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십대제자상의 원류는?
13. 십대제자상의 원류는?
  • 주수완
  • 승인 2016.07.05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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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십대제자상이 한국 최초… 미술사적 위상도 중요

▲ 경주 석굴암 본실의 십대제자상 중 향우측 제자상.

▲ 경주 석굴암 본실의 십대제자상 중 향좌측 제자상.

십대제자(十代弟子)란 흔히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열 명을 지칭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로는 16나한, 또는 18나한도 유명한데, 석가모니의 아들이었던 라훌라만 공통으로 들어가고, 그 외에는 겹치지 않는다. 나한은 아라한의 준말인데, 십대제자는 모두 아라한과를 얻었으므로, 제자나 나한이나 사실상 유사한 의미로 통용된다.

십대제자 근거가 되는 경전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유마경’

석굴암 조성된 십대제자 각각을
경전 언급된 제자와 연결할 때
열 명의 배열이 보기 따라 달라

순서를 생각하는 개념에 있어서
현대와 당시 사람들의 차이 때문


십대제자와 16나한의 근거가 되는 경전은 서로 다르다. 십대제자의 근거가 되는 경전으로는 ‘유마경(維摩經)’이 가장 유명하고, 16나한의 근거는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를 꼽는다. ‘유마경’은 당나라 때 삼장법사 현장(玄, 602?~664)이 번역한 것이 일반적으로 읽히고 있는데, 인도의 나가르주나, 즉 용수(龍樹)가 ‘대지도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인도에서도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고, 현장법사의 번역 이전에 중국에서도 이미 삼국시대 오나라의 지겸(支謙) 번역본, 5호16국시대 구마라집(鳩摩羅什)의 번역본이 있었으므로 십대제자 역시 이 시기부터 이론적으로는 알려져 있었던 셈이 된다.

16나한의 근거가 되는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는 654년 당나라 현장의 번역으로 처음 소개되었다. 따라서 16나한은 당나라 초기, 아니면 최소한 남북조시대까지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원본은 제목에도 등장하는 스리랑카의 아라한 난제밀다라가 석가 열반 후 800년이 되던 시기에 쓴 것이라고 한다.

18나한은 16나한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확대된 개념인데, 원래의 16나한에 마하가섭과 난제밀다라(慶友), 혹은 항룡나한과 복호나한이 각각 더해진 것이다. 그 외 500나한도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 열반 후 마하가섭이 주최한 최초의 결집 때 모였던 500명의 석가모니 제자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여하간 십대제자는 보통 석가모니를 바로 옆에서 모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16나한, 18나한, 500나한 등은 대부분 별도의 전각에 모셔진다.

그런데 십대제자는 조선시대 대웅전의 후불탱화로 가장 널리 그려진 영산회상도에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익숙한 편이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 역시 복잡한 문제들과 얽혀있다.

우선 십대제자는 ‘유마경’에 근거한다고 설명했지만, ‘유마경’에서 ‘십대제자’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열 명의 상수제자’를 제한하여 언급했던 것은 아니었다. 근거가 되는 ‘유마경’ ‘제자품’을 보면 석가모니께서 누구를 유마거사에게 문병 보낼 것인가를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차례로 열 명의 제자가 등장한다. 가장 먼저 사리불에게 문병 갈 것을 권했으나 사리불이 사양하고, 이어 차례로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마하가전연, 아나율, 우파리, 라후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난에게까지 권했지만 이들은 모두 문병 가기를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어 ‘보살품’으로 넘어가면서 보살들에게 차례로 권하지만 이들 역시 거절하여 결국은 문수보살이 문병을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십대제자가 부처님의 상수제자로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유마경’의 내용은 사실 십대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닌 셈이다.

물론 석가모니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 것은 아닐 터이고, 그래도 믿음직한 제자들을 선택하여 물어보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제자 중에서는 최고의 제자들이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열 명의 제자를 굳이 뽑아내어 불교미술에서 ‘십대제자’라는 이름으로 시각화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그 근거로서 현장법사가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인도에서도 알려진 경전이었을 것임이 분명한데도 인도불교미술에서 십대제자를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는 널리 알려진 십대제자가 왜 인도에서는 전혀 표현되지 않았던 것일까?

비록 열 명의 상수제자가 ‘유마경’에서 언급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십대제자’로 시각화된 것은 불교 외적 요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공자의 십현(十賢 또는 十哲)이 주목된다. 공자의 제자는 70여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논어’에서는 이중에서 다시 십철(十哲)을 들고 있다. 사실 ‘10’ 단위로 끊어 랭킹을 정하는 개념도 왠지 인도보다는 중국적 개념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유교에서 이렇게 열 명의 제자를 받들어 모시니, 불교에서도 마침 ‘유마경’ 등에 열 분의 제자가 언급되고 있는 점을 들어 십대제자를 만들어내었던 것은 아닐까?

▲ 경주 석굴암 십대제자상의 배열순서를 읽는 법.

▲ 경주 석굴암 십대제자상의 배열순서를 읽는 법. 이중 파란색 화살표가 ‘삼국유사’의 ‘동경흥륜사금당십성’조에서 기술하고 있는 순서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해서 십대제자가 성립되긴 했지만, 사실 정말로 언제부터 사리불, 마하목건련 등의 십대제자가 확립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경주 흥륜사에는 ‘십성(十聖)’이 모셔져 있었는데, 이 분들은 널리 알려진 십대제자가 아니라 신라불교의 초석을 닦은 아도화상, 이차돈, 의상, 원효, 표훈 등 열 분의 고승들이었다. 그 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표훈이 경덕왕 시기까지 활동했던 승려였으므로, 사실상 이번 글의 주제인 석굴암 십대제자상과도 서로 겹치는 시기에 해당되며, 아마 십성 중에서 가장 나중에 활동한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흥륜사는 지금 없지만, 석굴암의 십대제자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십대제자상으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석굴암의 설계원리에 대한 문헌기록이 일절 없어서 이 십대제자가 정말로 ‘유마경’에 등장하는 열 분의 제자인지, 아니면 십진법에 익숙한 동아시아에서 그저 열 분의 제자를 모신 것인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승불교 중심인 통일신라에서 보살보다도 더 많은 아라한을 석굴 안에 봉안했다는 것은 단순히 일반적 의미에서의 아라한이 아님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저 나한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중국의 석굴사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가섭·아난 두 존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유사한 시기 흥륜사에 모셔졌던 신라의 십성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나한의 모습이 대부분 한국인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이국적인 모습이 강하고, 또한 이후에 석가모니의 십대제자가 현재의 석굴암 십대제자상의 도상과 유사한 모습으로 유행하게 되는 반면, 신라십성 도상은 계승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단은 석가모니의 십대제자로 보는 것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석굴암의 십대제자 열 분 각각을 ‘유마경’에 언급된 십대제자 한분 한분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을까? 문제는 간단해 보인다. ‘유마경’에 언급된 순서를 차례대로 석굴암 십대제자상에 적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 문제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바로 그 순서가 문제인데, 우리가 현대적으로 생각하는 순서와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순서라는 것이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적으로 생각해보면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상부터 1.사리불, 2.목건련…, 방식으로 배정하면 된다.(사진 3의 파란색 화살표) 그런데 보통 석가모니 옆으로 가섭과 아난존자가 시립할 경우, 이 순서대로라면 가섭존자가 향좌측, 아난존자가 나중에 나오고 연배도 아래이므로 향우측에 서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향좌측에 아난, 향우측에 가섭이 서있다. 이는 동아시아에서는 좌측을 우선시해서 석가모니를 기준으로 좌측에 가섭을 봉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까와 반대로 들어가서 우측으로부터 순서대로 1.사리불, 2.목건련…을 배치한 것일까?(사진 3의 빨간색 화살표) 그런데 앞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흥륜사 십성의 기사 속에서 열 분 스님의 순서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동경흥륜사십성조’를 인용하자면, “동쪽 벽에 서향으로 앉은 소상이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이요, 서쪽 벽에 동향으로 앉은 소상이 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이다”라고 했다. 먼저 언급된 다섯 분의 소조상은 법당에 들어가서 향우측에 봉안되어 있었고, 다음 다섯 분의 소조상은 향좌측에 봉안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도부터 의상까지는 실제 활동연대에 따라 순서가 맞지만, 표훈부터 자장까지는 거꾸로 되어 있다. 활동연대 순으로 보면 표훈이 마지막에 나와야 한다. 그런데 왜 일연은 거꾸로 언급했을까? 아마도 일연 스님은 향우측 첫 번째의 아도 스님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순서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 생각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실제 소조상의 순서는 향우측이든 향좌측이든 앞에서 뒤로 상을 배치했기 때문에 향좌측의 상은 순서가 거꾸로 기록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이 순서라면 석굴암도 향우측 앞에서 뒤로 1~5, 향좌측 앞에서 뒤로 6~10번째 존자가 배치되게 된다.(사진 4의 파란색 화살표)

그러나 이 외에 또 다른 해석도 있다. 소목법(昭穆法)이 그 예인데, 좌,우,좌,우…를 번갈아가며 순서대로 배열하는 방법이며, 유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위패를 모시는 순서를 일컫는 용어이다.(사진 4의 녹색 지그재그 화살표) 조선시대 시왕전에서 시왕의 순서를 이 소목법에 따라 배열한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유교식 개념이기 때문에 석굴암에 이 방식이 적용되었을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소목법도 본존불의 뒤편 십일면관음상에서 시작하는 해석도 있을 수 있고, 입구 쪽에서 시작하는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 밖에 석굴암 안쪽에서부터 향우측 순서대로 1~5대 제자, 향좌측으로 6~10대제자의 순서로 봉안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는 ‘동경흥륜사십성조’와 좌우 배치는 같지만 앞뒤 순서만 바뀐 모습이 될 것이다.(사진 4의 빨간색 화살표)

중국의 경우 북위시대 운강석굴, 당나라 시대 용문석굴 등에도 십대제자로 추정되는 상들이 묘사되고는 있지만, 이 상들이 정말 십대제자를 의도한 것인지는 이 역시 명문이 없어 정확하지 않다. 그런 가운데 석굴암의 십대제자상은 석굴암의 전체 도상구성에서 그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본격적으로 십대제자가 본존을 에워싸는 도상으로 확립되는데 있어 어쩌면 동아시아에서도 선구적인 도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각각의 제자상이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제 남은 일은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십대제자 각각의 캐릭터를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밝혀 위에 제시한 개념들에 끼워 맞춰나가면서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 아닐까 한다.

주수완 고려대 고고미술사학과 강사 indijoo@hanmail.net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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