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풍화 견뎌온 승탑에서 옛 선지식 가르침을 듣다
세월의 풍화 견뎌온 승탑에서 옛 선지식 가르침을 듣다
  • 심정섭 전문위원
  • 승인 2016.07.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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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삼국유사 순례 현장-굴산사지·진전사지·낙산사

▲ 도의선사가 선법을 펼쳤던 진전사지를 찾은 순례단은 ‘도의선사탑’ 앞에서 선사의 가르침을 새기고 승탑의 면면을 살폈다.

범일(梵日) 스님이 당나라 명주 개국사에 이르자 왼쪽 귀가 없는 한 사미가 “저도 신라 사람입니다. 제 집은 명주의 경내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으니 조사께서 후일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제 집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간곡히 청했다. 이후 귀국해 굴산사를 세우고 가르침을 전하던 어느 날 꿈에 그 사미가 나타나 “약속한 것을 실천하라”고 재촉하자, 범일 스님은 전에 사미가 일렀던 곳으로 찾아가 낙산 아랫마을에서 덕기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아이가 함께 놀았다는 금빛 나는 친구를 찾고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왼쪽 귀가 없었던 사미와 꼭 닮은 돌부처였다. 이 돌부처가 바로 정취보살(해탈의 길로 빨리 들어서는 길을 일러주는 보살)이다. ‘삼국유사’는 범일 스님이 낙산에 불전 세 칸을 지어 이 정취보살을 모신 것으로 전하고 있다.

범일 스님 창건 굴산사지 모습
2002년 태풍 ‘루사’로 드러나
국내 최대 규모 당간지주 남아

조계종조 도의선사 40년 수행
신라 가지산문 본찰 진전사지
아름다운 승탑·삼층석탑 보존

낙산사는 의상 창건하고 범일이
세 칸 절 지어 정취보살 모신 곳
홍련암서 두 손 모아 서원 세워


범일 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해 굴산사를 지은 곳은 기록상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였으나, 조선 초 이후 문헌에서 사라져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범일 스님이 정취보살상을 만난 일이 한편의 소설 같았듯, 2002년 태풍 ‘루사’로 인한 수해 때 거짓말처럼 굴산사 터가 드러났다. 덕분에 신라 구선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 중심 사찰의 규모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 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의 중심사찰이었던 굴산사지에 남은 당간지주는 국내 최대 규모다.

2016년 6월25일. 법보신문 삼국유사 순례단이 굴산사지를 찾았다. 먼저 순례단을 맞이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당간지주(보물 제86호)는 굴산사 규모가 평범하지 않았음을 단박에 알게 했다. 그러나 최대 규모의 당간지주를 만난 기쁨도 잠시 뿐, 당간지주 주변에서 진행되는 농지 배수로 공사로 인해 둥글고 긴 쇠파이프가 어지러이 널려 있고, 당간지주 아래는 인부들이 사용하는 물건들로 어수선했다. 또 인근에 있는 석불좌상(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8호)은 안내문이 바닥에 널부러져 있어 스님들이 상주하지 않는 문화재 구역의 관리 수준이 어떠한지를 짐작하게 했다.

▲ 진전사지 삼층석탑을 찾은 순례단.

그럼에도 순례단원들의 마음에 환희심을 심어준 것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추정되는 굴산사지 승탑(보물 제85호)이었다. 굴산사터 위쪽에 자리한 승탑은 사리를 모시는 몸돌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받침부분이 놓이고, 위로는 지붕돌과 꼭대기장식이 놓였다. 문무왕(동국대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박사가 승탑에 조각해 놓은 장식과 무늬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동안 순례단원들은 승탑의 아름다움에 빠져들 수 있었다.

사굴산문 중심사찰 터에서 옛 선사의 가르침과 흔적을 엿 본 순례단은 걸음을 옮겨 조계종 종조 도의선사가 법을 펼쳤던 진전사지를 찾았다.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스님이 열네 살에 출가한 도량으로 알려진 진전사에서 수행하고 법을 펼친 도의선사는 ‘중국에 달마가 있다면 신라에는 도의가 있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 받는 인물이다. 그 법맥이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로 이어져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됐고, 오늘날 선종을 표방하는 조계종의 종조가 되었다.

▲ 순례단원들은 저마다 탑을 향해 손 모으고 간절하게 원을 세웠다.

진전사 역시 언제 폐사됐는지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절이 없어질 때 스님들이 절터 위 연못에 범종과 불상을 던져 수장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신라에 선법을 펼쳐 선종이 태동할 수 있는 초석을 다졌던 도의선사의 가르침을 품은 진전사지에서 순례단의 발길이 먼저 머문 곳은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22호)이다. 양쪽으로 작은 벚나무들이 자리잡은 계단을 올라서자 통일신라의 대표적 석탑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아래층 기단에는 곧 날아갈 듯한 천인상(天人像)이, 위층 기단에는 구름위에 앉아 무기를 든 8부신중이 새겨져 있다. 순례단원들은 “불국사 석가탑에 비견될 만큼 균형 감각이 빼어나고, 영동지방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탑”이라는 문 박사 설명이 이어지자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저마다 손을 모아 옛 사람의 가르침을 기리고, 원을 세웠다.

삼층석탑에서 산길을 따라 1㎞ 이상 오르자 40년 넘게 이곳에서 수행하다 입적한 도의선사의 묘탑인 도의선사탑(보물 제439호)이 모습을 보였다. 문 박사는 “절터 주변에서 진전(陳田)이라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진전사터임이 확실해졌고, 도의선사의 행적을 돌아볼 때 이 탑은 선사의 승탑이 확실시 된다”며 일반적 탑과 달리 8각형의 탑신을 한 승탑의 면면을 설명했다. 이어 문 박사의 손길을 따라 승탑을 등지고 눈을 든 순간,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산 높고 곡 깊은 호젓한 곳에 자리한 승탑 앞에서 천년의 적막을 온 몸으로 느낄 만큼 빼어난 풍경을 만난 것이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텅빈 충만감이 바로 이런 것일까!

굴산사지에 이어 가지산문의 중심 진전사지에서 우리나라 선종의 역사를 살피고 옛 선사들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들은 순례단이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범일 스님이 절 세 칸을 지어 정취보살을 모셨던 낙산사다. 의상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도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어 ‘꿈이 이루어지는 도량’ 낙산사는 수많은 참배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어우러져 사람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 의상 스님이 수행했던 곳으로 전해지는 낙산사 의상대에서 홍련암을 바라보며 관음보살의 가르침을 새겼다.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62호)을 참배하고, 원통보전 앞 7층석탑(보물 제499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조선 세조 13년에 현재의 7층으로 조성했다. 따라서 고려시대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에서 흥망성쇠의 질곡을 지나온 불교의 명암도 읽을 수 있었다.

의상 스님이 기도 끝에 붉은 연꽃 위에 나타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자리에 지었다는 홍련암에서 간절한 소원 담아 두 손을 모은 순례단원들은 의상대에서 오늘의 순례가 가능하게 한 옛 선지식들에게 감사하며 산문을 나섰다. 들판 한 가운데 높이 선 당간지주와 오랜 세월의 풍화를 견뎌온 돌탑과 승탑이 서 있는 폐사지에서 고즈넉한 정취를 느낀 순례단원들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뜻을 이어 이 세상에 회향할 것을 다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정섭 전문위원 sjs88@beopbo.com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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