 당척(唐尺)의 길이와 대략 비슷한데, 당척은 29.8㎝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복사탑에서 발견된 불상들이 만들어졌던 통일신라시대에는 당척을 널리 사용했으므로, 만약 1척을 30㎝ 정도로 계산하면 명문 속의 6치는 18㎝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좌상은 높이가 12.2㎝여서 그에 비해 너무 작다. 이보다 조금 큰 불입상도 14.4㎝ 밖에 되지 않아 18㎝에는 크게 못 미친다. 때문에 발견 초기 일본인 학자들은 이 두 불상은 사리함 명문에서 언급한 불상과는 전혀 다른, 새롭게 납입된 불상으로 보기도 했다.

▲ 구황동 폐사지 삼층석탑에 6치(寸) 크기의 아미타불상을 봉안했음을 밝히고 있는 사리함 뚜껑의 명문. 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1척은 다양한 크기로 규정되어 있었다. 주나라의 1척은 20㎝ 내외였으며, 한나라의 1척은 22㎝ 가량, 남북조시대 남조의 1척은 24.4㎝ 정도였다. 반면 남북조시대 북방민족들의 1척은 대략 30~35㎝ 내외로 한족들의 1척보다 컸다. 특히 동위에서 사용한 척은 35~36㎝ 내외로 가장 컸는데, 고구려도 이와 똑같은 척을 사용했고, 이는 일본에서 고려척(高麗尺)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사리함 명문의 ‘6치’를 당척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른 척으로 환산해 보면 결과는 달라진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12.2㎝를 6으로 나누면 ‘1치=2.1㎝’이므로, 결국 ‘1척=21㎝’의 척도가 얻어진다. 이를 주척으로 보고, 결국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척도는 주척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왜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하필이면 까마득하게 오래 전의 주척을 사용하였을까? 이는 공자 이래 주나라가 동양의 이상국가로 자리매김하면서 주나라의 법식은 여러 곳에서 모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궁정음악에 사용되는 악기를 제작하는데 있어서는 주척을 사용하였다. 불상제작, 즉 부처의 몸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오래된 전통을 지닌 주척을 이용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미륵대불. 명문에 의하면 3장(丈)의 크기로 조성된 것이다. 신라시대.

이와 유사한 사례로 단석산 신선사의 마애불을 들 수 있다. 신선사 바위에 새겨진 명문에는 높이 3장의 미륵대불을 조성했다고 되어 있는데, 한 연구에 의하면 신선사 마애불 중 가장 큰 마애대불의 높이가 6.72m이므로, 이를 30으로 나눈 뒤 1척을 환산하면 결국 22.4㎝가 되어, 남조척에 포함되는 한나라 척을 사용했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황복사탑의 순금불상처럼 이 역시 남조 계통의 척도를 사용한 것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현재 단석산 신선사 마애대불의 공식적인 높이는 8.2m로 되어 있어서 여기서 1척을 환산하면 결국 27.3㎝가 된다. 이는 남조척이나 북조척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다소 애매한 수치이기도 하다. 여하간 측량상의 오차는 있었지만, 불상의 크기와 기록상의 높이를 비교해서 불상제작에 들어간 척도의 크기를 규명하는 이러한 접근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시도였다.

그렇다고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에 걸친 불상제작에는 남조 계통의 척도만 쓰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본 아스카데라의 소위 아스카대불은 장육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장육, 즉 1장6척이란 석가모니의 키가 16척이었다는데서 유래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8척 정도로 보았는데, 석가모니의 키가 평균의 두 배였다는 것에서 16척이 산출된 것이다. 1척이 남조척에 의거해서 20㎝ 내외일 때에는 8척이 160~170㎝ 정도여서 1장6척은 320~340㎝ 정도 되겠지만, 1척이 30㎝ 내외로 확대되면서 석가모니의 키도 갑자기 480㎝까지 커져버린 셈이다.

여하간 장육상을 좌상으로 만들 경우는 입상의 절반 높이로 한다는 것이 통념이므로, 아스카 대불은 결국 8척 높이로 설계되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아스카 대불의 높이는 275㎝나 된다. 이를 8로 나눠보면 결국 아스카 대불에 사용된 척도는 34㎝를 조금 넘게 되는데, 이는 매우 큰 척도임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 척이 사용된 증거로 볼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일단은 불상을 제작하는데 다양한 척도가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고, 나아가 설계에 있어 어떤 척도를 적용하는가의 문제가 어떤 사회·문화·정치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가의 문제까지 연결될 수 있음을 밝혀야할 필요가 있겠다.

또한 여기서 더 나아가 기존의 연구를 몇 가지 측면에서 다시 검토해볼 필요도 있다. 우선 황복사탑에서 발견된 두 불상의 크기는 광배까지 포함된 크기이다. 옛날 사람들이 불상의 크기를 이야기할 때 언급했던 치수는 불상만의 크기였을까, 아니면 당연히 광배를 포함한 크기였을까? 흔히 ‘장육상’이라는 명칭은 부처의 키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광배와 대좌를 제외한 크기이다. 만약 황복사탑 사리기의 명문도 광배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불상의 크기만 ‘6치’라면, 장육상을 좌상으로 만들어도 장육상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섰을 때의 불상만의 높이가 6치 크기였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 일본 아스카데라의 대불. 장육상으로 조성되었는데, 좌상이어서 절반인 8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높이 275㎝. 605년경.

더불어 다음과 같은 문제점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명문을 썼던 사람은 봉납될 불상이 6치 크기였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이 불상이 이미 만들어진 것이어서 분명히 이 불상이 들어갈 것을 알고 그것의 크기를 재어 6치라고 했을까? 아니면 마스터플랜에서 6치 크기의 불상을 봉납할 것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6치라고 했을까? 그런 경우 불상을 만드는 사람이 실제로는 6치로 제작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 불상에서 6치의 정확한 척도를 연구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나아가 보다 근원적으로 이런 의문도 제기해볼 수 있다. 장육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불상들이 전부 똑같은 크기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장육’은 다만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것처럼, 당시 불상의 크기에는 몇 가지 규격화된 통념이 있다. 예를 들어 손가락만한 크기, 손바닥만한 크기의 불상이 있으며, 팔뚝만한 크기, 일반적인 사람 크기인 등신상, 등신상의 절반 크기, 장육상 등등 몇 단계의 규격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치 ‘세치 혀’라고 할 때 사람들의 혀가 전부 세치가 아닌 것처럼, 그것은 통념화된 느슨한 형태의 규격이었을 수도 있다. 6치면 아마도 손바닥 정도 크기의 불상을 지칭하는 통념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정말로 이러한 사리장엄구 봉안에 있어 어떤 사람이 납입될 불상의 정확한 크기로서 5치나 7치가 아니라 6치여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문장을 쓰는 사람에게 이 규격을 알려주고, 불상 제작자도 그에 맞춰 6치를 정확히 재어가며 불상을 만드는 유기적 프로세스가 존재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또한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미술사의 연구 영역이 작업의 결과물인 작품 뿐 아니라 제작의 공정에까지 확대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48호 / 2016년 6월 2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 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